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2화
결착(16)
운호의 심검과 파검이 스쳐간 자리.
역천신에 달려 있는 신수 청랑의 갈기털이 흩날렸다.
이제는 혈통이 끊어져 더 이상 구할수도 없는 귀물이었으나 살리답은 그것을 아까워할 수 없었다.
“참으로 고절한 무공이로구나.”
-투두둑
살리답의 앞섶이 갈라져 그의 앙상한 갈비뼈가 드러났다.
그는 비장의 절초를 사용하였음에도 별다른 이득을 보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손해를 봤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적어도 백 초는 더 버틸 수 있겠구나.”
운호가 말 없이 손을 뻗어 파검을 다시 잡았다.
삼엄한 기세가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왔으나 늙은 무인은 위축되지 않았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넘겼던 수많은 죽음의 위기들과 별반 다를 것도 없었다.
인정했다.
저 젊다 못해 어린 놈은 자신보다 반수 정도 위다. 무공의 수준으로는 뒤지지 않겠으나 자신의 썩어 문드러져 가는 몸뚱이와 달리 그 몸은 탱탱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어디 그가 싸워온 상대가 항상 그보다 약한 상대였던가.
그저 버틸 때까지 버티다보면 무슨 수가 생기는 법이겠지.
바람에 날리는 옷깃조차 여미지 않은 채 창을 든 노인이 창 끝을 내밀었다.
-콰과광!!
그리고 마치 운호를 재촉하듯 저기서 마인들과 초절정 고수의 싸움이 이어졌다.
싸움의 최전방.
조왕 주고수의 검이 한번 번뜩일 때마다 핏물이 대지를 적셨다.
그리고 그 뒤를 받치고 있던 은검귀조 박진문과 혹참가포 조충이 시선을 교환했다.
그들은 전쟁을 경험해본 이들이었다.
젊었을 적에는 정난의 변에서 활약을 했었고 나이를 먹어서는 고비 사막을 넘어 북원 제국의 원정에 참전을 했었다.
무림인의 싸움에서 개인의 무력은 절대적이다. 사실 전쟁 역시도 소규모 접전이라면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거대한 집단전이 된다면? 물론 그런 상황에서도 초절정 고수는 절대적인 힘을 발휘한다. 하물며 셋이나 되는 초절정 고수가 모였다면 두려워할 것은 거의 없으리라.
하지만 그들이 보기에 지금 상황은 그 ‘거의’를 향해 점점 나아가고 있었다.
구곡황하진을 등에 업은 마교의 공세는 거셌다.
게다가 미친 마인들이 그렇듯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저돌적인 공세는 그것이 집단이 됐을 때 더 큰 효과를 발휘했다. 덕분에 무림맹의 군세는 점차적으로 뒤로 밀려나는 형국이었다.
딱 하나. 지금 조왕 주고수가 검을 휘두르는 이곳만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덕분에 처음에는 사선진에 가까웠던 진형이 어느새 주고수를 필두로 한 추행진의 형태로 변해버렸다. 물론 그것은 주고수가 나아간 것이 아니라 다른 무림맹의 무사들이 뒤로 밀려난 것이었다.
“전하!! 물러나야 합니다!!”
그 순간 조왕의 검이 번뜩였다.
지급의 마인일까?
처음으로 조왕의 검이 날카로운 발톱 모양의 쌍비조를 부러트리지 못했다.
“흐흐흐, 그건 곤란하지. 우리 애들을 이만큼이나 죽여놨으면 응당 그 값은 치르고 가야 하지 않겠어?”
쌍비조를 쥔 그의 뒤를 따라 같은 복장을 한 마인들이 서른 정도 따라 붙었다.
구곡황하진으로 마기가 배가 된 탓일까? 그들 하나하나의 기세가 범상치 않았다. 분명 지금까지 조왕의 검에 목숨을 잃던 어중이 떠중이들과는 다른 정예한 마인들이다.
“젠장······.”
마인들의 손에 쥔 물건을 확인한 박진문이 욕설을 내뱉었다.
익숙했다.
과거 전쟁 당시 아직 경지에 이르지 못한 박진문 역시 단체에 소속되어 저런 병기들을 들고 다녔으니까.
한순간.
조충과 박진문이 동시에 주고수의 양옆을 스쳐 앞으로 나아갔다.
지금까지 소극적으로 조왕을 지키던 것과는 다른 모습. 조왕 주고수만을 노리고 달려왔던 마인들이 크게 당황했다.
쇠로 만든 그물들이 펼쳐졌다.
철사를 엮어 만든 그물만 해도 충분히 흉험한 물건이거늘 저건 쇠사슬을 이중으로 해서 만든 그물이었다. 말 그대로 초절정 고수를 노린 기병이다.
박진문과 조충의 몸이 환상적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그 날아드는 그물을 향해 주고수가 검을 휘둘렀다.
터무니 없는 무게감.
하지만 세상에 베지 못하는 것이 없는 무형 검강은 두겹으로 된 쇠사슬마저 마치 종이짝처럼 찢어발기며 나아갔다. 그리하여 하나의 초절정 고수를 상정하고 만들어진 집단이 분쇄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전하, 뒤편의 아군이 끊어지기 전에 뒤로 물러나야 합니다. 지금은 너무 돌출되어 있습니다.”
“맞습니다. 사방이 포위되는 것은 곤란합니다.”
아직까지는 괜찮았다.
하지만 칼받이로 내몬 어중이떠중이 마인들만으로도 전선이 뒤로 밀린 현 상황에서 정예 집단이 하나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이상 언제까지 괜찮으리라 안심할 수 없었다.
지급의 마인조차도 무형의 검강을 받아내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천급의 마인이 나타난다면?
“오호, 조왕이라고? 이거 참 이런 구석진 곳에서 귀한 몸을 만나 뵙는구려.”
지금까지의 마인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
남방인 특유의 쌍커풀이 진한 부리부리한 눈과 거뭇한 피부 대신 작은 눈에 말간 피부. 무엇보다 특징적인 것은 바로 변발이었다.
“달단?”
“대원제국이다!!”
“발끈하는 것을 보니 달단의 달자 놈이 맞구나. 대체 달단의 달자 놈이 여긴 어떻게!!”
검왕 남궁벽이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물론 그런 상황에서도 그의 검은 쉼 없이 적들을 상대했으니 가히 그 품성과 상관없이 무공의 경지는 천인합일에 다다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가 크게 몸을 날려 벼락처럼 검을 내려치자 단단한 마인의 몸이 정확히 반으로 갈라졌다.
“할아버지!!”
“조심해라.”
마음에 들지 않는 자식놈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 손자놈이었다. 쓸데없는 학문은 익히겠다고 그러지를 않나, 결혼하겠노라 여자를 데리고 왔더니 그게 파검 놈의 손녀인데다가 심지어 파검 녀석의 무공까지 슬금슬금 익히고 있었다.
하지만 어찌 됐건 남궁 세가의 소가주로 장차 세가를 이끌어갈 후계자였으며 무림 맹주인 자신의 손자다. 이딴 곳에서 하찮은 마인 놈들 따위에게 죽으면 자신의 명성에 먹칠이 될 뿐이다.
무림맹의 전선이 뒤로 조금씩 밀려났지만 아직 죽는 이는 많지 않았다. 곳곳에서 분전하는 고수들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지금 미친 듯이 달려드는 마인들이 마교에서 제대로 마공을 수학한 녀석들이 아닌 저 기련산맥부터 십만대산까지 여기저기서 잡다한 마공을 익힌 놈들이기 때문이었다. 저 마인들은 중원의 무인들을 기준으로 보자면 본산이 아닌 속가의 제자들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젠장.’
차라리 신검이 여기 남아 있었더라면 얼마나 큰 도움이 됐을까.
어린놈이 공명심을 이기지 못하고 절진을 깨트리겠노라 단독 행동을 하는 바람에 상황이 매우 어려워졌다. 심지어 그를 따라 몇몇 초절정 고수가 빠진 것은 더 치명적이다.
과연 그 녀석이 진짜로 이 기괴한 진법을 깨트리러 간 것일까?
아니면 단순히 도망간 것일까.
그 지독한 번뇌 속에서 검왕이 검을 휘둘렀다.
“북쪽에서 올 병력은 아직입니까!!”
팔이 하나 잘려 나간 점창의 무사 하나가 소리쳤다.
그것은 어쩌면 비명에 가까운 외침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 외침에 대한 답을 듣지 못했다.
-꽈드득
마인이 휘두른 거대한 철퇴가 머리통을 날려버렸다. 그리하여 머리가 사라진 육체가 힘없이 철푸덕 바닥을 굴렀다.
“광조!!!”
남천관일 단상목이 창을 크게 휘둘러 자신에게 달려드는 마인들을 떨쳐냈다.
내기의 흐름이 원활하지 못했다. 강기를 한 번 사용할 때마다 뭉텅이로 사라지는 내공은 쉽게 보충되지 않았고 싸움이 끝나려면 얼마나 긴 시간이 걸릴지 예측할 수 없었다.
단상목의 창이 아끼던 제자를 죽인 마인의 심장을 노렸다.
비록 창에 별빛은 스며있지 않았으나 그 창을 쥔 이는 근 백 년 이내 점창이 배출한 최고의 창수로 꼽히는 단상목이었으니 그 속도는 실로 쾌속했다.
마인이 몸에 걸치고 있던 호심갑은 아무런 효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가슴의 철판이 그대로 우그러져 갈비뼈를 모조리 박살 내고 찢겨나간 철판이 심장을 파헤쳤다.
하지만 마인을 죽였다고 하여 죽은 제자가 살아 돌아오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남은 것은 부서진 두개골과 똥오줌이 흐르는 육체뿐.
단장의 고통 속에서 단상목은 쉬지 않았다. 그저 하나라도 많은 제자들의 목숨을 살리기 위하여.
서평왕부.
그리고 곤륜과 공동.
“조금만 더 버텨라!! 곧 지원군이 도착할 것이다.”
남천관일 단상목이 마지막으로 들은 바에 의하면 그들의 위치는 지금 이곳에서 이틀 거리였다.
어두운 토굴. 아니, 과연 그것을 토굴이라 부르는 것이 맞긴 한 걸까?
기괴한 살점과 핏물로 가득한 그 동굴은 축축하고 뜨거웠다.
그리고 그 토굴의 한복판에 그가 있었다.
광양지체를 타고 태어나 화산의 무학을 익혔으며 결국에는 마교의 수괴에게 몸을 빼앗긴 인간.
대기 중의 마기가 크게 약동했다.
한낱 인간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순수하고 거대한 마기가 그의 몸을 직격했다.
-커헉······.
넓고 단단한 그의 경맥이 요동을 친다.
이준형의 준수한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이곳이야 말로 모든 마공의 발현지이며 티샤 마이트레야가 최초로 샤카족의 성자에게 가르침을 받았던 곳이다.
스승이여.
그대가 말한 구원자의 이름 역시 마이트레야일진대 어찌하여 나는 구원자가 될 수 없단 말이요.
그 질문을 들었던 샤카족의 성자는 그에게 답을 내리지 않았다.
샤카족의 성자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깨달음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그의 사후 많은 제자들이 그의 가르침을 전파했다.
티샤 마이트레야는 스스로가 남을 가르칠 깜냥이 안된다 생각했다. 그렇기에 그저 평생 홀로 깨달음을 갈구하였다. 하지만 결국 그에게 남은 것은 늙고 병든 육체 뿐이었다.
잘못된 것은 대체 무엇인가.
그의 평생에 걸친 수련이 잘못된 것일까? 아니면 스승인 샤카족 성자의 가르침이 잘못된 것일까?
그 긴 고민 끝에 마침내 티샤 마이트레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스승은 틀릴 수 없는 존재였으며 그 가르침을 따랐던 자신 역시 틀리지 않았다.
허면 틀린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이 세상 그 자체였다.
이천 년 전. 세상을 떠돌아 늙고 병든 구루의 몸이 묻힌 땅 위로 수라와 나찰들의 육편이 산을 이루고 선혈이 시내를 만들었다.
드높은 천상에 위치한 영.
그리고 그 영과 공명하는 혼은 지상을 떠났다.
죽음이란 본디 그러한 법이니까.
육은 썩어 자연으로 돌아갈 것이며 백은 흩어져 다시 순환할 것이다.
지상의 법칙이란 본디 그러한 법이니까.
십만 대산이 다시 한번 약동했다.
수라와 나찰들의 육편이.
그들이 흘린 핏물이.
그들이 쌓아 올린 평생의 업이.
구루의 영이 머물었던 최초의 육체가 그 모든 것을 꾸역꾸역 흡수했다.
그리고 더럽고 혼탁하여 지상의 법칙을 흐트러트리는 검붉은 마기를 토해냈다.
-투둑, 투두둑
순수한 마기에 물든 이준형의 몸이 꿈틀거렸다.
평생에 걸쳐 사용돼야 할 선천의 진기가 그 육체를 강화했고 그 강화된 육체 속에 터무니없는 양의 마기가 차곡차곡 쌓여갔다.
하지만 아직이었다.
십만 대산에는 아직 많은 재료가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