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9화
결착(3)
“뭐? 검왕 어르신이?”
현무자가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다 다시 침상에 주저앉았다.
“윽······.”
전신의 진기가 억지로 뽑혀 나간 후유증은 실로 막대했다. 게다가 그의 경우 성취가 깊었던 만큼 그것을 복구하기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는데 이미 자소단을 하나 복용했음에도 내상은 다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다행인 점은 순간적인 진기의 공백으로 막혀있던 노화가 촉진되어 회생 불가에 가까운 결과를 초래한 일대 제자들과 달리 그는 아직 오십 대의 비교적 젊은 나이였다는 점 정도였다.
“장문 사백!! 괜찮으십니까?”
“괜찮다.”
가슴을 움켜쥐고 신음하던 그가 자신을 향해 서둘러 달려오는 제자에게 휘휘 손을 내저었다.
“죄송합니다. 현재 본문이 손님을 받지 않는 것은 알고 있지만 무림맹이라면 본문의 상황을 대충 알고 있을뿐더러 손님이 손님인지라······.”
“아니다. 잘했다. 그분 성정을 생각하면 문전박대를 하는 것은 가당치도 않은 일이지. 게다가 청우, 청공 사조님들과도 연이 깊은 분이니······. 일단 안으로 모시거라. 그리고 산에 계신 청허 사조님께도 기별을 하도록 하고.”
“네!!”
산문 밖에서 한가롭게 화산을 올려다보던 검왕 남궁벽이 한순간 눈썹을 치켜떴다.
“흐음······.”
초절정?
그 기운의 크기가 대단한 누군가가 매우 빠른 속도로 이곳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심지어 그것도 하나가 아닌 둘씩이나. 남궁벽의 오른손이 자신도 모르게 검병을 향해 움찔했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억지로 그것을 참아냈다.
이곳은 화산이다.
게다가 화산의 젊은 제자들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상황이다. 지금은 경박한 모습보다 최대한 어른의 여유를 보여줌이 옳다. 무엇보다 여기에 적이 갑자기 나타날리도 만무하고 말이다.
그리고 그런 그의 생각처럼 갑자기 나타난 고수들은 적이 아니었다.
“어? 검왕 어르신? 어르신이 여긴 대체 어떻게?”
“뭐라고? 검왕? 검왕이라면 그 무림 맹주님? 무림 맹주님이 갑자기 여긴 왜?”
어딘가 낯이 익은 구 척에 가까운 키의 거한. 그리고 실로 잘생겼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 중년의 사내였다.
“모용준경?”“네, 저 준경입니다. 참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어르신.”
“허허, 그래. 참으로 오래간만이로구나. 네 애비는 잘 있고?”
“네, 아직 정정하십니다.”
“하긴, 아들이 경지에 올랐으니 복잡한 문제들도 다 해결이 됐을 테고 정정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준경이 네가 참으로 큰 효도를 했다. 그보다 이쪽은 누구더냐?”
“아, 화산에 와서 알게 된 친구인데 혁리광이라고 합니다. 광아 인사해라. 검왕 어르신이다.”
혁리광이 남궁벽에게 공수(拱手)가 아닌 국궁(鞠躬)의 예를 갖췄다. 꾸벅 숙인 혁리광의 모습에 남궁벽의 기분이 매우 좋아졌다. 어린 녀석이 고강한 무공에도 불구하고 예절이 아주 바르다.
“혁리광입니다.”
“어디보자. 혁리 씨라면······. 아, 단양에 그 혁리 세가?”
“네, 현재 세가의 가주로 계신 혁리 백자 쓰시는 분이 제 부친 되십니다.”
“아아, 혁리백. 기억이 어렴풋이 나는 것 같구나. 참으로 헌앙한 인물이었지. 얼굴은 부친께 물려받구나.”
“기억하시는군요!! 아버지께서는 젊은 시절의 무림행을 종종 이야기해주곤 하셨는데 그 가운데 검왕 어르신을 직접 뵀던 것을 항상 말씀하셨었습니다.”
“그래, 기억하다마다. 아마 1차 강소 대전 때였지?”
“네, 어르신께서 당시 이름 높던 낭인인 파검을 칠 합 만에 꺾으시고 자비롭게 그를 용서하셨죠. 당시 아버지께서 어르신의 바로 곁에 계셨다고 하시더군요.”
그래, 그랬더랬다.
당시 아직 검왕이라 이름 붙지 않았던 남궁세가의 젊은 소가주는 세가의 역사를 통틀어 손에 꼽을 만큼 대단한 속도로 무공을 성취해나가던 천재였다. 그리고 강호행을 하던 중 우연한 기회에 싸움에 휘말렸고 제법 쓸만한 낭인 하나를 우연히 목격했었다.
당시 그는 삼국지에 상당히 심취해있었고 하필 그 전날 매화자에게 들었던 부분이 제갈량의 칠종칠금(七縱七擒)이었다. 그것은 참으로 그의 인생을 통틀어 손에 꼽을만한 실수였다.
거기서 만약 쓸만한 수하 하나 얻겠다며 이상한 선택을 하는 대신 자비 없이 파검 그 녀석의 목을 베었더라면. 어쩌면 그의 인생은 지금보다 훨씬 더 괜찮지 않았을까?
쯧, 괜히 쓸데없는 생각을 떠오르게 하다니. 근데 설마 혹시 이거 굳이 파검을 들먹여 나를 모욕하는 것인가?
남궁벽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다. 옷 입은 꼬라지부터 말하는 것까지 대충 봐도 지방 촌구석 무지렁이에 불과한 녀석이다. 그런 깊은 생각을 하기에는 지능부터 부족할 것이 틀림없다. 그저 무림 맹주를 앞에 두고 긴장되어 아무거나 입에서 나오는 대로 내뱉는 것이겠지.
“하하······. 그나저나 너희가 지금까지 화산에 머무르고 있는 것을 보니 역시 이번 마교 토벌단에 이름을 올리고자 하는 것이겠구나.”
“네? 마교 토벌단이라고 하심은?”
“아아, 혁리세가라면 모를 수도 있겠구나. 아직 중소문파까지는 제대로 이야기가 전달이 안 됐으니까. 지금 구대문파와 칠대세가가 합종(合從)하여 마교의 본산을 치기로 얼추 합의가 끝났다. 다만 화산의 경우 봉문에 가까운 상태인지라 겸사겸사 내가 직접 그것을 살피기 위하여 온 것이다.”
“아!! 그러셨군요.”
“혹시 마교 토벌에 이름을 올리고자 하는 마음이 크거든 따로 나를 찾아와도 좋다. 준경이야 모용 세가의 무사들을 이끌 테지만 자네는 중소문파 출신이니 그쪽에 따로 편성이 될 터인데 아무래도 공을 세우기에는 그곳보다 맹주 직속이 훨씬 낫지 않겠는가?”
이것도 무지렁이에게는 과분한 은혜겠으나 그래도 그런 촌구석에서 저만한 성취를 얻었다면 그 나름대로 은혜를 베풀어둘 필요는 있겠지.
그리고 혁리광이 뭐라 답을 하기 직전.
“응?”
저 먼 하늘에서부터 터무니없는 속도로 날아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검? 검선?”
한 자루의 두툼한 장검.
역시 익숙한 모양새였다. 불과 십여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와 함께 천무십칠성으로 꼽히던 종남의 검선이 바로 저런 검을 타고 날아다녔으니까.
하지만 지금 날아오는 검에는 아무도 타고 있지 않았다. 그저 한 자루 검일뿐.
“아, 종화 소저입니다.”
“종화?”
“네, 그러니까 태을 검선 어르신의 사손인 벽운 도사의 제자입니다.”
한층 더 가까워진 장검에 희미하게 겹쳐진 누군가가 보였다.
촌스럽게 생긴 여자아이다. 저 아이가 종화라는 그 아이인가? 맙소사다. 여러 소문 가운데 가장 믿기 힘든 소문이었는데 그게 사실이었다니.
대체 강호가 어떻게 돌아가려고!!
얼마 전 백운호 그 녀석이 초절정에 오른 것도 터무니 없는 사건이었는데 어떻게 또다시 이십대에 초절정 고수가 나타나다니. 혹시라도 강호에 무언가 이상한 약이라도 도는 것이 아닐까? 그게 아니고서야 어찌······.
“맹주님을 뵙습니다.”
“어험······. 그래 종화라고? 태을 노 선배의 태사손이라고 하니 나에게도 그쯤 되는 배분이겠구나. 소문에 듣기로는 네 사부도 화산에 함께 있다고 들었는데?”
“사부께서는 아직 거동이 완전치 않으셔서 여기까지 마중 나오지는 못하셨습니다.”
“그래? 참 많이 다친 모양이로구나. 여기까지 걸어 나오기도 힘든 지경이라니 말이다.”
한순간에 산문 앞에 모인 네 명의 초절정 고수.
혁리광이 은근슬쩍 종화에게 다가갔다.
“종 소저, 헌데 다른 분들은 혹시?”
“아, 두 분은 지금 한참 무공을 시험하시는 중입니다.”
“다른 분?”
남궁벽의 질문에 모용준경이 대신 답했다.
“조왕 전하와 청해 대장군부에 종 장군님께서도 지금 여기 머무르고 계십니다.”
“황실의 고수들이? 허면 그들도 경지에 이르렀더냐.”
“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들리는 풍문이 대부분 사실이었구나. 허면 신검에 대한 소문도 사실이더냐? 그 극광오신이라는 것도?”
검왕의 질문에 세 명의 초절정 고수가 모두 잠시 침묵했다.
기이한 정적.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이 셋 모두 신검에게 당적할 수 없었구나.
하긴,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우연이라고는 해도 운호는 벌써 사 년 전에 자신과 동수를 이뤘다. 그 사이에 더 발전했다면 이런 풋 비린내 나는 녀석들 정도는 가볍게 상대할 수 있었겠지.
대충 느껴지는 기운만 봐서는 검왕 자신도 여기 이 녀석들 가운데 둘 정도는 동시에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고작 그런 것가지고 초절정 고수 몇을 동시에 상대했느니 뭐니 하면서 극광오신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이다니.
그리고 그 기이한 정적을 깨트린 것은 저 멀리서 헐레벌떡 뛰어온 화산의 어린 제자였다.
“맹주 어르신!! 장문께서 장문실로 모시라고 하십니다.”
“아, 화산의 장문인이 나를 찾는구나. 그러면 자세한 이야기는 후에 나누도록 하고. 혁리가의 그대는 나의 호의를 너무 부담스러워하지 말거라. 그저 네 부친과의 작은 인연이 복으로 돌아왔다고 생각하면 그만이니.”
대답은 듣지 않았다.
그저 여기서는 멋지게 산을 오르면 그만일 뿐.
검왕이 걸음을 뗐다. 경박하지 않게, 무게감 있게. 그리고 남은 사람들이 충분히 감탄할 수 있을 만큼 심오한 무리를 담아서.
“어르신!!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그리고 남은 것은 몇 걸음에 저 멀리까지 사라진 검왕을 향해 소리 지르는 화산의 불쌍한 어린 제자였다.
“가주님, 광서에서 소식이 왔습니다!!”
“대장군부에서 벌써?”
남궁강이 고개를 갸웃했다.
광서대장군부와 접촉을 지시한 것이 바로 어제였다. 기별이 오가는 데만도 못해도 사나흘은 걸릴 거리이거늘 대체 어떻게 하루 만에? 게다가 지금 광서대장군부의 상황은 말이 아닐 터인데.
“대장군부가 아닙니다.”
“대장군부가 아니라면? 광서에서 대체 무슨 소식이?”
“개방입니다.”
“개방? 개방이 광서는 왜?”“걸왕께서 광서에 계셨다고 합니다.”
그 순간 남궁강의 머릿속에 몇 가지 가능성이 스쳐 지나갔다.
“맙소사, 마교 대제사장의 부상에 대한 소식이 흘러나간 경로가 그쪽이로구나. 허면 혹시 걸왕께서 광서 대장군부에 잡혀 계시다더냐?”
만약 그의 생각대로 마교 대제사장의 부상 소식이 걸왕을 통해 전달됐고, 궁익이 그 정보를 바탕으로 마교에 그만한 전력을 투사했다면? 그 결과가 지금처럼 최악으로 끝난 이상 대장군부에서 걸왕의 신병을 구속 중이라고 해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네, 네? 아뇨. 아닙니다. 그저 며칠 전에 광서에 있던 한상의 지부에 찾아오셨는데 긴하게 전할 이야기가 있다는 말만 남기고 쓰러지셨다고······. 상세가 심상치 않아 보였지만 부득불 가주님을 만나야 한다고 이야기하셔서 의원과 함께 지금 이곳을 향해 올라오고 있으시다고 합니다.”
“나를?”
대체 무슨 일일까?
그리고 어째서 걸왕은 다른 개방의 방도들이 있는 개방 분타가 아니라 홀로 한상의 지부를 찾아온 것일까?
“뭐, 그거야 만나보면 알 일이겠지. 걸왕 어르신이 그러면 지금 어디쯤 오셨다고 하더냐.”
“나흘 전에 출발하셨다고 하니 지금쯤이면 장강을 거슬러 올라오고 계실 듯합니다.”
“알겠다. 걸왕께서 도착하시면 도착하시는 대로 지체 없이 나에게 모시고 오도록 해라.”
“네.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