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8화
결착(22)
그 순간 운호는 깨달았다.
지금 눈앞에 이준형의 모습을 하고 있는 자는 이준형이 아니다. 그렇다고 그가 티샤 마이트레야인가 하면 그것 역시 아니다. 그는 티샤 마이트레야라는 고대의 수도자였으며 동시에 그와 거래를 했던 화산파의 백운진인이었고, 그로 인해 몸을 뺏겨버린 이준형이었다. 또한 동시에 그에게 치명적인 위해를 가했던 목운평의 일부도 그와 함께였으며, 바로 조금 전까지 그와 싸웠던 살리답 역시 여기 있었다.
그는 오랜 세월동안 십만대산에서 스러졌던 수많은 사람들의 총합이었다.
“역시 알아보는구나. 하긴 지혜의 아라한과를 먹었으니 어찌 모를까.”
감히 상대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
대체 저것을 뭐라 불러야 할까?
신(神)?
인간의 형상을 하였으나 인간의 이해를 아득히 벗어났으니 저것이야말로 그 칭호에 가장 어울리는 존재가 아닌가.
이대로는 안 된다.
파검의 외침을 뒤로한 채 천상의 문을 더 활짝 열었다.
양신을 연료로 하여 그 혼을 더 강하게 진동시켰다. 그리하여 태초의 본질인 영이 그 부름에 응답한다.
활불을 상대하던 당시처럼.
운호의 시야가 드높은 천상으로 향했다.
지상의 법칙을 벗어나 인세의 이해를 넘어선다.
‘저것은?’
거대한 나무.
그곳에는 미륵불이 하생하기로 약속된 그 거대한 나무가 홀로 우뚝 서 있었다. 아니, 아니다. 저것은 그 형상이 용화수일뿐. 그 실체는 그와 달랐다.
사람과 사람과 사람.
끝없이 짓뭉개진 사람으로 쌓아 올린 거대한 나무. 그 앞에 이준형의 얼굴을 한 그가 인자한 표정으로 결가부좌를 한 채 역으로 된 항마촉지인의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이준형의 탈을 쓴 그가 부드럽게 웃었다.
끝없는 사람으로 뭉쳐진 그 나무가 함께 웃었다.
부처의 웃음을 오직 마하가섭만이 알아들었다 하여 염화미소(拈華微笑)라고 했던가?
운호는 어쩐 일인지 저 괴물의 웃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 신이 된 그가 인간을 긍휼히 여겨 깨달음을 나누었다.
하지만 이 세상은 수라계였고 인간이라 여긴 이들은 모두가 수라 나찰이었으니, 그 깨달음은 결국 허망하였다. 자비가 만들어낸 커다란 실수였다.
그 가르침을 이어받은 내가 신이 남긴 유해를 수습하여 그와 같은 경지에 이르렀으니, 이제 그 실수 역시 내가 수습하겠노라.
그 막대한 의념 앞에서 운호가 검을 내밀었다.
그것은 실로 단단한 마음이었다.
하지만 한 인간의 마음은 수백만, 아니 수천만이 쌓아 올린 그 거대한 의념 앞에서는 참으로 무력하였으니 운호는 그것을 막아낼 유일한 방법이 무엇인지를 이미 알고 있었다.
-······야.
거의 들리지 않는 파검의 희미한 외침.
그래, 천리라고 했던가? 어쩌면 이것은 천리가 안배한 운명이 아니었을까?
하필 그에게 몽원경이 찾아왔고 최초의 황제 이후 이천년 가깝게 내려온 연단사 일족의 비원이 그의 몸에 함께 하고 있다는 것. 그래, 그라면 역대 그 누구보다 높은 곳까지 오를 수 있으리라. 그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양신(陽神)에는 충분히 그럴만한 힘이 있다.
백과 육을 불사른다.
그리하여 혼을 더 크게 진동시켜 천상의 더 높은 곳까지 올라간다.
도가의 목표는 신선(神仙)에 있다.
하지만 신선에도 그 등급이 있으니 양신을 이룬 운호는 이미 도가의 기준으로 하자면 신선의 일종인 지상선(地上仙)이라 부를만하다.
그리고 지금 그 양신을 불살라 하늘로 비상하는 운호는 도가에서 말하는 최고의 신선.
전생과 현생과 후생에 걸쳐 쌓아올린 공덕이 하늘에 닿았을 때만 다다를 수 있다는 천선(天仙)에 도전할만 하였다.
그것은 도교의 유명한 팔선조차 다다르지 못한 경지로 도가의 근본이라 볼 수 있는 옥청, 상청, 태청의 삼청을 가장 가까이에서 따르는 존재였으니 도가의 삼청이 인격을 넘어 우주의 이치 그 자체임을 생각해본다면 천선 역시 단순한 신선을 넘어선 일종의 법칙 그 자체에 가까우리라.
그래, 그러한 경지라면 저 수천만, 아니 수억의 혼과 백. 그리고 육을 착취하여 쌓아 올린 신과 같은 존재와도 비길 만하겠지.
운호의 시야가 한층 더 아득하게 높아졌다.
종화는 점점 더 높은 곳을 향하고 있었다.
그녀의 삼생은 모두 높은 공덕에 닿아있었으니 어쩌면 그녀야말로 본래 지금 운호의 자리에 이르러야 하는 정명한 운명인지도 몰랐다.
모용준경은 그 할아버지를 닮고자 했다.
그것은 무신 모용경이 자신의 할아버지를 부정했던 것과 사뭇 달랐으나 그 끝은 어쩌면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느껴졌다.
혁리광은 종화를 힐끔 바라봤다.
중늙은이가 한참 팔팔한 여인에게 연심을 품었으니 참으로 주책이 아닐 수 없었다.
운호가 시선을 돌렸다.
그의 의형은 단단한 껍질을 두드리고 있었다. 치열한 싸움은 언제나 인간을 성장시키는 법이다. 물론 그 성장은 지금 당장이 아닐 수도 있지만 의형이라면 언젠가 껍질을 깨고 나아갈 수 있으리라.
조왕 주고수는 두베를 버리지 못했다. 자신의 이름을 빼앗기고 황룡검이라 불리는 그 검이 흘리는 마력을 이겨내지 못하는 한 그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리라.
혹참가포 조충은 두 개의 손가락을 잃었다.
하지만 이번 싸움을 통하여 조왕의 마음을 얻었고, 남궁강에게 신세를 베풀었으니 어찌보면 손가락 두 개 정도는 남는 장사일지도 몰랐다.
검왕 남궁벽은 여전히 잘 살아 있었다.
힘이 떨어진 것처럼 헉헉거리는 것과 달리 그의 기해혈은 밝은 빛을 뿜어내고 있었으니 어쩌면 이 자리에서 가장 쌩쌩한 것은 이 노인이리라. 하지만 그렇기에 그는 자신의 호적수가 얻었던 것과 같은 불멸의 명예를 영원히 얻지 못하리니 스스로는 죽는 순간까지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용화수 아래 앉아있던 이준형이 일어났다.
그것은 마치 하나의 세계가 움직이는 것과 같았으니 가히 그 위세는 가히 하늘 위와 하늘 아래에서 홀로 존귀함을 외쳤던 이의 위세에 비할만 하였다.
그 앞에 선 운호의 정신이 한층 더 높은 곳으로 향하였다.
이제 그의 시야는 십만대산을 벗어나 저 아득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으니 그 가운데 반짝반짝 빛나는 것들이 바로 그의 삶을 통해 얻었던 인연들이었다.
가장 크게 빛나는 덩어리는 역시 청해에서 출발하여 이곳으로 달려오는 서평왕부와 공동, 곤륜의 병력이었다.
영현 아씨는 참으로 아름다웠다.
그녀의 거죽은 비록 아름답다고 말할 수 없었지만, 고작 그것은 그녀의 아름다움을 가릴 수 없었으니 굴불신마는 자신의 후계를 먼 곳에서 찾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청해대장군부까지 동행했던 조유는 참으로 오만한 사내였다.
하지만 그는 그 오만함 이상의 신의가 있는 사내였으니 그 신의는 7년에 가까운 시간이 지난 지금도 변함이 없는 듯 보였다. 이 어려운 싸움에 백운호라는 이름만으로 기꺼이 참가한 것을 보면 말이다.
안휘성이 보였다.
파겸의 외손녀 조헌화는 운호 자신의 이름을 딴 아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아이는 작은 무덤 앞에서 뒤뚱뒤뚱 나비를 쫓고 있었는데 그 무덤에 핀 풀이 참으로 푸르러 운호는 자신도 모르게 저 높은 천상이 아닌 저 낮은 지상으로 내려갈 뻔하였다.
이준형이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선언하였다.
나는 이미 존귀하였던 신에게 수계를 받았으니 그의 가르침이 천하를 평안케 하지 못하였으나 나는 가르침이 아닌 행동으로써 천하를 평안케 하리라.
운호의 육체가 타올랐고 쌓아올린 업이 소멸하며 거기서 발생한 천상의 향기가 널리 퍼졌다. 그리하여 운호의 혼은 더 높은 곳으로 뛰어올랐다.
저 머나먼 섬서성이 한 눈에 들어왔다.
화산.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화산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어찌하여 이 황량한 돌산에 꽃(華)이라는 이름이 붙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의 사제인 장호는 오늘도 수련을 하고 있었다.
그가 남기고 간 비급을 살피며 매농검을 수련하는 그의 검은 참으로 보기 좋았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가 완성해둔 비급이 자운검까지이며 무형검은 아직 주해를 남기지 못하였다는 점 정도다. 미련을 버리기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떨쳐내야 했다. 그의 몸이 조금 더 가벼워졌다.
짐을 싸는 장인 어른이 보였다.
화를 내는 장모님도 보였다.
정말 다시 구라파를 가야겠냐며 앞으로 홍매당은 어쩔 생각이냐는 장모님의 이야기에 종 차석도 그만하면 훌륭하고 아현이도 다 컸으니 홍매당을 건사할 만하다며 이제 짐을 내려 놓아도 괜찮다 이야기하는 장인어른의 등짝에 장모님의 손바닥이 새겨졌다.
아현이가 보였다.
그녀는 검을 휘두르고 있지 않았다. 그 대신 편안한 의자에 앉아 작은 천 위에 매화꽃을 수놓고 있었다. 참으로 삐뚤빼뚤한 솜씨가 엉망진창이다. 하지만······.
바늘을 내려놓고 배를 쓰다듬는 그녀의 손길이 참으로 신중했다.
실로 작은 박동.
그것은 너무나도 작아서 고작 새끼 손톱 크기밖에 되지 않는 생명체였다. 하지만 그 무게는 실로 너무나도 무거워 스스로를 불태워 저 드높은 천상에 오르던 운호를 한순간에 지상으로 끌어내렸다.
-운호야!!!
파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준형은 마치 신과 같은 모습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그를 탄생시킨 이 거대한 동굴은 여전히 몽원경을 닮아 있었다. 그리고 이 거대한 동굴은 티샤 마이트레야가 자신의 혼과 백 그리고 육을 바쳐 만들어낸 산실이었다.
저 높은 곳에서 이 가까운 곳까지 내려온 운호는 마침내 그 스스로를 바라보았다.
참으로 엉망이었다.
대관절 세상에 어떤 멍청이가 있어 자신의 욕망을 억누르고 살고자 하는 의지조차 저버린 채 그저 저 높은 천상에 올라 하나의 법칙이 되기를 갈망한단 말인가.
운호와 하나가 되어 단단하게 붙어 있는 몽원경은 이 티샤 마이트레야가 모든 것을 희생하여 만들어낸 이 산실을 닮아 있었다.
그렇다면 몽원경은 대체 무엇을 만들고자 했음인가. 증무진인의 백을 휘발하여, 파검의 백을 휘발하여. 그리고 활불의 백을 휘발하여 완성된 백운호는 과연 무엇인가.
천상과 맞닿았던 운호가 마침내 지상에 바로 섰다.
그는 마침내 이해할 수 있었다. 저 신을 흉내낸 괴물을 제거하고자 했던 누군가가 남겨둔 이 몽원경이라는 유산이 무엇인지를.
하지만 틀렸다.
신을 흉내 낸 괴물을 잡을 수 있는 것은 마찬가지로 신을 흉내 내는 괴물이 아니었다.
인간의 몸으로 신에 올랐던 그는 지상에서 지상의 언어로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펼쳤으니 그것은 마땅히 지상의 것은 지상의 법에 따름이 옳기 때문이리라.
운호가 파검을 꾹 쥐었다.
신을 흉내 낸 괴물이 성큼 걸어왔다.
“전하, 마라 파피야스는 그래도 부처에게 한 번 정도는 꿈틀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물며 저것은 그저 부처를 흉내내는 괴물이거늘 스스로 마라 파피야스의 화신을 자처하시는 분이 한 번의 꿈틀거림조차 못해서야 어찌 고개를 들고 하늘을 볼 수 있겠습니까.”
굴불신마와 운호는 수백 리를 떨어져 있었다.
신을 흉내 낸 괴물은 이제 더 이상 아무런 위협도 되지 못하는 미물의 헛소리를 신경 쓰지 않았다.
인간이 어찌 개미를 신경 쓴단 말인가.
그저 있는 줄도 모르고 밟고 지나갈 뿐이다.
운호가 화산을 떠올렸다.
사람의 힘으로 쌓아 올린 검술들을 기억하였다.
지상의 규칙에 따라 차곡차곡 쌓아 올리는 자하의 기공을 기억하였다.
움켜쥔 파검을 휘둘렀다.
지금까지 그의 인생을 움켜쥐고 휘둘렀던 것은 몽원경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움켜쥔 것은 운호였고 휘둘리는 것은 몽원경이었다.
신을 닮은 괴물이 포효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부처를 무릎 꿇렸던 신마의 눈동자가 특유의 귀화를 피어올렸다.
“참으로 건방진 녀석이로고.”
부처가 말했다.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다(緣起法).
티샤 마이트레야가 있기에 신을 닮은 괴물이 있었고, 그렇기에 몽원경이 있었으며 운호가 있었다.
운호가 휘두른 몽원경이 자줏빛 향기를 남기며 흐드러지게 피어났다.
그것은 곧 화산이었으니 운호가 휘두른 화산은 그저 장엄한 돌산이 아닌 그가 저 높은 곳에서 바라본 아름다운 꽃을 닮아 있었다.
그래, 그 꽃은 어쩌면 집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을 그녀가 수놓은 그 삐뚤빼뚤한 매화꽃일지도 몰랐다.
- 완 -
요게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