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7화
결착(21)
공동의 두근거림은 점점 커졌고 터진 둑에서 물밀듯이 쏟아지는 기억을 되새기듯 이준형의 수다는 점점 도를 더해갔다.
아니, 이제 이야기를 떠드는 이는 더 이상 이준형이라고도 할 수 없었다. 그에게 쏟아져 내리는 기억은 더 이상 이준형의 것이 아니었으니까.
“참으로 너무 하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냐? ‘인세의 구원자는 마이트레야다. 하지만 그것이 너는 아니다.’ 라니. 그것은 운명이었다. 어쩔 수 없었지. 신의 말씀이었으니 그것은 진실일 수밖에.”
-미쳤구나.
대체 무엇일까.
운호는 이 원형의 공간에서 이상한 기시감을 느꼈다.
“헌데 말이다. 어느 날인가 신께서 지상을 떠나셨다. 아난다 그 멍청한 녀석은 신께 떠나지 말아 달라고 빌지 않았지. 아마 나였다면 그 발을 핥아서라도 부탁했을 것이다. 맙소사. 신이 없는 세상이라니!!”
“다행히 신께서는 우리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고 떠나셨다. 심지어 그 위대한 신성까지도!! 하지만 마하카사파 그 비루한 종자와 멍청한 아난다는 그분께서 남기신 신성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아귀처럼 그것을 탐내는 왕들에게 그것을 나눴고 종국에는 자기들끼리 패를 나눠 싸움을 벌였지. 어리석고 또 어리석도다. 그래, 천하에 그것을 이해한 이는 오직 나 하나였으니, 그제서야 나는 내가 인세의 구원자가 아님을 이해할 수 있었다. 신께서 직접 가르침을 남긴 아라한들조차 수라도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으니 이곳이야 말로 수라계가 아니겠는가.”
공동이 또 한 번 크게 울렸다.
건곤의 이치에 따라 검을 휘두른다. 그의 앞에 선 이준형은 시시각각으로 달라지고 있었다. 운호는 오직 검술을 통하여 그것을 명징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깨달았다.
십만대산을 떠도는 이 터무니없는 규모의 마기가 모여드는 것은 저 이준형의 몸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이 공간 그 자체였다. 그리고 그것을 눈치 챈 순간 이 공간이 대체 어째서 익숙한 기시감이 느껴지는 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몽원경.”
-응? 뭐라고?
“몽원경입니다.”
같지 않았다.
몽원경이 사람의 심상에 존재하는 공간이라면 이곳은 현실에 존재하는 공간이라는 차이가 있었다. 또한, 몽원경이 초월자의 백을 불러들인다면 이곳은 근방의 모든 백을 마구잡이로 빨아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운호는 본능적으로 이 공간이 단지 방식의 차이일 뿐, 몽원경과 그 구성 원리, 그리고 그 목적이 동일하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두근!!!
거대한 박동.
그리고 그것을 따라 이 공간이 품고 있는 티샤 마이트레야라는 인물에 대한 모든 것이 마기라는 매개를 통하여 이준형에게 새겨졌다.
“알았다.”
횡설수설 끊임없이 이야기를 쏟아내던 이준형의 양손이 운호의 검날을 움켜쥘 듯 움직였다.
물론 가만히 지켜볼 운호가 아니었다. 이준형의 손을 감싸고 있던 찐득한 어둠이 갈라지고 그 속에 존재하던 육신에서 핏물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이준형의 몸을 입은 티샤 마이트레야는 아무런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그가 휘두른 손을 따라 핏물이 튀어 올랐다.
핏물과 섞인 막대한 어둠.
운호의 검이 그것들을 걷어냈다.
자욱한 어둠이 그의 손을 빠르게 회복시켰다.
“그 어설프기 짝이 없는 신성!! 단순한 아미타의 화신이 아니었구나!! 그대는 아난다!! 아난다의 흔적이였구나!! 그래, 아난다라니. 내가 헷갈릴 만했다. 그 생김새가 신을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지척에서 신을 모셨으나 그저 달달 외는 것 밖에 못하는 머저리. 결국 마지막에 남긴 것도 그저 흉내뿐이었으니 결국에는 그저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텅 빈 공간이로다.”
몽원경에 관한 이야기였다.
운호 역시 항상 궁금하게 생각했었다.
이것은 대체 누가 만들었으며 대관절 무엇이기에 마의 멸절을 그 목적으로 하는지.
하지만 묻지 않았다.
지금 눈앞에 있는 이는 이 모든 일의 원흉이며 목적이다.
그를 멸절한다면 그것으로 모든 일은 해결이 된다.
운호의 마음 속, 몽원경이 크게 진동했다.
고목처럼 천천히 삭아가는 노인이 먼지처럼 흩날렸다.
화산이 몸을 일으켰다.
앞서 한차례 이준형의 탈을 쓴 티샤 마이트레야는 이것을 막아냈었다.
하지만 조금 전.
상대는 그 미친 짓으로 손에 입은 상처가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조금이라면······.
건곤의 검이 아니었다.
운호의 혼이 크게 진동했다. 저 드높은 차원. 누군가는 도솔천이라 말할 것이고 누군가는 선계라고 말할 그곳에 있을 영이 그 진동에 기꺼이 응답한다.
백과 육이 스스로를 불태웠다.
-운호야!!
파검의 다급한 외침.
운호의 검을 따라 검은 마기들이 화르륵 불살라졌다. 별빛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운호의 검에 휘감긴 별빛과 이 어둠이 길항을 이루고 있었다면 지금 운호의 검을 따르는 것은 저 천상의 가장 밝은 햇볕이었으니, 빛의 부재인 어둠은 감히 그것을 막아낼 수 없었다.
어둠을 연료로 하여 타오른 빛이 천상의 향기를 내뿜었다.
운호의 의식이 더 높은 곳으로 고양됐다.
실로 명료하였다.
건곤검의 이치는 그에게 전지를 주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 검이 닿는 반경 일 장 내외의 좁은 공간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간 운호의 의식은 그것을 넘어 이 공동 전체를 아울렀다.
-두근!!!!
그리고 그 순간,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거대한 진동이 공동을 크게 울렸다.
강철조차 찢어발길 열 개의 손가락은 그저 그의 몸을 감싼 천쪼가리를 찢었을 뿐, 그 육체는 조금도 범할 수 없었다.
아마 이곳이 아니었다면 달랐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굴불신마는 스스로를 유일한 천마라 칭하는 마인이었다. 십만대산의 막대한 마기는 그에게도 무한에 가까운 힘을 공급해주고 있었다.
“안된다!! 굴불신마!! 건드리지 말아라!!”
“글쎄, 내가 이것을 건드린다고 해서 네가 뭔가를 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구나. 오물.”
“후회할 것이다.”
“익숙한 일이다.”
그리고 그렇기에 그는 저 작은 돌덩이가 내뿜는 터무니없는 기운에 혹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실로 무한에 가까운 힘이었다. 전설상에 존재하는 용의 내단이나 되야 저것에 비할 수 있을까.
아수라가 이를 악물고 달려들었다.
-뻐억
굴불신마의 다리가 그를 걷어찼다.
하지만 그 순간, 아수라는 마치 유가밀공이라도 익힌 것마냥 그의 몸에 달싹 달라붙더니 달단의 고수들이 사용하는 씨름으로 그에게 공격을 걸어왔다.
달자들의 씨름은 일반적인 수싸움과는 또 다른 종류의 싸움이었기에 그 기술을 어느정도 이해하고 있지 않다면 아무리 강한 고수라도 낭패를 보기 십상이었다. 하지만 굴불신마는 청해대장군부의 수장이었으며, 그의 할아버지인 초대 대장군 영균이 적으로 상대했던 이들이 바로 그 달자들이었다.
압도적인 힘.
아수라의 몸이 굴불신마에게서 뜯겨나갔다.
석가모니의 사리가 비명을 지르듯 힘을 내뿜었다. 그 모습에 굴불신마가 더 기꺼운 미소를 지었다. 무려 영성까지 존재하는 신물이라니. 그야말로 새로 시작한 서평왕부의 보물로 삼기에 딱 알맞은 신물이다.
-덥썩
마침내 그의 손이 석가모니불의 사리를 움켜쥐었다.
“흡!!!”
그리고 보이지 않는 기운에 꽁꽁 묶인 그것을 있는 힘껏 뜯어냈다. -뚜두둑 하는 소리와 함께 석가모니불의 사리가 조금씩 그곳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아아아아악!!!!
아수라가 비명을 내질렀다.
무한히 재생하던 그의 몸이 마치 파도를 맞은 모래성처럼 허물어졌다. 그리고 동시에 터무니없이 막대한 기운이 굴불신마의 손에서 요동쳤다. 화경에 이른 그의 육체가 그것을 감당했다.
두 가지의 신비를 동시에 감당하고 있던 진법의 핵이 불굴신마의 압도적인 무력에 의해 그 자리를 강제로 벗어나기 시작했다.
천지가 요동쳤다.
그리고 한순간
-쾅!!!!!
아수라의 몸이 완전히 허물어지고, 굴불신마의 몸이 우뚝 섰다.
그의 손에 쥐어진 석가모니불의 사리는 여전히 강하게 진동했지만, 그의 눈동자에는 더 이상 특유의 이글이글 타오르는 귀화가 보이지 않았다.
남궁철이 검을 휘둘렀다.
가닥가닥 끊어진 진기는 이제 제대로 흐르지도 않았다. 물론 그가 다른 이들보다 더 열심히 앞장서서 싸우기는 했으나 남궁세가의 후계자로 각종 귀한 것들을 먹고 자란 그가 그런 상황이다. 다른 무사들의 상황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게다가 마인들에게 밀려나고 또 밀려나다 보니 어느새 최초에 갖췄던 진형은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그런 상황에서도 남궁철이 검을 휘두르고 버틸 수 있는 것은 우화등선을 하던 파검이 그에게 전수했던 무공의 힘일 것이다. 남궁세가의 무공이 압도적인 힘으로 상대를 짖누르는 성질이라면 파검의 무공은 전장에서 스스로 쌓아올린 밑바닥의 그것에 기원을 두고 있었으니까.
-콰직!!
만련공방에서 천금을 주고 구매했던 명검도 이제는 기름이 끼고 날이 나가 사람의 몸조차 제대로 베어내지 못했다. 팔에 검이 박힌 마인이 흉폭한 얼굴로 주먹을 휘둘렀다.
-부웅
철판교의 한 수.
그대로 다리를 내밀어 상대의 무릎을 짓이기려 했으나 그것은 남궁철 자신의 몸 상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실수였다. 뒤로 몸을 눕힌 그의 몸을 두 다리가 제대로 지탱해내지 못했다.
-철푸덕
핏물과 육편이 난자한 땅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마인의 발이 딱을 찍었다.
게으른 당나귀가 땅을 구르듯 나려타곤의 한 수로 그 공격을 피해냈다. 바닥을 구르던 돌멩이과 뼈조각들이 진기가 흐르지 않는 무른 살점을 파고들었다.
아릿한 통증.
하지만 그것을 느낄 겨를도 없었다.
남궁철이 상대하던 마인이 아닌, 한쪽 팔이 찢겨진 다른 마인이 바닥을 구르던 남궁철에게 달려들었다.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순간.
그의 동생을 생각하면 항상 이럴 때 대단한 깨달음을 얻어 위기를 극복하곤 했다. 솔직히 이 싸움에 참여할 때 그런 것을 조금은 생각했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그는 무려 우화등선을 하는 인물에게 직접 무공을 전수받은 후계자 아니었던가.
하지만 절체절명의 순간.
깨달음은 고사하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그의 어린 아들 남궁호의 얼굴이었다.
‘호야!!’
그리고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그것은 남궁철이 기대했던 깨달음과는 거리가 멀었다.
천지에 자욱하던 마기가 한순간에 눈 녹듯이 사라졌다.
물론 여전히 십만대산은 마역이었고 그곳을 흐르는 기운의 대부분은 마기였다. 하지만 구곡황하진으로 만들어진 그 진득한 악의와 비교한다면 이것은 그저 순한 양과도 같았다.
단 한 번의 호흡에 막대한 진기가 모여들었다.
조금 전까지 터무니 없는 상황에서 싸움을 거듭한 탓일까? 어쩐지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거대한 힘의 흐름을 움켜쥔 것 같았다.
남궁철의 검이 빛났다.
봉신방연의의 끝을 아는가?
그 끝은 절교의 멸망이 아니었다.
봉신방연의의 끝은 영웅과 선인의 희생으로 365인의 신이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마침내 끝이로구나.”
이준형이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