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8화
결착(12)
“우회하도록 하겠습니다.”
남궁강이 입 밖으로 말을 뱉는 그 순간.
!?
운호는 이해할 수 없는 거대한 기의 흐름을 느꼈다.
십만대산에 흐르는 거대한 마기. 지금까지 그것은 중원의 오악에 흐르는 영기와 그 성질이 다를 뿐, 의지 없이 그저 존재하는 기운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땅을 타고 흐르는 거대한 대지의 기운이 뒤틀렸고 그 커다란 뒤틀림에 따라 천기가 요동쳤다. 그리고 그 순간 하늘과 땅이 그리고 그것을 따라 흐르는 기운이 의지를 갖는다.
악의(惡意)
그래, 그것은 명백한 악의였다.
천지가 검은 빛으로 물들었다.
단순한 공기의 움직임일까? 아니면 그 지독한 악의가 현세에 표출되는 것일까. 거대한 귀곡성이 사방을 울렸다.
화산의 무인은 어찌하여 화산에서 이점을 갖고 무당의 무인은 어찌하여 무당산에서 이점을 갖는가. 간단하다. 산의 영기에 익숙하고 그 내가기공 자체가 영산의 기운을 사용하는데 최적화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주변에 그저 존재하던 마기들은 날카로운 악의를 품은 채 이 자리에 모인 모든 무인들에게 쏟아졌다.
“이 무슨!!”
벽호진인이 가장 크게 놀랐다.
무당산에 있을 때와 정확하게 정반대의 느낌. 아니, 그것을 아득히 뛰어 넘는다. 마치 몸속을 움직이는 진기에 무거운 족쇄라도 채워진 것만 같았다.
벽호는 절정 가운데서도 최고 수준의 고수였다. 하지만 이런 환경이라면 낼 수 있는 힘의 크기는 기껏해야 일류를 넘기 힘들다. 아니, 그 이하다. 이미 일흔이 넘은 나이. 나이를 먹어 실시간으로 약해지는 몸을 진기의 힘으로 조금씩 억제하고 있던 것이 급속도로 무너졌다.
이것은 구곡황하진(九曲黃河陣)!! 구곡황하진이다.
벽호진인의 시선이 남궁강에게 향했다. 어지간해선 표정이 잘 바뀌지 않는 그 사내의 이마에도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군사!! 타개책은?”
하지만 당황하여 아무 말도 못하는 벽호와 달리 남궁강은 이런 상황에서도 그것을 돌파할 방법을 강구했다.
이들 가운데서 유일하게 구곡황하진의 존재를 알고 있던 제갈첨이 고개를 저었다.
“묵변비록에는 거기까지는······. 다만 봉신방연의에 따르자면 구곡황하진에 들어간 십이선인들이 인간으로 격하되었으나 원시천존과 태상노군이 직접 강림하여 운소 세 자매를 잡아들였다고 합니다.”
말을 끝낸 제갈첨이 운호를 바라봤다.
전해지는 설화가 어찌 모두 진실일까. 하지만 구곡황하진이라는 것이 실제했다는 것이 밝혀진 지금. 어쩌면 그것을 타개할 방도 역시 이야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당시 신선의 경지에 이르른 십이선인이 모두 인간이 됐다고 했다.
그리고 그 이상의 경지였던 원시천존과 태상노군이 직접 강림하여 운소 세 자매를 벌했다고 했다.
초절정은 인간을 벗어난 경지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신선이나 다름없다. 허면 신선조차 인간으로 돌린다는 구곡황하진이 의미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런 십이선인 조차 뛰어넘는 원시천존과 태상노군이 의미하는 것은······.
운호의 주변이 검은 악의로 들끓었다.
하지만 그 들끓는 악의조차 감히 운호의 몸을 파고들지는 못했다.
완성된 양신(陽神).
그것은 도교에서 추구하는 궁극 중에 하나였다. 그야말로 몸 자체가 거대한 기운의 덩어리였으니 십만대산이 아무리 거대한 산맥인들 이미 완성된 소우주를 침범할 수는 없었다.
운호의 시선이 전방을 향했다.
보이지 않던 것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인.
숨어 있던 것이 모습을 드러낸 것일까? 아니다.
구곡황하진의 마기는 마교 토벌대의 인원들을 억제했다. 그리고 그것은 정확히 마인들에게는 정반대의 효과를 주었다. 운호의 기감은 앉은 자리에서 수백 리를 내다볼만큼 예민했지만 숨을 죽인 마인들은 물리적으로 그보다 먼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 기운이 크게 증폭된 마인들의 마기가 운호의 감각을 덮쳐왔다.
“마인들이 옵니다.”
“마인들이?”
남궁강을 비롯한 다른 모든 이들은 아직 그것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운호의 말을 의심하는 이는 없었다.
“거리는? 이대로 물러난다면 이 진법을 벗어날 수 있을까?”
“힘들 겁니다. 무공이 뛰어난 이라면 피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절반 이상. 차라리 맞붙는 게 나을 겁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제가 이 상황을 어떻게든 해결해보겠습니다.”
“해결?”
“진법이 펼쳐지는 순간 기운이 펼쳐지던 시작점들을 느꼈습니다. 제가 가서 그곳들을 파괴하겠습니다.”
남궁강이 가능 불가능의 여부를 묻지 않았다.
그가 말한 것은 그와는 조금 다른 이야기였다.
운호가 눈을 크게 떴다.
“부탁하마.”
운호가 크게 뛰어올랐다.
그리고 그 뒤편으로 남궁강을 비롯한 무림맹의 수뇌부가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모두에게 상황을 전달하라. 그리고 우리는 전투에 대비한다.”
거대한 혼란이 무림맹의 토벌대를 덮쳐왔다.
평생 무공을 익히고 살아온 무림인들이다. 자신들이 쌓아올린 것이 무너져 내리는 공포는 얼마나 거대할까.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운호의 몸이 점이 되어 사라진 시점에서 검왕 남궁벽이 가장 먼저 그들에게 달려왔다.
남궁강이 그에게 빠르게 상황을 설명했다. 비록 여러 가지로 처치 곤란인 아비였지만 무공만큼은 믿을만한 사람이었으니까.
“뭐? 구곡황하진?”
남궁벽 입장에서는 실로 터무니없는 이야기였지만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것 말고는 지금 상황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아버지. 몸은 좀 어떠십니까.”
“평소의 칠 할. 싸움이 오래 지속되면 더 낮아질 거다. 주변의 기운이 모두 적대적이라 호흡을 통해 들어온 기운이 진기로 변환되는 비율이 평소의 절반도 채 되지 않는다.”
그래도 역시 초절정은 초절정이다.
평소의 절반도 채 되지 않는 절정과는 다르다. 남궁벽에 이어 속속들이 각 문파를 이끄는 대표자들. 그리고 초절정 고수들이 모여들었다.
“결국 신검이 그 진법의 핵이라는 것을 파괴할 때까지 피해를 최소화한 채 버텨야 한다. 그런 이야기로군요.”
누군가를 탓하는 목소리는 없었다.
어찌 그들이라고 그런 마음이 없었을까. 하지만 적어도 이 자리에 모인 이들 가운데 일단은 상황을 타개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두의 의견이 하나로 합일된 것은 아니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에도 방법에 대한 갑론을박이 격화됐다.
피해가 많을 것이 뻔한 곳을 최대한 피하고자 하는 이기적인 마음의 충돌.
초절정 고수를 보호해야 한다는 의견과 그들이 전면에 나서는 것만이 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다는 의견들이 부딪혔다.
그리고 그 모든 의견이 난무하는 가운데 벽호진인이 문득 이상한 무언가를 발견했다.
이 자리에 꼭 있어야 할 얼굴. 제갈첨이 보이지 않았다.
운호의 몸이 연달아 허공을 밟았다. 평지였다면 굳이 이럴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저 땅을 밟고 달려나가는 것이 진기의 소모는 물론이거니와 속도 면에서도 가장 빨랐을 테니까.
하지만 이 거대한 진법이 펼쳐진 곳은 십만 대산. 말 그대로 어마어마한 숫자의 산봉우리들이 펼쳐진 곳이었다. 그 산을 일일이 넘어가거나 혹은 피해간다? 진기의 소모가 조금 심하더라도 차라리 높은 곳까지 몸을 띄우는 것이 빠를 것이다.
그야말로 섬전과 같은 속도.
운호가 삼백 리를 주파하는데 걸린 시간은 고작 반 다경.
그가 파괴해야 하는 핵의 개수는 총 세 개.
지체할 시간 따윈 없었다.
어느새 뽑아 든 파검에 별빛이 모여들었다.
우공이산이라고 했던가?
노력만 있으면 산조차 옮길 수 있다는 그 이야기 속에서 결국 산을 옮긴 것은 옥황상제가 보낸 두 명의 거인이었다.
운호의 검 역시 그와 같았다.
수백 년.
아니, 어쩌면 천년 이상의 세월을 투자하여 만들어낸 이 거대한 진법의 축을 향하여 운호의 검이 움직였다.
-콰앙!!!
“후, 하마터면 늦을 뻔했구나.”
그것을 무엇이라 표현해야할까?
그래, 슬픔. 슬픔이다. 무한 혈사 당시 마교의 교주가 쓰고 왔던 가면이 고통이었다면 지금 이 가면이 표현하는 것은 슬픔이었다.
압도적인 마기.
흡사 화산의 기운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던 청무 진인과 흡사한 느낌이라고 표현해야 할까?
아니, 그 이상이다.
청무 진인이 화산의 기운을 빌려온 느낌이었다면 이 괴인이 주는 감각은 십만대산 그 자체다.
“이야기는 참으로 많이 들었다. 마이트레야가 그동안 여기저기서 많이 얻어맞고 다니긴 했지만 이 정도까지 두들겨 맞은 것은 처음이기에 어떤 인물인가 우리도 궁금하게 생각했는데 참으로 재밌는 냄새를 풍기는 아이로구나.”
-우리?
운호가 기감을 확장했다.
폭발하듯 순환하는 마기가 감각을 흐리게 만들어서일까? 운호의 감각에 잡히는 것은 지금 눈앞에 선 괴인 하나뿐이었다.
운호의 기세를 읽은 가면 괴인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클클클, 아이야. 뭔가 오해를 한 것 같구나. 여기는 지금 오직 우리뿐이다.”
-마기가 골수에까지 닿아 완전히 미친놈인가?
운호가 더 이상 말을 섞지 않았다.
시간은 저들의 편이다.
무형검(無形劍).
삼라만상의 가능성을 품은 일 검이 마인의 가슴을 향해 움직였다.
“오호라!! 이건 무형검이로구나. 훌륭해. 아주 훌륭하다!!”
적수공권의 사내가 불러낸 검이 운호의 일검을 막아냈다.
그것을 뭐라 표현해야 할까?
마기의 집합? 그래, 사내의 손에 들린 그 검은 그렇게밖에는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어둠이란 결국 빛의 부재다.
운호의 손에 들린 파검이 찬란한 별빛을 품고 있었다면, 사내의 손에 생성된 그 칙칙한 무언가는 어둠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진정 놀라운 것은 부존재의 존재라는 모순을 품은 그 어둠의 검이 아니었다.
“네가······, 네가 대체 어떻게?”
“놀랐느냐? 허어, 이걸 어쩐다. 놀라기에는 아직 많이 이르거늘.”
운호의 무형검을 막아낸 일 검.
그 형태는 완전하게 달랐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일 검이 품고 있는 철학은 같았으니 지금 사내가 펼쳐낸 것은 다름 아닌 무형검이었다.
-정신 차려라!! 굳이 따지자면 남궁벽 그 녀석의 검술도 그것과 궤를 같이 하지 않더냐.
파검이 소리쳤다.
그리고 그 소리보다 빠르게 슬픔의 가면을 쓴 사내가 검을 휘둘렀다.
검과 검의 부딪힘.
운호의 검이 품고 있는 별빛이 사내가 휘두르는 어둠에 깎여 나갔다. 그리고 사내가 휘두르는 어둠 역시 운호의 별빛에 깎여 나갔다.
운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납매와 매농.
그리고 납매와 매농.
운호의 기운이 한순간에 일 점으로 압축됐다.
단단하게 뭉친 하나의 봉우리.
꽃봉오리를 닮은 그것이 하나씩 팔을 뻗어 나갔다.
운호가 익힌 일곱 개의 화산검과 저 남해 보타암의 반야검이 합일된 운호 자신만의 화산검이었다.
그것은 화산을 닮았지만, 그보다 조금 따스했다.
그리고 그 앞에서 가면의 사내 역시 어둠으로 뭉친 검을 휘둘렀다.
그 검은 홀로 서 있으니 단지 서있는 것만으로 꽃을 닮은 중원의 돌산, 화산을 닮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