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1화
결착(5)
남궁벽은 생각했다.
어른인 내가 여기서 저 아이와 투닥거리는 것이 옳을까?
물론 예의를 모르는 아이에게는 훈화라는 것이 필요하긴 하다.
하지만 저 아이는 지금 방금 길고 치열했던 비무를 끝냈다. 이래서야 남궁벽 자신이 이겨봤자 지친 아이를 핍박했다는 그림밖에는 되지 않는다.
게다가 4년 전. 저 아이는 비록 상황이 여의치 않아 결착을 보지 못했으나 자신을 상대로 팽팽하게 승부를 이끌어갔었다. 만약 오늘 이런 상황에서 비슷한 꼴이 혹시라도 또 연출된다면······. 심지어 남궁 세가에서의 비무조차도 외부로 이야기가 흘러나갔거늘 이곳에서의 비무는 오죽 하겠는가.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도망, 아니 피한다는 느낌을 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자비를 베푸는 쪽은 검왕이자 무림맹주인 자신이어야 한다.
“종남의 아이가 미숙하다고는 하지만 어쨌거나 경지에 든 고수다. 그런 아이와 이리 긴 시간 비무를 벌이고 나와 또 비무를 하겠다고? 그래, 아직 젊은이의 혈기와 명성에 대한 욕망은 내 충분히 이해한다. 나 역시 먼 옛날, 그런 시절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어찌 강호 무림의 가장 큰 어른으로써 차륜전을 할 수 있겠느냐. 네가 정 강호에 이름을 떨치고 싶거들랑 이번 마교 토벌에나 참가하도록 하거라.”
-저, 저······.
남궁벽의 상상을 초월한 뻔뻔함에 파검이 할 말을 잃었다.
운호와의 싸움에서 개처럼 두들겨 맞고 굴욕적인 사과까지 했던 것이 불과 몇 년 전 이야기이거늘 뭐가 뭐 어째? 젊은 혈기? 명성에 대한 욕망?
-저 녀석 설마 벌써 노망이라도 난 건가?
그것은 검왕의 기묘한 정신세계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파검이 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추측이었다.
‘그랬다면 차라리 좋겠지요.’
운호의 시선이 혁리광과 모용준경을 스쳤다.
그 역시 검왕의 기묘한 정신세계를 공감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검왕이라는 인간이 지극히 이기주의적이며 동시에 주변의 시선에 극도로 신경을 쓰는 인간이라는 것 정도는 지금까지의 경험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의 의형인 남궁철의 말에 따르자면 검왕은 이미 이빨 빠진 호랑이다.
남궁 세가를 넘어 이제는 무림맹까지도 맹주인 남궁벽이 아닌 남궁강의 말을 따른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 혁리광과 모용준경의 반응을 보면 알다시피 그 명성만으로도 검왕은 충분히 토벌대에 해악을 끼칠 수 있는 존재다. 여기서 한 차례 꾹 눌러줄 필요가 있다.
-어쩔 생각이냐? 참으로 뻔뻔한 개소리이기는 하다만 명분으로 따지자면 또 마냥 무시할 수 없는 소리 아니냐. 애당초 비무라는 것이 강요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렇다면 저를 피한 걸 후회하게 만들어줘야지요.’
-후회하게 만든다고? 대체 어떻게?
운호가 뽑아들었던 파검을 납검하며 빙긋 웃었다.
“참으로 아쉽습니다. 맹주님의 걱정을 제 손으로 꼭 해소해드리고 싶었는데 말이지요. 하지만 역시 맹주님이십니다. 긴 싸움으로 제가 지친 것을 한눈에 알아보시다니 말이죠.”
“뭐 어려운 일도 아닌 것을.”
“저야 맹주님과 직접 검을 섞어 보는 영광을 꼭 경험하고 싶었습니다만, 역시 만전의 상태도 아닌데 맹주님의 가르침을 받는 것은 제 욕심이었겠지요. 게다가 맹주님의 말씀처럼 차륜전은 강호의 예도 아니고요. 하지만 무림에서 가장 중차대한 일들을 떠맡으신 맹주님께 심려를 끼쳐드리는 것도 영 도리가 아닌 듯하니······.”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것일까?
검왕은 저 어린놈이 이제 와서 정신을 차리고 어른을 똑바로 대접한다고 생각할만큼 말랑하지는 않았다. 무언가 나름대로 흉계를 꾸미고 있는 것이겠지. 하지만 저렇게 대놓고 그 속을 내비쳐서야.
“그런 의미에서 맹주님. 이건 어떻습니까? 여기 이분들은 최근에 저와 무공을 교류하는 분들인데 오늘도 마찬가지로 저와 무공을 교류하기 위하여 이 자리에 왔습니다. 허나 맹주님 말씀처럼 제가 좀 지쳤으니 오늘은 특별히 맹주님께서 이분들게 저를 대신해서 맹주님께 가르침을 받을 영광을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혁리광과 모용준경이 서로를 바라봤다.
여기서 갑자기 자신들과 맹주가 비무를 벌인다고?
‘우리가 증무 도사 대신 맹주님과?’
‘이건 역시 신검도 맹주님이 자신과 동격임을 인정하는 건가? 역시 극광오신의 한 자리는······.’
검왕의 주먹코가 벌름거렸다.
저 어린 도사 놈의 속셈은 뻔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걸린 상품이 너무 매력적이다.
극광오신.
최근 강호에 가장 크게 화제가 되는 이름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 한 자리로 가장 유력한 것은 저기 저 어린 녀석이고. 강호에서 명성이란 그 자체로 강력한 힘을 갖는다. 그가 알기로 지난 삼십 년을 통틀어 강호에 초절정 고수의 숫자는 쉰 명을 넘는다. 그들이 모두 일일이 실력을 비교하여 천무십칠성에 이름을 올렸을까?
천만에.
결국 극광오신도 마찬가지다.
출신입화경? 그래, 일반적인 초절정고수의 한계를 넘어선 경지. 하지만 그렇게 따지자면 검왕 자신도 내심 자신이 있다. 이십삼 년 전 처음 초절정의 경지에 올라 하늘의 별빛을 검에 담았던 시절과 지금을 비교하면 적어도 두셋은 동시에 상대할 만큼 큰 차이가 있다. 그 정도면 출신입화경이라는 말을 쓰는 것도 그리 나쁠 것은 없겠지.
검왕의 시선이 혁리광과 모용준경을 훑었다.
초절정 둘을 동시에 상대한다? 두 사람 모두 이제 오십 대에 불과하다. 사실 저기 저 녀석들처럼 이십대에 초절정에 오르는 것이 비정상적일뿐. 오십 대만 하더라도 충분히 빠른 나이다. 그리고 그 말을 바꿔 말하자면 저 두 녀석의 경지는 기껏해야 이십삼 년 전의 자신 수준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뭐, 저 어린 도사 놈도 그 정도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아마 도사 놈도 저 녀석들이 감히 나를 이길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을 터. 그저 실력의 간접비교를 하겠다는 속셈이겠지.
하지만 녀석은 한 가지를 크게 간과했다. 바로 나 검왕 남궁벽이 지난 사 년 사이, 기존의 나 자신을 크게 훌쩍 뛰어넘었다는 점이다.
“좋다. 강호의 젊은 후배들에게 가르침을 내리는 것도 선배 된 도리겠지. 긴 여정에 조금 피곤하기는 하지만, 잠시 손을 섞어주는 정도라면 얼마든지.”
검왕이 검을 뽑아 들었다.
완벽하게 정련된 보검이다.
“그러면 혁리 대협?”
“어, 어?”
“평생 선망하던 분께 무공을 지도받을 절호의 기회입니다.”
심지어 이대 일의 싸움도 아닌 일대 일의 싸움을?
검왕 남궁벽이 고개를 저었다.
“둘이 함께 덤벼도 좋다.”
천하에 누가 있어 초절정의 고수 둘이 함께 덤비라, 이야기 할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이야말로 출신입화경의 고수만이 보여줄 수 있는 위엄이 아닐까?
남궁벽이 자기 자신의 발언에 심히 만족했다. 하지만 그의 그런 발언에도 불구하고 그의 앞에 나선 것은 혁리광뿐이었다.
“괜찮으시다면 제가 먼저 가르침을 받고 싶습니다. 아버지께서 입이 닳도록 말씀하신 그 검을 꼭 견식해보고 싶어서요.”
“그래, 좋다. 네가 그토록 원한다면 안될 것도 없지.”
이대 일로 순식간에 꺾어버리는 것보다는 그림이 좋지 않겠지만, 압도적인 실력 차이로 가르침을 베푸는 그림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터.
“삼 초를 양보하마. 어디 마음껏 실력을 펼쳐보거라.”
“네, 그렇다면 양보하지 않겠습니다.”
혁리광이 무려 사십여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장원에 틀어박혀 무공을 닦기 시작하던 당시, 그의 사부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무공만 완성하면 어디 가서 무공 때문에 고개 숙일 일은 없을 거다.”
그리고 그렇게 완성한 무공을 들고 강호에 출두한 혁리광은 가장 먼저 싸웠던 천무십칠성 가운데 하나인 남천관일 단상목에게 벽을 느꼈었다. 물론 절대 못 넘겠다 싶은 암담한 벽은 아니었고, 그냥 나도 시간만 주어진다면 저렇게는 강해질 수 있겠다. 싶은 수준의 차이였다.
그리고 그다음 상대였던 굴불신마 영무결, 신검 백운호에게는 와, 이게 같은 사람인가? 싶은 수준의 압도적인 장벽을 느낄 수 있었다. 대체 사람이 어떻게 해야지 저렇게까지 강해질 수 있는 것일까?
어디 가서 무공 때문에 고개 숙일 일은 없을 거라던 무공을 들고 강호에 나섰건만 지금까지 전적은 3전 3패. 0할의 승률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혁리광은 기죽지 않았다.
애당초 상대들이 너무 나빴다. 천무십칠성이면 오랜 시간 강호의 최강자로 군림해오던 인물들이고, 극광오신이면 그런 천무십칠성이 별보다 빛난다며 스스로 패배를 자인한 인물들이다. 그런 이들에게 패배했다고 기가 죽을 이유는 없었다.
아니, 솔직히 말해 패배해봤자 본전이다.
어차피 쌓아둔 명성도 없으니 그냥 가진 것을 모조리 부딪히고 깨진다면 그것으로 됐다. 심지어 그와 같은 무명의 강호인에게는 패배조차 명성이 된다.
현묘한 보법.
혁리광의 오른손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출발하여 남궁벽의 어깨를 노렸다.
“제법!!”
그 공격 앞에서 남궁벽의 검날이 그것을 막아섰다. 하지만 어느새 방향을 튼 혁리광의 장심이 검날 대신 검면을 후려갈겼다.
크게 출렁이는 검날 사이로 혁리광의 왼주먹이 그의 복부를 노렸다.
이번에는 입에서 제법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만약 보통의 싸움이었다면 일단 여기서 몇 걸음을 물러났을 터. 하지만 후배에게 거창하게 삼초를 양보하겠다 이야기한 시점에서 그런 꼴사나운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후읍.
남궁의 검.
제왕검형(帝王劍形)이 모습을 드러냈다. 압도적인 공포가 의념의 사슬이 되어 초절정 고수의 손발을 묶는다. 그리고 그것으로 일순간 혁리광의 동작이 느려졌다. 남궁벽의 검두가 그의 왼주먹 손등을 후려쳤다.
혁리광의 몸이 크게 회전하여 그 힘을 흘려보낸다. 하지만 손등에 생겨난 붉은 자국이 그가 충격을 완전히 흘려내지 못했음을 증명했다. 그리고 그 회전을 그대로 살려 내려치는 기묘한 발차기. 그 각도가 예사롭지 않다. 앞서 가장 먼저 선보였던 장법과 흡사하다.
반고검(盤古劍).
젊은 나이에 초절정에 도달했던 고수가 넘어설 수 없는 천외천의 괴물을 목격했다.
그리하여 무공에 그 한계가 없음을 확신하였으니 자신이 목격한 것을 기초로 필멸에 불과한 인간의 검에 무한을 담으려 했다.
불가사의(不可思議)를 넘어 무량대수(無量大數)의 가능성을 품은 일검이다.
무한에 한없이 가까운. 그렇기에 인간이 인지할 수 있는 범위 밖에 존재하기에 그 두뇌가 그것을 인지하는 것조차 거부하는 그 일격이 혁리광을 향했다. 그것은 무한을 이해할 수 없는 사람에게는 과정이 생략돼버리는, 그저 원인과 결과만이 존재하는 무적에 한없이 가까운 일 검이었다.
-쯧, 참으로 변함없이 졸렬하구나.
삼 초를 양보하기로 했건만, 그딴 것은 신경 쓰지 않는 점이 참으로 검왕답다며 파검이 혀를 찼다.
‘그러니 더 가치 있는 장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그 인지할 수 없는 위험천만한 공격 앞에서. 혁리광의 몸은 뇌가 감각하고 인지하여 명령을 내리는 것보다 한 박자 빠르게 움직였다.
그것은 지난 두 달. 운호가 그토록 그의 몸에 새겨 넣은 그대로였다.
턱이 크게 돌아간 남궁벽이 무릎을 꿇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