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2화
결착(6)
어어어······.
이 충격을 대체 뭐라고 해야 할까? 턱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통증은 그렇다고 치자. 그것보다 커다란 충격은 고작 이제 막 초절정에 오른 서른 살이나 어린 애송이에게 이런 굴욕적인 공격을 허용했다는 점이었다.
순간적으로 흔들린 뇌 탓일까?
빠르게 다시 일어서는데 다리가 휘청했다.
정작 턱에 발차기를 집어넣은 혁리광이 크게 당황하여 어버버 하는 표정을 짓는다. 그도 그럴만한 것이 남궁벽의 반고검은 운호가 무형검을 완성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준 천하의 절기다. 시작과 끝은 있지만 그 과정이 인지에서 생략되어버린다.
혁리광 입장에서는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의 발끝이 남궁벽의 턱주가리를 날려버린 셈이다.
“혁리 대협!!”
운호의 날카로운 외침이 그의 귓가를 찔렀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혁리광이 자세를 바로 잡았지만 늦었다.
-쯧, 멍청하기는.
혁리광이 망설인 시간은 그야말로 눈 깜빡할 시간이었지만 경지에 오른 초절정 고수들 간의 싸움에서 그 시간은 영원에 가깝다. 덕분에 남궁벽은 휘청하던 무릎을 바로잡을 시간을 벌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방심한 탓일까? 그래, 분명 그럴 것이다. 저 어린 녀석의 표정을 보면 분명 녀석은 반고검에 반응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저 녀석이 보여준 그 공격은 어떤가. 우연이었을까? 아니, 그건 말이 되지 않는다. 그것을 허용한 것이야 방심이라고 쳐도 그 날카로운 공격 자체가 어떻게 우연일 수 있을까.
‘어찌 됐건 저 녀석 역시 초절정의 고수. 숨겨둔 한 수가 있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겠지.’
숨겨둔 비장의 한 수가 어찌하여 무서운가.
간단하다.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불의의 일격은 언제나 무서운 법이고, 그렇기에 숨겨진 한 수는 언제나 더 큰 위력을 갖는다.
하지만 이제 저 애송이의 공격은 숨겨지지 않았다. 현묘한 이치가 담뿍 담긴 공격 사이로 찔러 들어오는 불의의 일격. 그것은 가장 원초적이며 날것 그대로의 공격이다.
미리 알고 있다면 그리 어렵지 않다.
“제법이로구나. 하지만 삼 초는 이제 다 끝났다. 이제는 내 차례다.”
한쪽 뺨이 벌개진 채로 이야기하기에는 너무 허세 넘치는 말이었다. 하지만 정작 혁리광은 그 말을 결코 허투루 듣지 않았다.
검왕이 오연하게 검을 치켜들었다. 과연 검의 왕이라는 별호가 어울리는 위압감이 그에게서 풍겨났다.
더 이상 방심은 없다.
태초의 거인. 반고의 이름을 붙인 그의 절기가 또 다시 펼쳐졌다.
감히 인간의 인지로는 가늠할 수 없는 그 너머의 가능성이 일 검에 가득 담긴다.
-확실히······.
파검의 말에 복잡한 감정을 그득 담겨 있었다.
평생을 싫어해온 인물이지만 동시에 그와 함께 항상 이름이 오르내렸던 인물이었다. 한 대 얻어 맞은 모습이 속이 시원했지만, 동시에 과연 그 솜씨가 한때나마 자신과 어깨를 나란히 할만하다는 것이 썩 나쁘지 않다.
파검이 확신하건데 지금 검왕의 저 반고검은 가히 운호의 무형검에 버금간다. 저기서 한 걸음만 더 내디딜 수 있다면 운호의 무형검에 비길 만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이만한 상승의 경지에서 그 ‘한 걸음’이란 죽는 날까지 다다를 수 없다는 말의 동의어일 확률이 더 높겠지만.
이번에도 혁리광이 기억하는 것은 검왕이 검을 뽑아든 것 까지였다.
아니, 그 자리에 있던 이들 모두 약간의 차이만 있을뿐 검왕이 검을 휘두르는 것을 제대로 본 이는 오직 운호뿐이었다.
그렇기에 혁리광이 검왕의 검에 옷깃을 베이고 그 댓가로 그의 무복 옆단을 뜯어냈는 것을 목격한 이도 오직 운호뿐이었다.
검왕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감각도(感覺刀)? 물론 이 경우는 도가 아니라 자신의 몸을 사용하는 것이지만 그와 흡사하다. 저것은 전장의 검을 극한으로 익힌 낭인 가운데 종종 초월의 길에 접어드는 이가 깨닫는다는 이치다. 하지만 대체 어떻게!! 저 녀석이 펼치는 무공은 지극히 심오한 현문정종의 그것이다.
낭인 나부랭이의 목숨 수천만 개가 사라지고 우연히 하나씩 탄생하는 그 무공을 어찌 저런 녀석이 펼쳐낸단 말이던가. 그것도 저렇게까지 수준 높게.
-당황할 만도 하지. 천하에 저딴 무공을 만드는 인간이 있을 줄은 나도 상상하지 못했으니까.
‘그보다는 그딴 무공으로 초절정에 이른 혁리 대협이 대단하다고 봐야죠.’
혁리광이 익힌 무공은 지독하게 난해하고 현묘한 도가의 무공이었다. 그리고 운호가 생각할 때 이 무공을 만든 이 의도한 바는 극한으로 익힌 이것을 스스로 버림으로써 경지에 이르는 길이다. 인위로 만든 것을 허물어 다시 무위로 나아가니 그야말로 노자에서 시작되어 장자로 이어진 도가 철학의 근본이다.
하지만 그 무공을 창안한 누군가가 미처 예상하지 못한 것은 자신의 무공을 물려받은 저 혁리광이라는 인간은 그딴 깨달음 없이, 단순히 그가 남긴 그 현묘한 무공을 극한까지 익히는 것만으로 절정을 넘어 초월에 접어들었다는 점이었다.
그렇기에 지난 두 달.
운호는 비무를 통하여 조금씩 그 무공의 창시자가 원했던 형태를 혁리광의 몸에 새겨 넣었다. 물론 이미 그 현묘함을 통하여 초월에 닿아버린 혁리광이었기에 그가 보여주는 무공은 창시자가 생각했던 형태와는 달랐다. 하지만 그 다름은 열화가 아닌 진화였으니 무의식의 단계까지 박혀버린 그 현묘한 초식을 초월한다는 것은 그런 의미였다.
“과연, 녀석이 굳이 너를 내민 이유가 있었구나.”
검왕 남궁벽이 마침내 혁리광을 인정했다.
물론 반고검으로도 언젠가 혁리광을 제압할 자신은 있었다. 하지만 그 꼴은 퍽이나 우스울 것이 분명하다. 서른 살이나 어린 후배를 상대로 전력을 다해 한참 동안 드잡이질을 해야 하다니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남궁벽이 자신의 보검을 납검했다.
-설마?
은근하게 좌중을 짓누르던 제왕검형의 기운이 수그러들었다. 하지만 절대 그것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저 모여들 뿐이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빛무리가 모여들었다.
그 찬란함은 인세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으니 혁리광은 직감했다. 이것을 그대로 지켜봐서는 절대 안 된다고.
그의 몸이 쏜살같이 나아갔다.
극한의 위기감.
그 자신도 모르게 현묘하기 짝이 없는 그 동작들을 대신하여 가장 본능적이며 무위(無爲)에 가까운 움직임이 펼쳐진다. 크게 세 걸음. 그리고 채찍처럼 그 발끝이 남궁벽에게 쏘아졌다.
마치 포탄과도 같은 위력이었다. 그리고 본디 작용과 반작용은 세상의 이치다. 그만한 위력의 발차기를 날렸다면 그의 몸에 합당한 반동이 돌아옴이 옳았다.
하지만 그 발끝에는 아무런 반동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반동을 떠나 감촉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모든 힘이 일순간 딱 멈춰선 것 같은 비정상적인 현상.
“심검(心劍)?”
4년 전 운호와 싸우던 당시 마지막 순간 그가 보여줬던 이적이 재현됐다.
하지만 그 완성도에서는 감히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검왕이 운호를 상대로 보여줬던 자신감의 근원이었다. 검강을 뛰어넘은 초월의 상징. 그야말로 전설로 전해지는 무공이다.
저 하늘의 별빛을 긁어모은 강기(罡氣)는 천하에 부수지 못하는 것이 없는 막강한 기운이다. 하지만 어찌 별빛이 단순히 무언가를 박살 내는 파괴의 힘뿐이랴. 그저 초월에 간신히 손끝이 닿은 그들이 빌려올 수 있는 별빛이 그러할 뿐이다.
하지만 심검은 달랐다.
파괴에 국한되지 않은 진정한 초월의 힘이다. 지상의 법칙에서 힘은 곧 질량과 속도로 결정난다. 하지만 이치를 벗어난 마음의 검은 그것을 초월했다.
검왕의 심검이 움직였다.
마치 무게 따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표홀 하게.
혁리광이 다급하게 몸을 틀었다. 하지만 심검에 막혔던 오른발이 이상하다. 덕분에 그 빛무리가 팔뚝을 베고 지나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과연······.
이번에도 치솟는 핏물 따윈 없었다.
빛무리가 스쳐 지나간 자리에 그의 팔은 그대로 잘 붙어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는 뜻은 아니다.
오른발과 마찬가지로 팔의 감각이 사라졌다.
진기조차 흐르지 않는다. 마치 남의 팔을 가져다 붙여둔 것처럼 이질적이다.
“걱정하지 말아라. 그저 일시적인 일이니.”
검왕이 한 글자씩 말을 뱉을 때마다 그가 쥐고 있던 별무리가 일렁거린다. 참으로 신비로운 광경이었으나 운호는 그 일렁거림이 참으로 아쉬웠다.
‘역시 아직이네요.’
-뭐, 심검이라는 게 절대 쉬운 일은 아니지. 나도 말년에야 깨달았던 이치니까.
그저 진기를 뭉친 것으로 검강과 비슷한 무언가를 만들어낸 것처럼.
그저 검강을 뭉쳐낸 것으로 심검과 비슷한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가능하다.
본래 임계점을 넘어선 양은 질적 변화를 일으키는 법이니까. 하지만 지금 검왕이 보여주는 것은 분명 단순히 그런 수준은 아니었다. 그의 심검이 혁리광의 팔뚝을 소멸시키는 대신 그저 그 의념을 날카롭게 잘라두는 것으로 그쳤다는 점이 그 성취를 증명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완전한 심검을 완성했는가 하면 그건 또 아니다. 만약 정말로 심검을 완성했더라면 저 졸렬한 인성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그를 데려갈 만한 가치가 있었을 것을.
참으로 어중간하다.
무엇보다 저 쓸데없는 허세와 무한 혈사 당시 보여줬던 비겁함까지 고려한다면 더더욱 그 가치는 떨어진다.
“그래도 참으로 장하구나. 나에게 이것까지 끌어내다니.”
혁리광의 시선이 검왕을 훑었다.
가능할까?
이미 그의 머릿속에는 아버지가 오랜 시간 그 만남만을 자랑했던 검왕도, 무림의 가장 큰 어른이라는 무림 맹주도 없었다. 지금 그의 눈앞에 선 자는 그저 쓰러트리고 싶은 적수일뿐이다.
지난 두 달.
그가 상대했던 것은 운호만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운호보다 지금 저기서 멀뚱멀뚱 서 있는 모용준경을 더 많이 상대했으며 종남의 검후 종화도 청해에서 온 혈안의 검귀 종자명도 그리고 황실 최강의 고수인 조왕 주고수도 상대했었다.
물론 그의 승률은 다섯 가운데 최하위였다. 하지만 다섯 가운데 최강자인 주고수가 유일하게 패배했던 이는 바로 혁리광이었다.
승리를 향한 강한 집념.
포기하지 않는 근성.
그의 몸이 움직였다.
“쯧, 미련하다!!”
그 내뱉는 말을 따라 검왕의 심검이 일렁였다.
불편한 다리와 불편한 손.
하지만 혁리광의 동작은 실로 현묘했으니, 그것은 그 기묘한 무공을 창안했던 누군가가 깨트려주기를 바랬던 형 그대로였다.
-멍청한!!
파검이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그리고 그 외침은 그토록 싫어했으며 그토록 경멸했던. 하지만 그 싫어함과 경멸함이 사십 년을 이어져 버렸던 그 인생의 호적수를 향해 있었다.
완전히 똑같지는 않았으나 비슷했다.
처음 검왕이 강기를 뭉쳐 심검을 만들었던 그 날.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운호에게 무기력하게 패배했던 것처럼.
검왕의 심검은 현묘하게 움직이던 혁리광의 나머지 한쪽 팔을 앗아갔으나, 그 사이 홀로 번뜩였던 발차기를 막아내지 못했다.
그리하여 혁리광의 발차기가 완벽하게 검왕의 후두부를 가격했다.
“······. 여기는?”
“걸왕 어르신. 저를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