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0화
결착(14)
남궁강은 그에게 부탁했다.
만약 그곳이 함정이 아니라면 서둘러 진의 핵을 부수고 돌아와 달라고.
그리고 만약 그곳이 함정이라면······.
‘그들이 적의 병력을 묶어놓는 동안 함정을 박살 내고 대제사장을 요격해다오.’
장기의 승리 조건은 반상의 기물을 다 잡는 것이 아니다.
초(楚), 그리고 한(漢).
각 진영의 왕을 잡는 것이야 말로 장기의 승리 조건이다. 그리고 이번 싸움 역시 그와 같았다.
결국 승패를 가르는 것은 마교의 대제사장. 어쩌면 저 기나긴 마교의 역사 그 자체인 괴물을 잡아내는가, 혹은 그러지 못하는가에 달렸다. 남은 마교도들은 그저 부수적인 것에 불과하다.
‘허면 본대는 정말 괜찮겠습니까?’
또한 본대의 안위를 걱정하는 운호에게 이런 말을 했다.
‘그들이라고 하여 어찌 천급의 마존을 찍어내겠느냐. 나는 결코 그들의 전력이 중원을 넘어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만약 그랬다면 이렇듯 기습적으로 우리를 치고 들어올 이유가 없다. 나는 지금 이것이야말로 그들이 짜낸 마지막 힘이라고 생각한다.’
스스로를 아수라라 칭하는 이의 마공을 보는 순간 운호는 알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자하기공의 근원 중 한 갈래로구나.
물론 자하기공이 완벽하게 만들어진 가장 세련된 무공이었다면 이 마인이 사용하는 마기의 덩어리는 실로 투박하기 짝이 없는 힘의 운용법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깨달을 수 있었다. 자하기공이 어디에서 시작하여 어디로 흘러가는지.
뭉글뭉글 피어오르는 보랏빛 서기가 운호의 검을 휘감았다.
자하기공의 칠단공.
일반적으로 강호에서 초절정으로 분류되는 경지다. 의식하고 펼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자연스러웠다. 약간의 깨달음. 양신(陽神)을 이룬 신체. 구곡황하진의 적대적인 기운. 그리고 그가 익힌 가장 효율적인 기공이 자하기공이라는 네 가지 요소가 절묘하게 균형을 이루었다.
아수라가 웃었다.
“클클클. 그것은 티샤 마이트레야가 나를 보고 흉내낸 무공 아니더냐!! 재밌구나. 재밌어. 감히 원본 앞에서 그딴 흉내를 내다니. 참으로 걸작이로다.”
“흉내인지는 받아보면 알 일이지.”
운호가 휘두른 검이 그가 움켜쥔 어둠을 빠르게 깎아 나갔다.
하지만 여전히 재료는 넘쳐난다. 구곡황하진이 끌어모으는 마기가 아수라에게 무한한 힘을 공급했다.
“존자가 힘을 모아온 시간은 이천 년. 그래, 무려 이천 년이다. 너는 그 세월의 아득함을 아느냐.”
“모른다. 하지만 그 아득한 세월이 모두 패배의 역사라는 것은 알겠구나.”
“큭큭큭, 그래. 그렇지. 실로 기나긴 패배의 역사지. 참으로 한심하지 않더냐? 그토록 오랜 시간을 오직 패배에 패배만을 거듭 하다니. 어지간한 멍청이라도 그쯤 되면 한 번은 이길 법도 한데 말이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운호의 보랏빛 검에서 천상의 향기가 흘러나왔다.
인세에는 존재할 수 없는 그 향은 악의로 가득한 구곡황하진의 마기를 뚫고 퍼져나갔다.
“그래, 바로 그것이다!! 그 기나긴 패배의 역사에 언제나 등장했던 힘!! 이 지상의 의의는 그저 빌어먹을 혼을 진동시켜 그 본질적인 영에 닿는 데에만 있다고 주장하는 그 힘!! 그 힘 앞에서 육과 백은 그저 거추장스러운 짐일 뿐이겠지. 바로 지금 여기서 너를 상대하고 있는 나처럼 말이다!!”
선명하게 보였다.
아수라가 휘두르는 저 거무튀튀한 악의들이.
“그러니 깨달은 자여 떠나거라. 저 드높은 천상으로. 어찌하여 너는 인세에 구속되느냐. 앞선 이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저 하늘에 올라라. 그것이 곧 순리다.”
누구보다 역천에 가까운 이가 순리를 논하다니. 참으로 재밌는 일이다. 하지만 운호는 굳이 말로써 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천상의 인력은 아수라의 말이 맞다는 듯 강하게 운호를 잡아끌었다.
“그래!! 바로 그거다!!”
그리고 그 속에서 운호가 몸을 바로 세웠다.
고작 이 정도 인력에 세상을 떠나기에는 그가 화산에 놓고 온 것이 너무 많았다.
검을 내리긋는다.
마치 화산과 같이.
그리하여 그 검이 닿는 영역이 모두 화산과 같았으니 그곳은 천상도 지상도 아닌 그저 운호만의 오롯한 공간이었다.
-몽원경?
하지만 파검의 의문은 오래가지 못했다.
운호의 검 앞에서 아수라가 포효했다.
“감히!! 너는 지금 내가 밟고 선 이 땅이 어디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하지만 그 포효와 달리 그는 더 이상 검을 손에 쥐지 않았다.
물론 아수라가 입고 있는 증무진인의 목운평의 육체에 가장 익숙한 것은 검술이었다. 하지만 그 몸속에 자리 잡은 수많은 찌꺼기들은 하나하나가 경지에 다다른 이들의 기억을 품고 있었으니, 무한한 어둠은 곧 무한한 공격으로 치환되어 운호에게 쏟아졌다.
하지만 그 무한한 공격은 고작 다섯 자 남짓한 운호의 공간을 침범하지 못했다.
운호가 그저 걸음을 옮겼다. 아수라의 표정이 점점 흉악해졌다. 그리하여 현기 넘치는 증무진인 목운평의 얼굴이 점점 흉신악살의 그것으로 변한다.
운호는 그것이 참으로 유감스러웠다. 이왕이면 그것이 껍데기뿐이더라도 증무진인 목운평의 검술을 펼쳐냈으면 좋았을 것을.
무엇보다 여덟 번째 검술.
아수라는 여전히 그것을 펼치지 않았다. 허면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그저 파검 좌부원이 천상에 닿았던 그 마지막 순간에 펼쳐낸 일 검처럼 지상의 법칙으로는 이룰 수 없는 무언가일까.
궁금했으나 굳이 그 궁금증을 아수라를 통해 풀려고 하지 않았다.
운호의 검이 아수라의 몸을 갈랐다.
아니, 정확히는 가를 뻔했다.
운호의 공격을 막아낸 그것은 기묘한 무늬가 새겨진 한 자루의 장창이었다. 하지만 창이 홀로 운호의 공격을 막아냈을리는 없다. 운호의 시선이 창을 움켜쥔 노인에게로 향했다.
-저자는!!
젊은 시절 북방에서 종군한 경험이 있기 때문일까?
파검이 한눈에 그를 알아봤다.
대체 나이를 얼마나 먹은 것일까?
초절정의 고수는 어느 정도 노화를 초월한다. 하지만 지금 이 창을 쥔 자는 그런 나이 조차 지나간 것 같았다. 본래는 강건했을 육체가 쪼그라들어 초라했다. 얼굴에 주름은 어찌나 많았는지 그 얼굴이 본래 어떤 모습이었을지 짐작조차 하기 힘들었다.
흉터로 가득한 육체는 근육이 사라져 바람 빠진 풍선과도 같았고 억지로 일으켜 세운 허리는 지금 당장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처럼 위태로웠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풍겨 나오는 기운은 제왕과도 같았으니 비록 처음보는 사람이었지만 운호는 그자가 누구인지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당신이 어떻게 여기에?”
“클클클, 순망치한이라. 이가 없으면 잇몸이 시린 법이지. 게다가 나에게 내주겠다는 떡고물도 보통 큰 것이 아니니 어쩔 수 있겠느냐.”
노인이 별것 아닌 듯 웃으며 창을 휘둘렀다.
“하지만 오늘 보니 이거 어쩌면 남는 장사는커녕 크게 믿지는 장사가 될 수도 있겠구나.”
“살리답!! 늙은이가 엉덩이가 참 무겁구나. 이토록 늦게 도착하다니. 하마터면 큰 일 날뻔하지 않았더냐.”
노인의 정체는 살리답.
저 북방으로 도망간 원제국의 마지막 기둥으로 굴불신마 영무결이 자신과 자웅을 겨룰만하다 거론했던 마지막 하나였다.
“쯧, 껍데기만 남은 찌꺼기 주제에 어디 감히 본좌와 말을 섞으려 드는 것이냐. 그리고 어디 늦은 것이 본좌의 잘못이더냐. 네놈들이 광서 대장군부를 제대로 관리 못 하는 바람에 쓸데없이 들러붙어서 떼어내느라 하지 않아도 되는 고생을 했다.”
“뭐라고? 광서 대장군부? 설마?”
“그래, 백기라고 했던가? 팽야천에 비하자면 참으로 하찮은 놈이더구나. 과연 네 녀석들이 중앙의 눈을 가리는 가림막으로 쓰기에 딱 적절한 수준이었다.”
“네 녀석 그걸 알면서도!!”
살리답은 저 북원의 일인자다.
한때 중원을 넘어 세계를 지배했던 대제국이 마지막 힘을 다해 만들어낸 최고의 고수로 그는 태조 홍무제의 원정을 세 차례나 막아냈으며 이후 성조 영락제의 원정은 단순한 방어를 넘어 장성까지 치고 내려오는 위력을 보여준 바가 있었다.
-북원의 달자가 대체 어떻게 이 먼 곳까지!! 북병은 모두 눈뜬장님이었단 말이더냐!!
“눈뜬장님까지는 아니고. 뭐 서로의 이득이 맞아떨어진다면 장성 이북의 사람과 장성 이남의 사람이 손을 잡지 못할 것도 없는 것 아니겠느냐. 이 마교 놈들과 우리 황실이 손을 잡은 것처럼 말이다.”
파검의 말을 알아듣는 살리답의 모습에 운호는 놀라지 않았다.
이미 공두베가 한 차례 파검의 말을 알아듣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있었다. 천하가 이토록 넓거늘 그와 같은 이가 또 있다 해서 놀랄 이유는 없었다. 만약 놀랄 부분이 있다면 달단의 수장이 중원 사람들과 손을 잡았다고 말하는 부분이었다.
운호가 검을 휘둘렀다.
“어이쿠!! 어린 녀석의 검 끝이 참으로 날카롭다.”
그저 –툭 –툭.
살리답의 창이 운호의 검을 가로막았다.
적어도 검이 닿는 범위 이내에서 운호는 전지하였다. 그렇기에 살리답의 공격을 모조리 파훼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살리답 역시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운호를 어떻게 하겠다는 마음을 먹지 않았다. 지극히 공격적이었으나 그 목적은 수비에 있었다. 운호는 그것을 인지하였으나 그만한 고수가 작정하고 방어에 몰입한 것을 뚫어내기란 아무리 운호라고 해도 쉽지 않았다.
또한 그가 들고 있던 기묘한 무늬의 창.
“역천신(瀝泉神).”
인류의 역사 이래 최초로 세계제국이라는 칭호에 다가갔던 원제국이다.
고작 중화를 통일한 명제국 조차도 신검을 보유했거늘 어찌 그들에게 신병이 없었을까.
살리답이 휘두르는 창의 무늬가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그것은 마치 한 마리의 용과 같았다.
-악가창?
“보는 눈이 제법이로구나. 이미 그 원형을 찾아보기 힘들 만큼 나에게 녹아들었다 생각했거늘.”
놀랍게도 살리답이 사용하는 창술은 남송의 마지막 명장 악비의 가전 창법인 악가창이었다. 사실 크게 이상한 일도 아니다. 원제국은 중원을 이백년 넘게 지배했다. 헌데 그가 중원의 무공을 기초로 한 것이 무엇이 이상할까.
곁에서 숨을 고른 아수라가 찐득한 마기를 불러 모았다.
하지만
-부웅!!!
살리답의 창이 아수라와 자신 사이에 하나의 선을 그었다.
“정신 사납다. 쓸데없이 끼어들 생각하지 말고 저기 가서 다른 이들이나 도와라.”
“이 늙은이가?”
“뭐, 아니면 그냥 그렇게 서서 구경만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구나. 어차피 시간만 조금 끌면 모든 것이 해결 될 테니.”
그 순간 운호는 자신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을 깨달았다.
“병력을 끌고 내려온 것인가?”
“쯧, 아이야. 무공에 비해 눈치가 참으로 느리구나. 당연하지 않겠느냐. 내가 이 마교 놈들을 어찌 믿고 홀로 이 땅에 내려올까.”
남궁강을 비롯한 무림맹의 본대가 위험했다.
남궁강은 대제사장과 미지의 고수를 제외한다면 마교의 전력은 무림맹의 토벌대에 크게 미치지 못한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마교라고 어찌 그 사실을 모르겠는가.
“어떠냐. 이제 똥쭐이 좀 타는게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