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9화
결착(13)
-콰과과과광!!!
막대한 충격파가 주변을 휩쓸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공방은 멈추지 않았다. 똑같이 닮은 두 개의 검법이 펼쳐졌다. 아니, 달랐다. 그 방향은 같았지만, 그 형식이 달랐다.
또한 운호의 검이 사람의 마음을 품고 있었다면 그의 검은 그저 지독하게 압축된 마기만을 품고 있었다.
운호의 검에 건곤의 이치가 섞였다.
그 검이 닿는 모든 곳에서 전지(全知)하니 그것은 곧 전능이다.
가면을 뒤집어 쓴 마인이 광소했다.
“그래!! 그래야지!! 그만한 재능이라면 응당 여기까지 닿아야지!!”
어둠을 품은 검이 무한을 가득 품고 움직였다.
무형검이었다.
그리고 운호의 이해가 그 무한에 닿았다. 아니, 엄밀하게 말해 그것은 무한이 아니었다. 그저 무한 하고자 하는 한없이 많은 가능성을 품은 유한이었으니 전지에 닿은 운호의 오성은 그 모든 가능성들을 거세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재밌구나. 참으로 재밌어. 통천(通天)의 성취가 벌써 그러하다니. 하지만 무형이 무한이 아니라면 통천검 역시 천리의 완전한 이해가 아니니 그것 역시 완전치 않다!!”
가면인의 검이 부드러운 호를 그렸다.
완전한 이해와 완전한 이해가 부딪혔다. 운호는 상대를 이해했고, 상대 역시 운호를 이해했다. 그리고 그 이해 속에서 운호는 선택했다.
“파검!!”
-그래, 기다렸다!!
악의로 가득한 거대한 마기의 흐름조차 신검의 의지를 거스를 수 없었다.
어마어마한 흡입력.
주변에 가득하던 마기가 운호의 검에 압축됐다.
-콰과과과과광!!!
마인이 크게 튕겨 나갔다.
세 걸음 뒤로 물러난 운호가 울혈을 뱉어냈다. 양신에 이르른 그의 몸은 단지 그것만으로 막대한 마기를 사역한 부작용을 완벽하게 해소했다.
가면인이 기괴한 자세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군데군데 뚫린 옷 사이로 검은 색의 연기가 흘러나왔다.
“신검!! 그래, 신검이 있었지.”
또한, 그의 가면에도 얇은 실금이 생겨났다. 그리고 그 실금은 점점 범위를 넓혀 마침내 그 갈라진 가면 사이로 반쪽의 얼굴이 드러났다.
“게다가 과연 존자에게 듣던 대로 너의 검은 우리의 검과는 또 다르구나.”
익숙한 얼굴이었다.
그 얼굴은 다름 아닌 증무진인 천중일검 목운평.
운호가 사용하는 모든 검술의 근원이자 그의 실질적인 스승으로 아주 오랜 기간 매일을 함께 했던 얼굴이었다.
물론 엄밀히 따지자면 완전히 똑같지는 않았다. 몽원경에서 만나던 그 젊고 잘생긴 얼굴에서 수십 년은 더 삭은 얼굴이었다.
운호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이미 공방을 통해 어느 정도 예측하던 일이었다.
“역시 너는. 아니, 너희는 영혼이 없는 찌꺼기들이로구나.”
“찌꺼기라니 말이 심하구나. 이래 봬도 네가 쓰는 모든 무공이 다 이 몸에서 나왔거늘. 굳이 이 몸을 부르고 싶다면 아수라라고 부르도록 해라.”
“그렇다고 하기에는 그 무공이 너무 비루하구나.”
운호의 가벼운 도발.
스스로를 아수라라고 칭한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확실히 비루하긴 하지. 기껏해야 흉내내기에 불과하니까. 뭐, 어쩌겠나. 저 높은 곳에 영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것을 잡아 끌어줄 혼도 없고. 그러니 영혼의 공명 따윈 일어나지도 않지. 기껏해야 비대하게 쌓아 올린 진기로 그 흉내나 내는 신세인 것을. 하지만······. 그 흉내나 내는 비루한 무공으로도 목적을 이루기에는 충분할 것 같구나.”
대체 언제부터였을까?
악의로 가득한 마기 사이에 감춰져 있던 거대한 마기들이 폭발했다.
“신검. 오늘 여기서 너를 묻어 할아버지의 원한을 갚아주겠다.”
광비검 병조량.
무한에서 무신 모용경과 자웅을 겨뤘던 핏빛의 거한 도륜.
“이크크, 네 녀석이 바로 이 시대의 대적자로구나.”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경박한 노인까지.
무려 세 명의 천마급 마인이 운호에게 덤벼들었다.
-맙소사!!
파검이 당혹감을 드러냈다.
분명 마교의 전력은 무림맹에 비해 크게 부족했다. 그리고 그 부족함을 메워주는 것이 이 구곡황하진이다. 하지만 아무리 천고의 절진이라고 해도 엄연히 한계는 존재한다. 극광오신급의 고수 하나와 천마 셋. 이만한 고수들이 빠져나갔다면 어찌 무림맹의 주력을 상대로 승리를 자신할 수 있을까.
운호의 검이 그들의 공격을 받아냈다.
지난 몇 달.
운호는 여러 초절정 고수의 합공을 꾸준히 경험했다. 물론 그 가운데는 지금 저 아수라와 같은 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쫄래쫄래 영웅이라도 된 것처럼 홀로 나서는 꼴이라니. 그깟 무림맹의 버러지들이 얼마나 중요할까. 신검!! 결국 주의해야 할 것은 대적자인 너뿐이다.”
또한 지금 새롭게 합류한 천마급 마인 셋의 무공 역시 범상치 않았다.
구곡황하진이 펼쳐졌을 때, 검황은 자신의 발휘할 수 있는 기량이 칠할에 불과하다고 이야기했었다. 이처럼 구곡황하진의 아래에서는 초절정 고수조차 자유롭지 못하다. 그리고 그 말은 곧 천마들 역시 구곡황하진의 영향을 받는다는 의미였다.
우뚝 선 화산의 봉우리 앞에서
세 명의 마인이 각자 자신의 절기를 뽐냈다.
그리고 그 가운데 특히 발군은 흐리멍텅한 눈을 한 거인 도륜이었다.
과거 무신 모용경은 도륜을 향해 무(武)를 모른다고 평가했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니, 오히려 그때보다 더 했다. 원초적이며 직선적인 폭력. 하지만 극에 달한 폭력은 그것 자체로 하나의 무(武)였으니 아마 지금 다시 모용경이 도륜을 본다면······.
“주먹질이 참으로 무식하구나.”
어디선가 나타난 청동의 거인이 싸움에 끼어들었다.
모용준경.
무신의 무학을 이어받은 모용세가의 젊은 초절정 고수였다.
도륜의 흐리멍텅한 시선은 모용경을 향하지 않았다. 어지간한 집 기둥만큼 두꺼운 다리가 뻗어 나왔다. 모용준경이 허리를 움직여 그 발차기를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앞서 그의 공격을 막아낸 양팔이 찌르르 아려왔다.
하지만 괜찮았다.
현천장(玄天掌)
바늘이 가는데 실이 빠질 수는 없는 법.
어느새 따라붙은 혁리광이 도륜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핏빛의 거체에 선명한 손바닥 자국이 새겨졌다. 하지만 공격을 성공시킨 혁리광 역시 자신의 몸을 타고 올라오는 반탄진기에 서너걸음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완성된 금강불괴.
아니, 일반적으로 강호에서 말하는 금강불괴의 기준조차 넘어선 완전한 육체.
그것은 5대 활불이 보여줬던 바즈라파니에 근접한 육체였다.
운호는 모용준경과 혁리광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애당초 약속된 일이었다.
어떻게 보자면 오히려 조금 늦은 감이 있었다.
분명 운호가 진법의 핵을 박살 내겠다고 떠나기 전.
남궁강은 그를 붙잡았다.
“함정이다.”
“알고 있습니다.”
“아니, 단순히 구곡황하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상대는 너의 무공을 안다. 그리고 이번 원정에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너와 서평왕. 그리고 다른 초절정 고수들을 마교의 대제사장 앞까지 무사히 데려가야 하는 방패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최고의 창을 방패 뒤에 숨겨 둘 수도 없는 노릇. 적들이 노리는 건 바로 그 지점이다.”
“하지만 정말 그들이 노리는 건 그 방패를 부수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라도 괜찮다. 만약 그렇다면은······.”
운호의 검이 가볍게 광비검 병조량의 검강을 걷어냈다.
그 가벼운 움직임에도 실로 막대한 힘이 실려 있어 병조량은 그것을 해소하기 위해 연거푸 몇 걸음을 물러나야 했다.
그리고 그 사이로 한 자루의 거검이 내려 앉았다.
“미안, 사조님들을 설득하느라 조금 늦었어.”
이번 토벌전에 참석한 종남의 유일한 초절정 고수인 종화였다.
“비켜라!! 계집!!”
종화의 검이 태을의 법칙대로 움직였다.
선명한 적의를 품고 사납게 날뛰는 마기조차 그 앞에서는 한 줌 모래처럼 흩어졌다. 하지만 천급의 대마두인 병조량이 휘두르는 마기의 양은 상상을 초월했으니 그 막대한 힘의 격류 앞에서 종남의 검은 실로 작았다.
구곡황하진은 분명 마기를 제외한 모든 기운을 억제한다. 그 크기는 초절정의 고수조차 억제할 만큼 거대하다. 적어도 이 진법 아래라면 한 명의 천급 마인은 두 명의 초절정 고수를 상대할만하다.
그래, 분명 그랬다.
그렇기에 번뜩이는 핏빛의 검날 앞에서 경박한 노인도 감히 입을 놀리지 못했다.
혈안의 검마는 시각을 제외한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그의 신경망을 대신 하는 것은 천살의 기운이었다. 그리고 구곡황하진은 그 천살의 기운을 크게 증가시켰다. 아니, 그것은 단순히 증가라고 표현할 수 있는 수준을 아득히 넘어섰다. 굳이 표현하자면 그것은 폭주에 가까웠다.
핏빛의 강기가 전신에서 발출됐다.
호신 강기와는 달랐다. 그 사납고 날카로운 기운을 어찌 호신강기라고 할 수 있을까.
“왜 나만!!”
그리하여 경박한 노인은 연달아 손을 흔들어 종자명의 공격을 막아내면서도 억울함을 호소했다.
“장인어른 정말 괜찮을까요?”
그의 사위는 삼국지 연의를 읽고 자라났다. 그 책에 나오는 제갈량은 실로 신산귀계의 달인이라 그가 내미는 기책은 내는 족족 다 맞아 떨어졌다. 현실의 인물이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남궁강은 실제 역사의 제갈량과 연의의 제갈량 가운데 누가 더 대단한 인물이었는지를 가려본다면 실제 역사의 제갈량이라고 생각했다.
이미 역사가 증명하고 있었다.
결국 백가쟁명에서 승리한 것은 치국의 도(道)다.
삼국지연의에서 가장 웅장한 싸움은 적벽의 대전이며 모든 것이 끝나는 부분은 오장원이다. 하지만 실제 삼국 시대의 종말을 알린 것은 관도의 대전이었으며 그 이후의 모든 것은 그저 덤일 뿐이다.
전투를 기책으로 커다란 유불리를 뒤집는 것은 어렵지만 가능하다.
하지만 전쟁은 상대가 완전히 바보가 아니라면 그럴 수 없다.
기책이란 결국 부족한 자의 잔꾀에 불과하다. 손무도 말하지 않았던가 열 배면 포위하고 다섯 배면 공격하고 두 배면 분리시켜 차례로 공격하라고(十則圍之, 五則攻之, 倍則分之).
아군의 전력이 적의 두 배에 달한다.
구곡황하진은 여기에 피해를 줄 수 있을진 모르겠으나 그것이 적을 승리로 이끌 수는 없다. 그렇다면 적들이 이 구곡황하진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것은 무엇일까?
답은 간단했다.
대제사장을 상대할 수 있는 핵심 전력의 소멸.
스스로를 아수라라고 칭한 그가 웃었다.
“큭큭큭, 아무래도 이번에는 하늘의 뜻이 단단히 작정한 것 같구나. 어쩌면 이렇게 하는 일마다 엉망이 되버릴까.”
운호가 그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이 자리를 정리하고 저 핵을 박살 낸다. 그리고 나아가 마교의 대제사장을 처단한다.
막대한 마기가 아수라의 손끝을 따라 흘렀다.
하지만 거듭 부딪히다 보니 무언가 알 것 같았다.
자하기공을 대성하여 올라선 초절정과 스스로의 마음을 단련하여 올라선 초절정의 차이가 무엇인지.
진기와 마음.
그 가운데 무엇이 더 단단한지를.
그리하여 운호의 몸을 타고 자하기공의 보랏빛 서기가 퍼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