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7화
결착(11)
운호의 몸이 높은 곳으로 떠올랐다.
강호에서 어기충소라 칭하는 수법이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매우 크게 달랐다. 일반적으로 어기충소라고 해봐야 몇 장, 높아야 십여 장 정도 뛰어 오르는 것이 고작이다.
운호의 발이 거듭해서 허공을 박찼다.
한 번에 수십 장씩 쭉쭉 하늘을 향해 몸이 나아갔다. 그것을 바라본 남궁강은 이제 놀라지도 않았다. 초절정 고수들이 비상식적인 모습을 보여준 것이 어디 한두 번인가. 심지어 운호는 일반적인 초절정 고수조차 넘어섰다고 평가받는 괴물이다.
어느새 운호의 몸이 하늘에 그득한 구름을 뚫고 사라졌다.
그야말로 신선과 같다. 아마도 무공이라는 것을 모르는 이가 봤더라면 저것을 우화등선이라 여기지 않았을까?
일반적으로 까마득하게 높은 절벽을 천길단애(千仞斷崖)라고 표현한다. 높이가 천장에 달하는 절벽이라는 의미다. 실제로 중원에서 가장 높은 산 중 하나인 화산도 그 높이가 천장에 달하지 못하니 천장단애라면 그저 헤아리기 힘들만큼 까마득한 절벽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는 하다.
하지만 지금 운호가 뛰어오른 높이는 그 이상이었다. 본래도 높은 고산지대인지라 기온이 낮은 곳이었다. 심지어 거기에서 천장 이상을 더 뛰어 올랐다. 양신을 이뤄내 한서불침에 이른 운호의 몸에 살얼음이 맺혔다. 이제 그 주변에 땅의 기운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차갑고 맑은 하늘의 기운만이 가득했다. 진기를 뭉쳐내 발판을 만드는 것도 어려울 만큼 청명하다.
그곳에서 운호가 저 지상을 내려다봤다.
뿌연 구름이 그득했지만 운호의 시야를 가릴 수는 없었다. 지형과 지물. 서서히 지상으로 낙하하는 운호의 두 눈이 그 모든 것을 똑똑히 기억했다.
무당의 벽호가 주변의 지세를 살폈다.
“어떻습니까?”
“글쎄요······. 확실히 뭔가 비범해 보이기는 하네만······. 그래도 구곡황하진이라니······. 허허 참. 이걸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천하의 도관 가운데 가장 영험한 곳을 꼽으라면 역시 무당이다. 그리고 벽호는 그런 무당의 도사 가운데서도 가장 도력이 높기로 소문이 났다. 헌데 그런 그조차도 구곡황하진이라는 말에는 그저 너털웃음을 터트릴 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름난 도가의 서적에 나온 무언가도 아닌, 봉신방연의라는 길거리의 매화자들이 떠드는 이야기를 모아서 엮어낸 잡서에 나오는 절진이 펼쳐져 있을지 모른다고?
아마 지금 이 말을 하는 이가 남궁강이 아니었다면 지금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을 것이다.
봉신방연의가 무엇인가.
은나라와 주나라 교체기의 이야기에 허구적인 상상을 입힌 물건에 불과하다. 거기에 나오는 태상노군의 제자 강자아는 제나라의 군주이며 애당초 자질이 떨어지는 선인과 뛰어난 인간을 모아 선계와 인간계 사이에 신계를 만들어 옥황상제를 보좌한다는 것부터가 터무니없는 이야기다.
게다가 신선을 인간으로 돌리는 진법이라니.
“말이라는 것은 대저 사람의 입을 거치면 거칠수록 크게 부풀기 마련이네. 삼국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삼국지연의만 봐도 그렇지. 장비가 백만의 대군을 홀로 막았다느니, 조운이 백만 대군을 헤집었다느니, 관우가 죽어 신선이 되었다느니 하는 이야기들이 마치 정설처럼 나돌지 않는가? 심지어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적벽의 대전이라는 것도 결국에는 파양호 전투를 그대로 가져다 베낀 이야기고. 빈도가 생각하기에는 봉신방연의 역시 그러한 것이 아닌가 싶구만.”
벽호 진인이 나름대로 최대한 점잖게 세상에 그런 것이 있을 리 없다는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사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남궁강을 이해 못 할 것도 아니었다. 이 거대한 원정대를 총괄해야 하는 처지다. 그 부담감이 오죽할까.
그리고 그 때였다.
-쉬이익!!
‘응?’
기습?
무언가 빠르게 공기를 가르는 소리. 알 수 없는 무엇인가가 어마어마한 속도로 이곳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화살이 아니다.
포탄?
이상하게 조용하다 생각했었다. 설마 마교에서 화포를 준비한 것인가? 하긴 구곡황하진 같은 허황된 진법보다는 그쪽이 더 현실적이다.
지난 파양호 전투를 통해 화포의 위력은 이미 증명됐다. 포탄에 정통으로 맞는다면 절정 고수조차 위험하다.
심지어 지금 날아드는 무언가는 그가 알고 있는 포탄의 속도보다 아득하게 빠르다. 절정의 고수라면 난전이 아닌 이상 날아오는 포탄 정도는 충분히 보고 피할 수 있다. 심지어 그 수준과 무공의 종류에 따라서는 무난하게 포탄을 받아낼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느껴지는 저 속도는 다르다. 그가 인지를 함과 동시에 이미 도저히 피할 수 없는 범위까지 파고 들었다.
그의 몸이 빠르게 남궁강의 앞으로 움직였다.
“남궁 가주 위험!!”
그리고 채 말이 다 끝나기도 전.
-쾅!!!! -쾅!!! 쾅!!
막대한 속도로 날아오던 무언가가 허공에서 세 차례 어마어마한 충격음을 터트렸다.
벽호진인의 시선이 공중으로 향했다.
“사······람?”
도저히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든 광경. 사람이 포탄보다 아득하게 빠르게 날아와 허공에 갑자기 멈춰 선다고?
그렇기에 그는 저 젊은 인영이 누구인지를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최근 강호를 가장 떠들썩하게 만든 화산의 젊은 고수.
신검 증무도사 백운호다.
물론 초절정의 고수 가운데 육지비행(陸地飛行), 허공천상제(虛空天上梯), 어검비행술(御劍飛行術)과 같은 신화적인 수법을 사용하는 이가 있다는 것 정도는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본능적으로 지금 운호가 보여준 그것이 그런 것과는 궤를 달리한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단순한 경공을 넘어섰다.
벽호가 현재 무당에 둘밖에 남지 않은 초절정 고수로 이번 토벌전에 참가한 자신의 사제 벽굉을 떠올렸다. 그라면 저런 무공을 펼칠 수 있을까? 아니, 불가능하다. 허면 그보다 한 수 높다는 평가를 받던 벽운 사형은 어떠한가. 천무십칠성의 일원이던 그라면 저런 신위가 가능했을까?
그럴 리가······.
사람이 아니다.
벽호진인은 어찌하여 극광오신이라는 이름이 초절정을 넘어 따로 출신입화경(出神入化境)이라는 경지로 불리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대체 저것이 신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허공을 밟고 있던 운호가 가볍게 바닥을 밟았다.
“이상한 점을 찾았습니다.”
“이상한 점?”
남궁강 역시 갑작스럽게 공중에서 내려온 운호에게 놀란 것은 마찬가지였다. 한참 전에 저 까마득한 하늘로 날아간 녀석이 그런 거대한 폭음과 함께 나타나다니.
“네, 높은 곳에 올라가 지형을 살펴보니 자연적으로 형성됐다고는 믿기 힘든 구역들이 보였습니다.”
“인위적인 형태들이 보였다는 말이로구나.”
두 사람의 대화 사이로 벽호가 끼어들었다.
“잠깐, 아니, 빈도가 알기로는 이 주변은 이미 수색대가 한 차례 수색을 끝낸 지역으로 알고 있네만?”
“누구신지?”
“아, 신검. 내 갑자기 끼어들어 미안하네. 무당의 벽운이라고 한다네.”
“무당의 벽운 진인이셨군요. 처음 뵙겠습니다. 화산의 증무라고 합니다.”
“알고 있네. 토벌단에 소속된 무인으로 어찌 화산의 신검을 모를까. 그보다 그 이야기나 조금 더 해보시게. 인위적인 구역이라니. 그게 대체 무슨 말인가. 수색대의 말에 의하면 이 근방에서는 오직 나무와 돌 풀밖에 보지 못했다고 하던데.”
처음 운호가 이야기를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벽호는 그저 남궁강도 그렇고 너무 과민한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하지만 이야기가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혹시 어쩌면? 이라는 생각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너무 작은 것은 보기 힘들다.
하지만 때론 너무 큰 것도 보기 힘든 법이다.
우공이산(愚公移山)이라는 말이 있다.
열자의 탕문편에 나오는 이야기로 그저 인간의 노력으로는 이루지 못할 것이 없다는 일종의 비유다. 실제로 그 이야기에서도 결국 산을 옮긴 것은 우공의 노력이 아닌 그의 노력에 감복한 옥황상제의 은혜였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단순한 비유이며 인간이 산을 옮기는 것은 정말 불가능한 것일까?
“잠깐, 잠깐. 그러니까 자네 이야기는 저쪽에 동산과 숲. 그리고 저기 흐르는 하천의 형태가 인위적이라 그런 이야기인가?”
물론 과거 수제국의 이대 황제는 고작 팔 년만에 황하와 회하를 연결했고 다시 회하와 장강을 연결하였으니 그 길이가 무려 일만 리에 달했다.
하지만 그것은 중원의 통일 제국이 자신의 역량을 말 그대로 쥐어 짜냈을 때나 가능한 대 위업이다. 그걸로 모자라 그 공사는 수제국이 고작 사십 년 만에 멸망한 주된 원인 중 하나다. 헌데 이런 외곽에서 고작해야 마교도들이 산과 숲을 만들고 하천을 만들어내는 공사를 해냈다고?
“시간이 다릅니다. 천만의 사람이 십 년이 걸린 일이라면 백만의 사람으로 백 년을 하면 그만일 것이고, 십만이라면 천년이면 될 일입니다. 보통의 사람에게는 너무 아득하여 대를 이어도 상상하기 힘든 긴 시간이지만 그것이 마교의 대제사장이라면······.”
당장 숲을 만드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백 년을 내다보고 숲을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다. 벽호는 자신들이 상대하는 적이 얼마나 비현실적인지를 새삼 깨달았다.
“지금은 돌아가는 길을 선택하는 것이 옳은 것 같습니다. 게다가 그것이 적들이 노리는 바일 확률은 그리 크지 않을 거라고 봅니다. 고작 공격해오는 이들을 돌아가게 만들기에는 너무 거대한 규모의 함정입니다.”
“저 역시 서북방면에서 내려오는 토벌대와 합류하는 것이 조금 늦어지겠지만 차라리 그편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빈도도 그렇게 생각하네. 물론 구곡황하진과 같이 허황된 말을 믿는 것은 아니네만 지형과 지물에 수상함이 있다면 굳이 그것을 강행할 이유는 없겠지. 어찌 됐건 이곳은 놈들의 안마당 아닌가. 상대가 원하는 곳에서 싸워주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도 없지.”
남궁강이 결정했다.
대기가 요동쳤다.
다른 이들은 그것을 느끼지 못했으나 그, 아니 그들은 그것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들에게는 지금 잠든 저 티샤 마이트레야처럼 자유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직 제한된 영역만을 거닐 수 있는 반쪽짜리 존재에 불과했다.
저 높은 차원에 본래 존재하는 영(靈)
이차원에서 인간을 이끄는 혼(魂)
한 인간이 쌓아 올린 백(魄)
그리고 그가 타고 태어나는 육(肉)
더 높은 차원으로 도약하는 인간은 필연적으로 자신의 백과 육을 떨쳐낼 수밖에 없다. 저 가벼운 곳으로 향하기에 그런 것들은 너무 무거우며 너무 더러웠으니까.
깨달아 천상에 이른 존재가 남긴 흔적의 집합.
본래라면 진즉에 사멸했어야 하는 그저 기억의 덩어리들.
그렇기에 그들은 스스로를 구원자라 믿는 미치광이가 만들어낸 영역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허깨비였다.
하지만 동시에 그렇기에 그들은 이 영역의 지배자였고 가장 강력한 권한자인 대제사장이 잠든 이 시점에서 이것을 제어할 수 있는 유일한 권한자였다.
“구곡황하진을 개문해라.”
“네? 하지만?”
“이미 발각됐다. 그러니 더 늦기 전에 어서!!”
아득한 과거.
이제는 호사가들의 헛된 이야기로만 전해지는 시절에 전해지는 천고의 절진.
태상노군의 열두제자를 평범한 사람으로 돌려놨다는 전설의 진법이 지금 발현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