소설리스트

1화 (1/239)

1화. 1 – 1

“안 돼, 안 돼!”

내 입에서 내 것이 아닌 듯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니, 비명이 아니다. 나는 미친 듯이 손을 뻗으며 내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을 막기 위해 달려갔다.

피에 젖은 남자는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의 커다란 검이 오라버니와 어머니를 막는 하인들을 베어 넘어트렸다.

“안 돼!”

나는 계단에서 거의 굴러떨어지며 뛰어 내려갔다. 부딪친 무릎이나 넘어지면서 짚은 손바닥의 고통 같은 건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저, 그가 내 가족들을 죽이기 전에, 그리고 내 가족과 같은 하인들을 더 이상 죽이지 못하도록 말리고 싶을 뿐이었다.

남자의 검이 움직이는 게 아주 느리게 보였다. 동시에 내 움직임도 미칠 것처럼 느리게 느껴졌다.

“안 돼!”

무언가를 예감한 것처럼 어머니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천천히 남자의 검이 오라버니의 가슴에 파고들었다.

“안 돼!”

마지막 계단에서 굴러떨어졌음에도 나는 오라버니를 쳐다보며 비명을 질렀다. 남자의 눈동자가 어둡게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앞에서 오라버니, 올리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올리버!”

“올리버!”

어머니와 나의 비명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어머니의 품 안에서 올리버가 그대로 축 늘어졌다.

안 돼, 안 돼, 안 돼. 이건 꿈이야, 이건 거짓말이야.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머릿속이 멍해졌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거지? 저 남자는 왜 내 가족들을 공격하는 거야?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나는 단 하나도 붙잡지 못했다. 남자가 올리버의 몸에서 검을 뽑아냈기 때문이다.

그 잔인한 장면에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남자가 검을 한 번 흔들어 피를 털어 내는 것이, 올리버의 몸이 어머니의 품으로 쓰러지는 것이 보였다.

“올리버!”

어머니가 절규하며 오라버니의 몸을 끌어안았다. 그 앞에서 남자가 어머니를 향해 돌아서는 게 보였다.

안 돼.

나는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나 남자에게 뛰어들었다. 이 나쁜 놈이, 살인마가 어머니까지 해치게 할 수는 없었다.

“그만둬!”

나는 그의 허리를 끌어안고 잡아당겼다. 남자가 오라버니와 어머니에게서 떨어트리려 애를 썼다.

“레이디 비스컨.”

남자의 목소리는 어두웠고 무거웠다. 심지어 약간 예의 바르기까지 했다. 이 상황에서 나를 정확한 호칭으로 부른다는 게 질 나쁜 농담처럼 느껴졌다.

아니, 질 나쁜 농담이면 차라리 낫다. 남자의 행동과 다른 말투에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럼에도 나는 그의 허리를 끌어안은 팔을 놓지 않았다.

설령 그가 내 팔을 잘라 낸다 해도 놓을 수 없었다.

“놓으십시오.”

남자가 침착하게 말했다. 여전히 점잖고 예의 바른 말투였다. 왜 이런 짓을 하는 걸까. 눈물이 터져 나왔지만 나는 소리 내어 울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어, 어머니!”

울음 때문에 목소리가 이상하게 나왔다. 나는 흐느끼며 어머니를 불렀다. 도망쳐야 한다. 어머니 주변은 초토화되어 있었다. 죽은 하인들의 시체와 남자의 검에 다친 사람들의 신음이 끔찍했다.

“어머니, 어서!”

나는 남자를 잡아당기며 소리쳤다. 하지만 내가 온몸으로 매달려 잡아당기고 있음에도 남자는 전혀 제약을 받지 않는 것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어머니!”

도저히 안 되겠다. 한쪽 팔로는 커튼을 잡고 다른 팔로는 남자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버티던 나는 어머니가 도망쳤는지 보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어머니는 여전히 남자의 앞에 주저앉아 있었다. 그녀의 품에 축 늘어진 오라버니의 몸이 남자의 몸처럼 붉게 물들어 있는 게 보였다.

다른 점이라면 남자의 몸을 물들인 피는 그가 죽인 사람들의 피지만, 오라버니의 몸을 물들인 피는 오라버니의 몸에서 난 상처에서 번진 피라는 거겠지.

“이 짐승!”

오라버니의 몸을 끌어안은 채 어머니가 소리쳤다. 그녀의 눈이 남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어머니의 품에 안긴 올리버를 쳐다보며 그가 죽지 않기를 기도했다.

제발 살아 있길. 제발, 제발 살아 있길.

어쩌면 도망친 누군가가 사람을 불러올지도 모른다. 충분히 많은 사람이 온다면 오라버니를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간절하게 기도하는 내 머리 한구석에서는 묘하게 이성적인 또 다른 내가 있었다. 그리고 이성적인 나는 이미 오라버니가 죽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도 죽여!”

어머니의 절규에 다시 눈물이 왈칵 흘러나왔다. 안 돼, 안 돼요, 어머니. 나는 있는 힘껏 남자를 막으려 애썼다. 제발, 제발 누구라도 좋으니 도와줘.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어머니 쪽으로 한 걸음 다가갔을 뿐이다. 그것만으로 나는 그를 놓치고 반동에 못 이겨 벽 쪽으로 튕겨 나가떨어졌다.

다음 순간, 남자가 나를 돌아보았다. 이상하게도 그 태도는 나를 걱정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눈빛도.

벽에 부딪힌 내가 신음을 내뱉으며 몸을 움직이자 남자의 눈동자에 안도하는 빛이 어렸다.

하지만 튕겨 나간 나는 보지 못했다. 나는 자세를 고치자마자 정신을 차리고 어머니를 쳐다봤다.

“어머니!”

어머니는 여전히 거기 있었다. 왜 도망치지 않은 거지.

어쩌면 오라버니의 죽음으로 넋을 놓아 버린 건지도 모른다.

아니, 아니다. 올리버는 죽지 않았어. 아직 살아 있을 거야. 누군가가 온다면, 의사가 온다면.

나는 마음을 고쳐먹고 다시 남자를 향해 덤벼들며 소리쳤다.

“어머니!”

어머니가 정신을 차리고 도망쳤으면 좋겠다. 그러면서도 머리 한구석으로는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들이 품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딸은 살인마를 향해 몸을 날리고 있다.

어머니가 그런 상황에서 도망칠 수 있을까.

하지만 이미 늦었다. 남자는 나를 받아 안았고 그대로 나를 자신의 어깨에 짊어졌다.

“이거 놔! 이 짐승!”

몇 가지 욕이 내 입에서 흘러나왔다. 평소였다면 어머니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핀잔을 할 정도의 욕설이었다. 그리고 올리버라면, 내 오라버니라면 웃음을 터트렸겠지.

눈물이 흘러나와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이건 꿈이야. 현실일 리 없어.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남자의 등을 할퀴고 때렸다.

“어머니! 어머니! 도망쳐요!”

남자의 어깨에 올라가 있어서 내 시선에는 그의 등만 보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또 다른 내 눈에 남자의 앞에서 어머니가 오라버니를 끌어안고 있는 게 보였다.

내 고함에 어머니의 고개가 움직였다. 남자 외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남자를 노려보던 어머니의 눈동자에 빛에 돌아왔다.

그녀는 아들의 시체를 끌어안은 채 남자의 어깨에서 발버둥을 치는 나를 보고 비명처럼 소리쳤다.

“유제니?”

“도망쳐요!”

비명과 같은 내 고함에 어머니가 주춤거리며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그녀의 팔 안에서 올리버의 몸이 주르륵 떨어지자 어머니는 다시 아들의 몸을 끌어안으며 주저앉았다.

보일 리 없는 게 보이고 있었다. 남자의 어깨에 짐짝처럼 매달린 내 심장은 이미 갈가리 찢어져 있었지만, 또 다른 내 심장이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무너져 내렸다.

“유제니! 유제니!”

어머니의 비명에 나는 더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남자는 신경 쓰지 않고 어머니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오른손에 쥐고 있던 검을 왼손으로 고쳐 쥐었다.

저건 나 때문이다. 남자의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그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오른쪽 어깨에 짊어진 나 때문에 왼손으로 검을 바꿔 쥔 것이다.

그의 왼손이 검을 치켜들었다. 올리버의 몸을 끌어안고 있던 어머니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안 돼!”

남자의 어깨에 매달린 내가 멈칫했다. 나는 몸을 돌려 어머니를 보려 했지만 그건 거의 불가능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남자의 검이 어머니의 가슴에 꽂혔다.

묘한 정적과 불길한 움직임. 내 심장이 멈췄다가 터질 것처럼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나는 남자에게서 떨어지기 위해 몸부림을 치며 소리쳤다.

“안 돼!”

다음 순간,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눈앞에 어슴푸레한 내 방 안이 보였다. 아주 잠깐, 나는 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어서 주변을 정신없이 둘러봤다.

새벽이었다. 모든 사람이 잠들어 있었는지 조용했다. 하지만 잠시 후, 누군가가 내 방으로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무슨 일이에요?”

앤은 방문을 노크하지도 않고 들어와서 나를 살피며 물었다. 곧이어 그녀의 뒤를 따라온 셜리가 불을 켜 주었다. 그러자 방 안이 금세 환해졌다.

내 방이다. 그제야 나는 내가 꿈을 꿨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대로 침대에 털썩 누웠다.

“미안해. 또 악몽을 꿨나 봐.”

“또요?”

“지난번 그 꿈이야. 너무 끔찍해.”

다시 생각하자 눈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세상에, 너무 끔찍했다. 처음 보는 남자가 갑자기 우리 집에 들어와서 어머니와 오라버니를 죽이기 시작하는 꿈.

입 밖에 내기도 끔찍한 꿈이라 나는 그저 집에 강도가 드는 꿈을 꿨다고만 말했다.

“걱정하지 마시라니까요. 여긴 커런트에서도 가장 안전한 세이마리아 거리잖아요.”

“맞아요, 아가씨. 강도들도 이 동네에서 강도질을 하면 목이 바로 이렇게 된다는 걸 알걸요?”

셜리가 그렇게 말하며 자기 목을 긋는 시늉을 해 보였다.

나도 안다. 발시안의 수도 커런트에서 가장 안전한 지역을 꼽자면 귀족들이 사는 세이마리아 거리는 두 번째쯤 될 것이다. 첫 번째는 어디냐고? 왕궁이 있는 로열 거리겠지.

그래도 여전히 슬펐고 무서웠다. 꿈속에서 나는 그 남자를 알고 있었다. 남자도 내 이름을 알고 있었으니 나를 알고 있겠지.

하지만 나는 모르는 남자다. 며칠 전 꿈에서 보기 전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남자였다. 그럼에도 머릿속에 남자의 얼굴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칠흑처럼 새까만 머리카락과 푸르스름한 눈동자. 키가 아주 컸고 건장한 체격이었다.

“따듯한 우유를 가져다드릴까요?”

내가 여전히 울고 있자 앤이 다정하게 물었다. 이 나이에 악몽을 꿨다고 따듯한 우유라니 좀 창피하다. 하지만 앤은 나와 같이 자라다시피 했고 내게 없는 언니와 비슷해서 나는 코를 훌쩍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앤이 셜리를 쳐다보자 셜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나갔다. 문이 닫히자 앤이 침대에 걸터앉아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러게 그런 무서운 책은 읽지 마시라고 했죠, 제가.”

며칠 전에 읽은 소설 때문에 이런 꿈을 꾼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소설 내용과 전혀 다른 꿈이라 소설 때문은 아닌 것 같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뒤 셜리가 따듯한 우유를 가져오자 앤이 내게 우유를 건네며 말했다.

“다시 주무세요. 오늘 오후에 왕궁에 가셔야 하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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