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5화
결착(19)
아수라의 몸이 반파됐다.
보통 사람의 몸에 사용하기 힘든 표현이었지만 지금 아수라의 몸을 표현하기에는 그보다 더 적절한 단어가 없었다.
“오셨습니까.”
“지금 늦었다고 타박하는 것이냐?”
“그럴 리가요. 오히려 생각했던 것보다 일찍 와주신 덕분에 살았습니다.”
운호가 반파된 아수라의 몸을 향하여 검을 휘둘렀다.
그 일 검에 반파된 아수라의 몸이 또 다시 반으로 갈라졌다.
십만대산은 불사의 마공이 시작된 곳이다. 또한 이 구곡황하진이라는 이해할 수 없는 상고의 절진과 그 절진으로도 다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신비가 가득했으니 저렇게 신체의 절반이 날아간 몸뚱이라고 다시 일어서지 말라는 법이 없었다.
그리고 운호의 걱정이 기우가 아니었던 것이 밝혀지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끝난 게 아니로구나.”
“네.”
기운의 흐름이 심상치 않았다.
분명 아수라는 죽었다. 그 몸은 반파됐고 그나마 반파된 육체마저 운호의 검이 완벽하게 두 쪽으로 갈라버렸다.
하지만······.
-아프다!! 고통스럽다!!
놀라울 정도로 강력한 의념이 사방에 울려 퍼졌다.
육합전성? 아니 그보다는 심어(心語)에 더 가까웠다.
흡사 시간이 되감기는 것 같았다.
아수라의 갈라진 육체들이 순식간에 한 자리로 모여들어 다시 사람의 형상을 이룬다.
역천(逆天). 그것 말고는 도저히 이 광경을 설명할 단어가 없었다.
불사의 마공 역시 역천의 한 갈래였으나 이처럼 터무니 없지는 않았다.
물론 그것을 가만히 지켜볼 굴불신마가 아니다.
움켜쥔 그의 주먹이 그 모든 일이 이뤄지는 중심부를 강타했다.
실로 거대한 충돌.
-······.
하지만 소음은 없었다. 당연했다. 굴불신마의 주먹은 여전히 아무것에도 부딪히지 못했으니까. 마치 끝이 없는 무저갱을 향해 주먹질한 것과 같은 그러한 감각.
그 속에서 굴불신마가 노호성을 터트렸다.
무저갱과 같은 공간 속에서 무진장에 가까운 마기가 굴불신마의 몸을 따라 분출됐다.
그것은 스스로를 부처의 대적자.
천자마 마라 파피야스라 칭하는 이의 전력이었다. 한없는 공간이 한순간에 뒤흔들린다. 무언가 구슬이 깨지는 것과 같은 소리가 공간을 울려 퍼졌고, 마침내 굴불신마의 주먹이 시간을 거스르던 아수라의 몸에 닿았다.
하지만 조금 늦었다.
이미 본래의 형태로 되돌아온 아수라의 몸이 서너 걸음 뒤로 밀려났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본래의 형태가 아닐지도 몰랐다. 무언가 이질적인 감각. 그 속에서 이전과 조금 다른 음색으로 아수라가 나지막히 감탄했다.
“굴불신마라 하더니. 정말이지 터무니가 없구나.”
굴불신마는 그 말에 답하지 못했다.
거친 호흡.
방금의 공격은 굴불신마 역시 상당한 기력을 소진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를 대신하여 운호의 검이 번뜩였다.
아수라가 휘두르는 역천신모가 그 검을 따라 움직였다.
-챙챙챙
면면부절
그렇게 끊임없이 이어지는 역천신모의 움직임이 운호의 공격을 막아냈다. 운호의 눈동자에 이채가 어렸다.
대체 무슨 요술인 것일까.
아수라의 손에 들린 역천신모에는 운호가 끊어버렸던 신수 청랑의 갈기가 처음과 같은 모습으로 흩날린다.
“무척이나 궁금한 표정이로구나.”
운호가 답하지 않았다.
바쁘게 이어지는 공방. 운호의 검은 아수라의 몸을 위협했지만 아수라는 지금 당장 운호를 이기는 것보다 말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처럼 말을 이어 나갔다.
“네가 봉신방연의를 알고 있다면 그것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영웅이라 불릴만한 인간들과 선인 가운데 365인을 선발하여 천계의 신으로 삼겠다는 터무니없는 이야기지. 헌데 말이다. 놀랍게도 그 터무니 없는 이야기가 일정 부분은 현실에 바탕을 둔 것이라면 어떠하냐.”
그야말로 신화적인 이야기.
물론 우화등선에 한 걸음을 걸쳐둔 운호의 상태 역시 현실보다는 신화에 더 가까운 상태였으나 영웅과 신선. 그리고 천계의 신과 같은 이야기는 그것보다 한층 더 비현실적인 이야기였다.
그리고
-퍼억!!
쉴새 없이 무언가를 떠들던 아수라의 옆구리로 굵직한 발차기가 꽂혔다.
호흡을 골라낸 굴불신마의 기습적인 공격이었다.
그 공격에 허리가 기묘하게 꺾인 아수라의 몸이 크게 튕겨 나갔다.
“쯧, 그것참 실로 쓸데없는 헛소리로구나.”
“무슨 목적일까요.”
“목적?”
아수라가 튕겨 나간 자리에서 어마어마한 기운이 소용돌이쳤다. 그리하여 튕겨 나간 아수라가 제 자리에 섰을 때 꺾였던 몸은 어느새 본래의 그것으로 돌아가 있었다.
“목적이라면 역시 시간 끌기겠지.”
“그렇다면 역시······.”
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했다.
심상치 않은 기운의 흐름.
그리고 명백하게 시간을 끄는 상대. 결론은 하나다.
누군가는 아수라를 상대하고, 누군가는 그 의도를 분쇄한다.
운호가 먼저 말했다.
“저와 개인적으로 인연이 깊은 사이입니다.”
“글쎄, 고작 인연 따위에 양보하기에는 걸린 것이 너무 큰 것 같구나. 게다가 알다시피 나는 이런 환경에서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만?”
“저희들의 싸움에 그것이 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겠습니까. 그리고 왕야, 저는 제 몫을 이미 처리했습니다. 그러니 저기, 늦게 오시는 바람에 해야 할 몫이 남았으니 처리하고 따라오시지요.”
운호의 시선이 아수라를 향했다.
가볍게 창을 휘두르며 공격에 대비하는 모습이 참으로 끈질겨 보인다.
“끄응······.”
굴불신마가 더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느긋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았으나 두사람 모두 지금 이 상황이 얼마나 위급한지 그리고 잠깐의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중원의 오악을 모두 합친 것보다 수십 배는 광활한 산맥. 그 거대한 산맥의 기운이 방향성을 가지고 움직인다. 심지어 살리답이 죽었을 때 느껴지던 그 섬뜩한 기운의 움직임······.
만약 상상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이 싸움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그리하여 죽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이 싸움은 힘들어진다.
고작 말싸움 정도로 낭비하기에는 그 시간의 가치가 너무 귀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내가 손해를 보는 장사 같은데······.”
굴불신마가 투덜거리며 한 걸음을 성큼 걸어 나갔다.
“급한 상황이니 어쩔 수 없겠지. 어서 움직여라.”
굴불신마의 발끝이 아수라가 쥐고 있던 창대를 걷어찼다. 그들의 의도를 눈치 챈 아수라가 서둘러 운호 쪽으로 달라 붙으려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분명 아수라는 일반적인 초절정 이상의 힘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래, 마치 화산에서 신과 같은 힘을 휘두르던 청무 진인과 같았다.
하지만 굴불신마의 무공은 단순히 힘의 크기로만 논할 수 있는 경지를 슬쩍 넘어서 있었으니 필생의 적수였던 활불과의 싸움에 대비했으나 결국 사용되지 못한 무공들이 이 먼 남쪽 땅. 십만 대산에서 아수라라는 상대에게 펼쳐졌다.
-이제 어쩔 생각이냐.
파검이 물었다.
그는 지금 이 돌아가는 상황을 모두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감각에 걸리는 것은 그저 악의로 가득한 무거운 마기뿐이었다. 그 흐름이 어디서 시작하여 어디로 흘러가는지를 느끼기에 그의 수준은 너무 낮았으며 그가 갇혀 있는 검은 너무 좁았다.
“모든 일을 해결해봐야죠.”
한 순간 운호의 시야가 넓어졌다.
요령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건곤검의 이치와는 정 반대로 또렷하지 않더라도 그저 크고 넓게 보기 위해 감각을 퍼트렸다.
운호의 시야 속.
십만대산을 흐르는 거대한 기운이 모여드는 중심핵은 가까웠다.
그리고 그 중심핵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기 가운데 가장 찐득하며 음습한 기운이 일차적으로 향하는 곳은 바로 저 아수라. 그리고 아수라를 관통하는 마기는 그의 몸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다시 어딘가로 흘러갔다.
넓어진 시야만큼 그 감각은 또렷하지 못했다.
흐름의 방향은 알겠으나 그것이 종국적으로 어디에 도착하는지는 알기 어려웠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그 종착지에서 기다리는 것은 이준형의 몸을 차지한 대제사장일 것이라는 점이었다.
그렇기에 주어진 양자택일의 선택지.
힘의 근원을 찾아갈 것인가.
아니면 그 힘의 종착지를 찾아갈 것인가.
두 가지 모두 장단점이 존재했다.
진법의 중심핵으로 추측되는 힘의 근원은 가까이에 있다. 그곳으로 찾아가 그것을 박살 낸다면 지금 상황을 단번에 호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렇게 했을 때 어딘가에 숨어 있는 마교의 대제사장이 세의 불리함을 깨닫고 숨어버린다면? 과연 찾을 수 있을까?
결국 이 원정의 성패는 마교의 마인들을 얼마나 많이 잡아 죽이느냐가 아니다.
서장에서의 싸움이 활불의 생사와 그 환생에 달렸던 것처럼 이 싸움의 성패역시 역시 영원을 살아가는 마교의 대주교를 잡아 죽일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렸다.
하지만 그 사이에 죽어갈 수많은 사람들은?
그리고 일단은 이 기이한 현상 자체를 막는 것이 우선이 아닐까?
쉽지 않은 선택.
-쓸데없이 무슨 고민을 하고 있는 게냐!!
그 짧은 고민의 시간 속에서 굴불신마의 목소리가 운호의 머리를 때렸다.
-무릇 병마는 뿌리부터 잡아야 하는 법이다. 발본색원의 기회가 바로 눈앞에 있거늘 무엇을 망설이는 게냐!! 그저 잠깐의 시간이다. 이것을 박살 내는 것은 네가 그것을 찾아낸 이후로 해도 늦지 않을 터. 가라!! 여기서 해야 할 일은 내가 다 처리 할 테니.
검은빛의 마기와 어둠 그 자체가 충돌했다.
굴불신마의 굳건한 두 손이 어둠 그 자체를 찢어발기며 앞으로 나아갔다.
운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굴불신마의 말이 옳았다. 이 모든 싸움은 결국 마교의 대제사장을 처단하기 위해서다. 그를 놓친다면 이 모든 희생이 다 의미 없는 일이 되는 꼴이다.
부운약표(浮雲躍飄).
아니, 그것은 이전에 운호가 사용하던 부운약표와는 달랐다. 지난 몇 달. 화산의 서고를 모조리 독파한 운호의 경공은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성숙하였으니 그 움직임은 단순히 떠다니는 구름이나 소용돌이를 넘어 구름과 바람을 타고 나는 용과 같았다.
순식간에 운호의 몸이 하나의 점이 되어 사라졌다.
“젠장······. 좀 도와주고 갈 것이지.”
그렇게 사라지는 운호의 뒤통수를 향하여 혁리광이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앓는 소리를 내뱉었다.
물론 그들의 싸움에서 아수라가 빠진 것만으로도 매우 큰 도움이 되긴 했다. 하지만 기나긴 싸움이 이어지는 동안 그들은 다치고 지쳤으나 구곡황하진의 도움을 받는 마인들의 기세는 오히려 점점 더 흉험해져 갔으니 핏빛으로 물든 거인인 도륜의 기세는 한층 더 흉험하여 이제는 모용 준경조차 그 공격을 함부로 받아내기 힘들었다.
어려운 싸움이 이어졌다.
기운의 흐름을 따라 움직였다.
한 번의 호흡에 운호의 몸이 미끄러지듯이 쭉쭉 뻗어나간다.
다가가만 다가갈수록 마기의 농도가 진해졌다. 이제는 단순히 허공을 떠도는 기운이 아닌 그야말로 눈에 보이는 마기가 진득한 안개처럼 펄쳐졌다.
그리고 그 안개의 가장 깊은 끄트머리.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검붉은 빛으로 약동하는 하나의 동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모든 일의 시발점이자 모든 싸움의 종착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