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6화
결착(10)
남궁강과 말 머리를 나란히 한 채 이동하던 제갈첨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러느냐?”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칠대세가의 지낭.
젊었을 적 제갈첨은 스스로를 그렇게 칭했었다. 물론 다행스럽게도 이제는 자신을 그렇게 칭했던 것을 부끄러워할 만큼의 연륜은 쌓였다.
사람들은 남궁강의 딸인 남궁혜와 제갈첨의 혼인이 그저 남궁혜가 그의 훤칠한 외모에 반해 이뤄졌다고 생각했다. 거기서 조금 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그 혼인이 남궁세가와 제갈세가의 합의에 의한 혼인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제갈첨이 스스로를 칠대세가의 지낭이라 칭하는 것을 모두가 비웃을 때도 그의 장인인 남궁강만은 그것을 비웃지 않았다.
“그러지 말고 말해 보아라.”
물론 제갈첨이 세상을 보는 눈은 조금 어두웠다.
또한 자기 자신에 대한 과신이 과하였다. 하지만 그것이 단순히 아무런 근거 없는 자신감인가 하면 그렇지 않았다.
남궁강의 아들인 남궁철은 무려 사시 장원이다. 물론 가문의 힘과 돈의 힘이 조금 들어가긴 했지만, 무공과 학문을 병행하는 과정에서 그만한 성적을 거뒀으니 그 재능은 실로 비범한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천재인가를 묻는다면 남궁강은 단호하게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가 생각할 때 천재는 그의 아버지와 같은 사람이며 저 백운호와 같은 사람이다.
또한 천재는 그에게 돈을 받고 그의 아들에게 장원을 양보한 한상의 상단주와 같은 사람이다.
그렇다면 제갈첨은 어떠한가.
물론 녀석은 남궁철처럼 학문에 조예가 깊지 않았다. 현시와 부시와 원시를 통과하고 향시까지 통과하긴 했지만, 장원과는 거리가 아주 멀었고 회시에는 무려 두 차례나 낙방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제갈첨이 천재의 범주에 들어간다 생각했다.
애당초 제갈첨은 유학을 깊이 공부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제갈량을 닮고자 했을 뿐이었다. 물론 실제 제갈 가문에서 시조로 모시는 제갈량은 유학자였다. 그는 위대한 행정가였으며 한 명의 천재가 국가를 어디까지 정상화 시킬 수 있는지를 보여준 놀라운 인물이었다.
하지만 최근 수십 년 사이에 유행하기 시작한 나관중의 삼국지 연의에 묘사된 그는 그런 위대한 행정가라기 보다는 그저 신묘한 책략과 기괴한 군략을 구사하는 불세출의 전술가였다.
그리고 아쉽게도 제갈첨은 어린 시절에 삼국지 연의를 너무 감명 깊게 읽어 버렸다. 하지만 그의 가문에 내려오는 유학은 치국의 법을 가르쳐줄 뿐. 연의 속 제갈량이 보여줬던 신묘한 계략이며 터무니없는 군략은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는 그것들을 공부했다.
그것은 한나라 이전.
유학이 지금과 같은 위치를 차지하기 전에 유행했던 수백 가지의 학문들.
백가쟁명이라 불리던 시절의 학문들이었다.
당시 천하는 실로 어지러웠으며 그렇기에 학문의 목표는 치국이 아닌 난세의 종결이었다. 그리고 그 방향은 자연 폭력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는데 그 가운데는 유가나 법가와 같이 치국을 통하여 국가의 내실을 기하는 것이 있었고 묵가나 병가와 같이 직접적인 싸움에 유용한 것도 존재했다.
그 가운데 제갈첨이 깊이 공부한 것은 병가, 그리고 묵가였다.
그는 손자와 오자의 병법서에 관하여 당대 최고의 전문가였으며 심지어 위작이라 의심받던 손빈병법 역시 제갈첨의 주해서로 인하여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또한 묵가의 경우 시황제의 분서갱유로 인하여 그 맥이 거의 끊겼다고 볼 수 있었는데 대체 무슨 방법으로 묵가와 관련된 서적들을 그렇게 찾아낸 것인지 현재 천하에 유일한 묵가의 전문가는 오직 제갈첨뿐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게 그러니까 이 주변의 지리가······.”
“지리가?”
“제가 서적에서 봤던 것과 흡사해서 말입니다.”
“서적에서 봤던 것과 흡사하다고?”
“네, 물론 확신하기는 힘듭니다만······. 장인어른께서도 제가 젊은 시절에 잠깐 북경에 갔던 건 잘 아시잖습니까.”
물론 알고 있다.
당시에 이미 제갈첨과 그의 딸은 혼례를 올린 이후였으니까.
“알다마다. 혜아가 그때 자네를 따라가지 않았던가. 사돈은 자네가 드디어 마음 잡고 회시를 준비한다고 생각하셨네만 회시는 핑계였고 가서 온갖 희귀한 잡서란 잡서는 죄다 독파를 하고 왔다지? 그때 사돈이 어찌나 길길이 화를 내던지.”
“하하, 아무튼 그때 읽었던 책 가운데 묵변비록이라는 서적이 있었습니다. 본래 전해지는 묵자의 서적과 흡사했으나 그 안에 내용이 실로 허황된 부분이 있었는데······.”
“거참, 알았으니 변죽 그만 울리고 본론부터 이야기해보게.”
무한에서 팔이 잘린 이후 사람이 이전과 달리 신중해진 것은 좋은데 이런 부분은 또 문제다. 쉽게 본론을 말하지 않는다.
“고사에 보면 노반 선사에 관한 부분이 있지 않습니까.”
“노반 선사? 노반 선사라면 혹시 묵적지수의 고사에 나오는 그 반노반을 말하는 건가? 노나라 사람으로 초나라 왕 밑에서 운제를 발명했으나 묵자에게 번번이 막혀서 결국 포기했다는?”
“네, 제가 읽은 묵변비록에는 그에 관하여 조금 더 자세한 이야기가 기록이 되어 있었는데 사실 노반선사가 발명한 것은 운제에 국한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늘을 나는 신비한 목조(木鳥)와 스스로 움직이는 거대한 전차가 있었다고 하는데 묵자는 그것을 막기 위하여 구곡황하진(九曲黃河陣)의 비결을 사용하였다고 하는데, 아 구곡황하진이 뭐냐하면 봉신연의에 나오는 진법으로 삼선도에 거주하던 신선들이 곤륜의 십이신선을 모조리 범인으로 돌려놓았는데. 거기서 묘사된 지형이 이와 흡사하여······.”
남궁강의 침묵에 신이 나서 이야기를 이어가던 제갈첨의 목소리가 점점 줄어들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였다.
하늘을 나는 목조와 스스로 움직이는 거대한 전차?
심지어 그것을 막았다는 구곡황하진은 민간에 전해지는 설화인 봉신방연의에나 나오는 가상의 진법 아니던가.
남궁강의 얼굴이 단단하게 굳어졌다.
말을 뱉은 제갈첨 역시 자신이 얼마나 허황된 말을 내뱉었는지 인지하였는지 괜한 헛기침을 하며 주변을 슬쩍슬쩍 살폈다.
“장인어른, 그저 제가 읽은 책이 그렇다는 것뿐입니다. 아마도 그 책을 쓴 사람이 이런 지형지물을 보고 썼을 수도 있고······.”
“그 책. 위서일 확률이 얼마나 된다고 보느냐.”
“네? 그거야······. 종이는 분명 초창기의 채후지였으니 약 천오백 년 전 종이였기는 합니다만, 묵자는 그보다 오백 년은 더 옛날 사람이니 직접 작성한 것은 아닐 겁니다. 아마도 진서라면 묵자가 쓴 글을 채후지에 옮겨 적은 것이겠지요.”
“내용은? 그 어처구니 없다는 부분을 제외하고 다른 부분의 내용은 어떠하냐.”
“그것이 제가 구했던 묵자와 대부분이 일치하며 오히려 몇몇 부분에서는 더 신빙성이 있는 내용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위서가 아니라고도 볼 수 없는 것이 어느 시대건 하나의 거짓을 섞기 위하여 구할구푼의 진실을 말하는 이는 존재하는 법이니······.”
“가서 운호를 데리고 오거라. 그리고 무당의 벽호 진인에게도 어서 파발을 띄워라.”
“네······. 네!! 알겠습니다.”
사람들은 제갈첨을 천하의 머저리라고 부른다.
어떤 이들은 남궁강이 평생 했던 투자 가운데 유일하게 실패한 투자라고 하기도 한다. 멍청하게 자기 동생에게 가주 자리를 뺏긴 형이니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한 평가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남궁강은 평생 그의 아비 검왕 남궁벽을 지켜 봐왔다.
그는 분명 대부분의 분야에서 부족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가 남궁세가의 무공을 집대성한 천재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제갈첨 역시 그와 같다.
유학을 근본으로 하는 제갈 세가에서 태어났다면 응당 유학을 익혀 가주의 자리를 노리는 것이 보통 사람의 생각일 것이다. 거기서 병가니, 묵가니 하는 잡학을 익히는 것이 어찌 정상일까.
하지만 천재란 모든 분야에서 뛰어난 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어떤 의미에서는 바보 같아 보이기도 한다.
그래, 마치 그의 아버지 검왕 남궁벽처럼 말이다.
“네? 구곡황하진이요?”
분명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이름이었다.
“봉신연의에 나오는 절진이네. 듣기로는 삼선도의 신선들이 사용하는 진법으로 전설에 따르자면 곤륜 십이선인을 모두 범인으로 돌려놓았다고 하더군.”
확실히 봉신연의라면 운호도 조금은 알고 있다. 길거리의 설화자들이 떠드는 이야기 중 하나로 삼국지 연의와 비슷한 류의 역사를 기반으로 하는 소설이다.
아주 오래 전 은제국과 주제국의 교체기에 관한 이야기인데 삼국지 연의와 차이점이 있다면 연의는 그래도 비교적 최근의 작품으로 영웅들의 이야기라면 이건 그보다 훨씬 허황한, 말 그대로 신선들의 이야기다.
“그러니까 지금 그 신화 속에 나오는 구곡황하진이 여기 펼쳐져 있다 의심하신다는 말씀이십니까?”
남궁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말해 만약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남궁강이 아니었다면 운호는 일고의 가치도 없이 그저 미친 소리라 치부했을 것이다.
물론 옛날 이야기에 전해지는 그 진법이라는 것은 참으로 많았다. 하지만 단순히 지형지물을 움직여 그러한 조화를 부린다는 것이 어디 가당키나 한 일인가.
그나마 진법의 대가라는 제갈 세가의 팔진도 역시 기껏해야 미로와 기관을 통해 그런 효과를 만들어낼 뿐이다.
하지만 이런 말을 한 사람이 남궁강이라는 점만으로도 충분히 숙고를 해볼 만한 이유가 됐다.
“도가의 진법이니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저를 부르신 거군요.”
“아니, 아니다. 그보다는 운호 너의 무공이 하늘에 닿았으니 극과 극은 통한다고 혹여 무언가 느끼는 것이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불러본 것이다. 어떠냐? 혹여 뭔가 느껴지는 것이 없더냐?”
-아무래도 압박감이 큰 모양이로구나. 하긴 맹주라는 놈이 저 지경이니 실질적으로 맹주 역할까지 해야하는데 오죽 할까.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뭐? 구구 무슨 진? 신선을 인간으로 돌려놓는 진법이라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
파검이 남궁강의 이야기에 코웃음을 쳤다.
그래, 이게 정상적인 반응일 것이다.
“내 이야기가 얼마나 허황하게 들릴지 나도 잘 안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거라. 사람이 이천년을 산다는 것은 어디 말이 되는 소리더냐? 게다가 봉신연의의 배경은 이천사백 년 전의 이야기다. 우리에게는 너무나도 까마득하여 그저 신화 같은 시대의 이야기지만 이천 년을 살아온 괴물에게는 그저 조금 먼 옛날의 이야기 정도일 수도 있다.”
하긴, 이천년간 타인의 몸을 훔쳐가며 살아온 괴물을 보았고, 오백년 간 마치 환생을 한 것처럼 자신의 기억을 전승시킨 괴물도 보았다. 무엇보다 운호 자신의 심상에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불가해의 무언가가 존재했으며 운호 스스로도 더 높은 차원과 연결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어찌 진법이라고 마냥 불가능한 것으로 치부할까.
“알겠습니다. 그러면 제가 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준비는 끝났습니다. 명령만 하신다면 지금 당장에라도······.”
“아니, 아직이다. 조금만 더 적도들을 끌어들이도록 하자. 그리고 감히 그 더러운 발로 성지를 침범하려 한 댓가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똑똑히 느끼게 해주자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