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파 역대급 천재-283화 (283/288)

283화

결착(17)

살리답이 바닥을 굴렀다.

양갈래로 잘 땋아두었던 변발은 이미 싸움의 여파로 풀려 흩날린 지 오래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운호를 상대로 잘 버티고 있었다.

“아수라!!!”

그 외침은 재촉이었다.

하지만 재촉에도 불구하고 저쪽의 싸움 역시 쉽게 끝나지 않았다.

빌어먹을.

오만이었다.

태조 홍무제가 사망한 이후 감히 그에게 비견될 고수가 누가 있으랴 과신했다. 천무십칠성의 수좌로 꼽히는 강호의 무신 역시 그에게는 백초지적에 불과했으며 북병을 지휘하는 팽야천 역시 부하들과의 합격진이 아니면 감히 그를 상대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물론 그런 그에게도 마교의 대주교는 무서운 존재였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당대의 대주교에 한했다. 서장의 활불이 4대에서 5대로 넘어가면서 머저리가 된 것처럼 대주교 역시 환신으로 갈아탄 몸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 막 갈아타 적응이 덜 된 몸뚱이로는 감히 그를 상대할 수 없으리라 확신했다. 심지어 무림맹이라는 적들을 앞에 둔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를 적대하지 못할 터였다.

하지만 여기서 이런 대적을 만날 줄이야.

막대한 영약들과 백년이 넘는 세월로 쌓아 올린 진기는 여전히 마르지 않고 도도하게 흘렀다. 하지만 그 진기를 활용해야 할 늙은 뼈마디는 시큰했으니 그를 상대하는 운호의 움직임이 처음과 크게 다르지 않은 데 반하여 그의 움직임은 점차 그 활기를 잃어갔다.

-쾅!!

모용준경이 양손으로 도륜의 공격을 막아냈다. 청동빛이 돌던 그의 피부가 순간 인간의 살색으로 돌아왔다.

한계였다.

혁리광의 몸 역시 붉은 실선이 그득했다. 이제는 몸을 보호하는 기본적인 호신기 마저 모조리 공격에 돌리지 않고는 상대를 위협할 수 없다는 증거였다.

혈안의 검귀. 종자명의 검은 한층 더 빨라졌고, 한층 더 날카로워졌다.

그의 몸에 끓어오르는 천살의 기운이 검을 넘어 몸의 외부로까지 분출되었으니 그것은 활불을 상대하던 당시 분노에 몸을 맡겼던 그 상태와 흡사했다.

다만 달랐던 점은 당시의 그가 단순히 천살의 기운과 분노에 몸을 맡긴 힘이 쎈 야수와 같았다면 지금의 그는 그러한 힘을 휘두르는 한 사람의 검객이라는 점이었다.

그리고 종화.

운호도, 살리답도 아수라를 비롯한 저들의 싸움이 그리 오래가지 못하리라 예상했었다. 하지만 그 예상을 깨고 그 싸움이 살리답이 바닥을 뒹굴만큼 오래갈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합이 생각보다 훌륭했다는 점. 그리고 아수라와 도륜의 합이 생각 이상으로 처참했다는 점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컸던 것은 역시 이 어린 여자애의 힘이었다.

그녀의 검이 태을의 이치를 따라 흘렀다.

처음에는 그저 적들의 쏟아지는 공격을 막아내는 단단한 방패의 역할일 뿐이었다. 아수라가 휘두르는 저 어둠은 일반적인 기운들과는 사뭇 달라 인세에 내려온 하늘의 별빛인 강기조차 삼켜버리는 지독함을 품고 있었다. 그리하여 화석신공을 대성하여 초절정의 경지에 이른 모용준경조차도 감히 그 공격을 정면으로 받아내기 힘들었으니 그것을 받아낼 수 있는 것은 오직 종화의 태을뿐이었다.

아수라가 휘두른 거대한 힘의 덩어리가 그들을 덮쳤다.

그리고 그 막대한 파괴력이 종화의 검 아래 태초의 진기인 태을로 환원됐다.

살색으로 돌아온 모용준경의 피부가 다시금 청동빛으로 달아올랐다.

혁리광의 메마른 기해혈이 한순간 촉촉해졌다.

초절정 고수인 그들도 구곡황하진 속에서 오랜 싸움을 거듭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종화의 검이 모든 기운을 태을로 환원하는 그 순간만큼은 구곡황하진이 만들어내는 악의 어린 마기의 집합조차도 그 공간을 침투하지 못하였다.

아수라의 시선이 힐끔 살리답을 향했다.

대기를 타고 흐르는 마기의 흐름이 그의 눈에 보인다.

얼마나 더 큰 힘이 필요할까.

살리답은 무림사를 통틀어도 손에 꼽을만한 고수였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그는 인류의 역사를 통틀어 유일하게 세계제국을 자처할만한 대제국이 사력을 다하여 만들어낸 최후의 보루다. 하지만 그런 그가 지금 개처럼 바닥을 기고 있었다.

백운의 몸을 사용하던 대제사장이라면 저것을 제압할 수 있을까?

아수라가 자신들을 구성하는 수많은 기억들을 헤집어봤다.

지금 그가 사용하는 육체의 기반인 증무 진인 목운평은 모든 도전자들 가운데서 손에 꼽을만큼 강력한 존재였다.

그는 중원의 오악인 화산을 그대로 옮겨둔 것 같은 검술로 대제사장을 몰아붙였고 그를 거의 빈사 직전까지 밀어 넣었다. 대제사장이 자신의 다음 몸으로 화산의 제자를 선택한 것은 우연이 아닌 필연이었다.

다만 그의 약점이 있었다면 그것은 그가 너무나도 화산을 닮은 남자였다는 점이다.

화산여립(華山如立)이라. 그저 홀로 꼿꼿하게 선 화산과 같은 그 사내는 결국 그렇게 홀로 스러졌다.

하지만 저 아이는 조금 달랐다.

그가 그리는 화산은 목운평이 그려내는 화산과 달랐으니 그것은 일견 유약해 보일 수 있었으나 강함 속에 부드러움을 품고 있어 더욱 치명적이었다.

더 강한 힘이 필요할 것이다.

안 그래도 짧은 인간의 수명을 한순간에 휘발시켜 버텨내야 할 만큼 강력한 힘이.

먼 옛날 감히 부처에게 덤볐다는 진짜 천마.

마라 파피야스에 비견될만한 그런 힘이!!

-우우웅

그리고 그 순간 십만 대산의 대지가 크게 진동했다.

구곡황하진의 중심핵이 소화하기 힘든 힘의 격류에 비명을 내지른다.

터무니없이 막대한 백과 육.

적어도 수천, 아니 어쩌면 수만의 운명을 결정지었던 업이 방금 십만 대산의 대지 위에 쓰러졌다.

***

은검귀조 박진문이 자신의 인생을 반추했다.

주마등이라고 했던가?

그래, 죽음의 순간이란 이러하구나.

참으로 많은 사연이 있었다.

망국의 후손이었고 새로운 제국의 내관이었으며 모시던 이가 자결을 택했고, 그리하여 그 목숨을 수만 개의 목숨으로 되갚아주었다.

그 날 이후의 모든 것은 박진문에게는 그저 여분의 삶에 불과하였으니 어쩌면 여기서 이렇게 죽어 나자빠지는 것도 크게 나쁜 일은 아니리라.

한 자루 대도가 박진문의 몸을 사선으로 갈랐다.

-퍼억

불쾌한 파육음.

고작 가장 정교한 가짜 수염을 하나 받고 이 먼 곳까지 온 내관이 자신의 몸을 가른 적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래, 이렇게 죽어 나자빠지는 것도 크게 나쁜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지금껏 살아온 그의 삶은 은이 있으면 두 배의 은으로 되갚았으며, 원이 있다면 열 배의 원으로 되갚아주는 것이었다.

죽음의 순간.

목숨이라는 원한은 오직 목숨만으로 갚을 수 있었으니 박진문은 마지막 순간 자신의 몸을 가른 대도의 주인을 양팔로 움켜쥐었다. 그리고 그것이 그가 지상에서 행한 마지막 일이었다.

원제국의 부마국이던 고려국은 원제국의 패망 이후 멸망하였다.

그러한 고려국의 후예를 자처하던 그가 원제국 잔당의 손에 목숨을 다하였으니 그 또한 우습다면 우스운 운명이었다.

조왕 주고수가 크게 소리쳤다.

“박 태감!!”

신검을 쥔 명제국 황실의 후손이 크게 검을 휘둘러 자신을 위협하는 이를 떼어놓았다. 신검이 백열했다. 크게 펄쩍 뛰어오른 주고수가 박진문의 식어가는 몸까지 도착하는 것은 그야말로 한순간이었다.

북원의 달자는 전신으로 힘을 내뿜어 자신의 몸을 속박하는 시체를 떨쳐냈다.

고려에서 태어나 원제국에 왔으며 명제국 밑에서 내관이 되었고 고국의 멸망을 지켜보았던 사내는 그렇게 제대로 된 시체조차 남기지 못한 채 한 줌 육편이 되어 스러졌다.

백열하는 무형의 강기가 더없이 밝은 빛을 뿜어냈다.

악의로 가득한 마기들이 그 강기 앞에 덧없이 스러졌다.

살리답의 제자.

양갈래로 변발을 딴 북원의 달자가 화들짝 놀라 다시 한 번 크게 기운을 떨쳐냈지만, 무형의 검강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눈을 부릅뜬 머리통이 허공을 날았다.

“전하, 도망칩시다.”

어느새 다가온 혹참가포 조충이 주고수의 팔을 잡아끌었다.

북원의 달자 놈들도 달자 놈들이지만 마인들의 공세 역시 거셌다. 추행진과 같았던 형상은 이미 끊어져 망망대해에 홀로 떠있는 섬과 같이 고립되었으니 사실 물러서는 것도 이제는 쉽지 않은 형국이다.

조왕 주고수가 흩어져 떨어져있던 박진문의 뼈조각 하나를 움켜쥐었다.

“그래, 일단 물러나자.”

건곤의 이치에 따라 검을 펼쳐낼 때.

운호의 감각은 오직 그 검이 닿는 짧은 거리로 한정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막대한 기운의 흐름은 느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저 구곡황하진이 만들어내는 흐름이라 여겼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한순간에 몰려온 터무니 없이 거대한 기운의 흐름이 이것이 단순히 구곡황하진의 핵이 내뿜는 것이 아님을 알려주었다.

만약 조금의 여유가 있었더라면 시선을 돌려 상황을 자세히 살폈을 것이다.

하지만 살리답을 거의 극한까지 몰아붙인 지금. 그런 행동을 한다는 것은 그에게 살아날 구멍을 열어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살리답 역시 이 범상치 않은 기운의 흐름을 느꼈다. 분명 뭔가 문제가 될 것이라는 직감도 번뜩였다. 하지만 문제는 어디까지나 이후의 일이다. 일단 당장 눈 앞에 목숨이 오락가락 하는 상황에서 그딴 것을 신경 쓸 틈 따위는 없었다.

십만 대산의 가장 깊숙한 곳. 자욱한 마기의 원천이 있는 그곳에서 티샤 마이트레야가 또 한 번 크게 몸을 떨었다.

이대로라면 머지않았다.

그래, 분명 그러했다.

한 순간.

아수라가 고개를 돌렸다.

“어떻게!!”

한순간 그는 자신이 운용할 수 있는 가장 강대한 어둠의 힘을 크게 둘렀다.

그리고 그 강대한 어둠의 방벽을 칠흑과도 같은 빛이 휩쓸었다.

-콰과과과광!!!

흡사 천지가 개벽하는 것과 같은 굉음.

“쯧, 쉽지 않군.”

칠흑과도 같은 빛의 시발점에는 한 장년의 사내가 서 있었다.

악의로 가득한 마기의 흐름 속에서 시퍼렇게 타오르는 귀화와 같은 눈동자가 빛났다.

한 걸음.

삼십여 장의 거리가 고작 한 걸음에 좁혀졌다.

어둠을 몸에 두른 아수라가 자신의 의지 아래 있는 이 막대한 마기를 휘둘러 그의 몸을 후려쳤다.

“감히!!”

한 마디의 호통.

단단하게 뭉친 어둠이 한순간에 흩어지고, 오히려 그 악의 가득하던 마기는 어느새 완벽하게 정제되어 사내의 의지에 따라 아수라의 몸통을 후려갈겼다.

당연한 일이다.

그는 스스로 칭하기를 이 시대의 유일무이한 천마(天魔)였으며 그렇기에 천하의 모든 마(魔)의 근원이었으니, 어찌 감히 한낱 찌꺼기가 휘두르는 비루한 마기가 그의 몸을 범할 수 있으랴.

-쾅!!!

순식간에 아수라의 몸이 여덟 걸음을 밀려났다.

“네가 대체 어떻게 여기에!!”

아수라가 마기를 줄줄이 뿜어내며 그에게 덤벼들었다.

십만 대산은 그들의 안방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기에 이 모든 계획은 가장 적절한 순간에 이뤄졌다. 계산에 따르자면 이 자가 합류하는 것은 최소한 앞으로 하루 하고도 반나절이 지난 이후여야 했다.

“글쎄, 그건 아주 똘똘한 손녀를 둔 덕분이라고 해야겠지?”

굴불신마 영무결.

여기서부터 이틀거리에 있는 자신의 부하들을 모조리 내버려 둔 채 그가 이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