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8화
결착(2)
“아니, 이보시오. 남궁 가주. 당가에서 생산하는 해독단이 한 해에 고작 팔백 환이 채 되지 않아요. 그리고 그 가운데서 우리가 자체적으로 사용하는 물량이 오백 환 가량. 헌데 갑자기 삼천 환을 납품하라니 그 수량이면 우리가 십 년을 모아야 하는 비축 분량입니다. 게다가 저희 해독단이 무슨 만병통치약도 아니고······.”
“당 가주님. 제가 어찌 당가의 어려움을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마교의 악적들 가운데는 독을 쓰는 녀석들이 부지기수입니다. 게다가 십만 대산은 중원과 비교해서 매우 덥고 수풀이 우거져 독충이 넘쳐나지 않습니까.”
“아니, 그거야 독에 맞게 약을 먹으면 될 일이 아닙니까.”
“천하에 그게 가능한 이가 몇이나 있겠습니까, 당가의 녹의 무사 정도는 돼야 가능한 일이지요.”
“아니, 뭐 독을 증상에 맞게 먹는데 녹의까지 필요하답니까. 그 정도는 백의만 벗어도 다들 아는 수준입니다.”
남궁강이 고개를 저었다.
“그거야 책상에서야 그렇겠죠. 하지만 실전에서는 또 다르지 않겠습니까. 사람들이 실제로 죽어 나가는 혼란 속에서 아직 경험 없는 아이들이 적응하기란 쉽지 않죠.”
“아니, 아무리 그래도 고작 천 명 남짓 되는 인원이 해독단 삼천 환이라니요.”
“해독단 한 알 먹었다고 이후로 만독불침이 되는 건 아니잖습니까. 뭐 그런 의미에서는 피독주 천 개를 빌려주신다면 더 고맙겠군요.”
당병효가 한숨을 내쉬었다.
젠장. 이 상황에서 갑자기 피독주라니. 설마 남궁 가주께서 강호의 그런 뜬소문을 진짜로 믿느냐며 의뭉을 떨기에 남궁 강이라는 이름이 가진 무게감이 너무 무겁다. 확실하다. 이 작자 가문에서 얼마 전에 진짜 피독주를 완성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해독단은 정말로 재고를 탈탈 털어 넣어도 천이백 환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대신 녹의를 사십. 그리고 흑의를 셋 보내 드리죠.”
“고맙습니다. 무림맹은 당가의 성의를 잊지 않을겁니다.”
남궁강이 가볍게 목례를 했다.
고작 그 인사 한 번에 당가의 전력 삼분지 일이 뽑혀나갔으니 그것 참 비싼 인사다. 당병효가 등을 돌려 남궁강의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후······. 힘들군.”
남궁강이 자신의 눈두덩이를 꾸욱 눌렀다.
칠대세가는 이제 다 끝났다. 첨예한 이권이 갈리는 문제를 고작 스무날 만에 끝내는 것은 사실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건 그저 기존에 미리 깔아둔 것들이 있기에 가능한 조율이었다.
구대문파를 설득하는 일과 칠대세가를 설득하는 일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어려운가. 보통은 구대문파 쪽이다.
칠대세가의 경우 보통은 손익의 균형만 잘 맞추면 해결이 된다. 특히나 거래의 상대방이 자신과 비슷한 힘을 지녔거나 그보다 더 강하면 더 쉽게 해결이 된다. 하지만 구대문파는 조금 다르다. 일의 시행부터 그 과정까지 그놈의 명분, 명분, 명분. 심지어 그렇다고 실익을 안 따지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아주 오랜 기간 갑의 자리에서 살아온 탓인지 현재 자신들의 성세가 어느 위치인지 감도 영 잡지 못한다. 그야말로 거래의 대상으로는 최악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구대문파의 설득 역시 칠대세가를 설득 하는 것만큼이나 쉬웠다.
마교의 척살이라는 대의명분이 너무 훌륭했기 때문인가? 그래, 물론 그것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부분은 바로 ‘공포’였다.
전통적으로 섬서는 ‘중원’의 영역이었다.
주제국의 황도인 풍(豊)이 섬서성의 영역이었고 최초의 황제인 진시황의 수도였던 함양(咸陽)이 서안부성 인근이었으며 이후 한 제국부터 당 제국까지 무려 열세 개의 왕조가 이곳을 수도로 삼았다.
헌데 그런 섬서성의 한 가운데. 그것도 구대문파 가운데 가장 강력한 힘을 자랑하는 화산파가 마교의 침공을 받아 문파를 대표하는 고수와 장문인이 사망. 다수의 제자들이 재기 불능의 상처를 입었다. 심지어 그 당시에 종남에서 방문한 초절정 고수 둘과 다수의 절정 고수. 그리고 황실을 대표하는 초절정 고수가 손을 보탰음에도 그러한 피해다.
무한에서의 그것이 마교의 터무니없는 힘을 증명했다면 이번 일은 그 힘이 특정 문파로 향했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올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중원의 복판. 강호 최강의 문파가 저리 반토막이 났다. 만약 그 힘이 자기 문파로 향한다면?
“이제 남은 것은 광서의 대장군부인가······.”
본래 대월국과 연이 닿아 있던 것은 소림의 초절정 고수였던 대력금강 공조 대사. 그리고 광서의 대장군부와 연이 닿아 있던 것은 팽가의 단악도 팽불청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지난번 무한 혈사로 사망했고 덕분에 남방과의 연결은 굉장한 난항을 겪었더랬다. 그리고 이후로 약 십 년. 여전히 대월국과의 관계는 대력금강 공조 대사가 살아있던 시절만큼을 회복할 수 없었다. 하지만 광서의 대장군부는 조금 달랐다. 어쨌거나 같은 국가였고 그 말인즉 인맥과 학맥 각종 혈연과 지연 등을 통하여 관계를 연결할 방법이 존재한다는 의미다.
“가주님!!!”
“무슨 소란이냐.”
“큰일!! 큰일입니다!!”
이제 사십 중반 즈음 됐을까?
말간 피부에 청수한 외모. 그야말로 잘생긴 선비의 표본과 같은 인상의 사내가 그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허겁지겁 남궁강의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허전한 한쪽 어깨. 스스로를 칠대세가의 지낭이라 칭하던 제갈첨이었다.
“남병에 커다란 변고가 생겼다고 합니다.”
“아니 갑자기 변고라니!! 그게 무슨 소리냐!!”
남궁강이 깜짝 놀라 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소상히, 소상히 말해 보거라.”
“그게 그러니까······.”
제갈첨이 자신에게 전해진 소식들을 남궁강에게 전했다.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남궁강의 얼굴이 점점 새하얗게 질려갔다.
“좌장군 휘하 남로군 팔백이 전멸이라고?”
좌장군 궁익이 이끄는 남로군은 보통 병사들이 아니다.
남방의 마교와 최전선에서 싸움을 벌여온 정예군으로 평균적으로 그 무공이 일류에 근접했으며 위관급으로 올라가면 절정의 고수라고 봐야 한다. 즉, 궁익과 남로군 팔백이면 어지간한 대문파 하나 정도는 충분히 자웅을 결할만했다.
“허면 적들의 피해는? 적들의 피해가 어느 정도인지도 알려 졌느냐!!”
“그것이······. 미미하다고 합니다.”
“미미? 미미하다고? 아니, 대체 어떻게!!”
설사 검왕 남궁벽이 이끄는 남궁 세가의 정예가 전부 달려든다고 해도 궁익이 이끄는 남로군을 상대로 승리할 수 있을까? 자신할 수 없다. 헌데 그런 병력을 상대로 피해가 미미하다고?
“터무니없는 고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터무니없는 고수? 마교의 대제사장인가? 하지만 분명 그는 부상을!! 아니, 그 이전에 대체 왜 남로군이 마교와 싸움을 붙은 것인가!! 그것도 백기 대장군 없이 좌장군 단독으로!! 분명 무한에서의 사건 이후 그들도 마교와 단독으로 벌이는 전면전은 자제해왔을 터인데.”
“그게······. 그들 역시 대제사장의 부상 소식을 듣고 이번이 기회라고 봤던 것 같습니다.”
“허······.”
남궁강이 폐부 깊숙한 곳에서 한숨을 내쉬었다.
궁익이 대체 누구던가. 최근 십이지신에 이름을 올린 초절정의 고수로 대장군 백기의 뒤를 이을 것이라 강하게 추측되는 초고수다. 원정군이 꾸려졌더라면 아주 든든한 전력이 되어줬을 그가 이렇게 허망하게 사라지다니.
무엇보다 이렇게 된 이상 광서대장군부가 어떻게 나올지를 예측하기 힘들어졌다. 물론 백기 개인만 생각한다면 아끼던 제자의 죽음에 크게 분노할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 분노가 대장군부의 존망과 나란히 저울에 올라갔을 때도 계속 이어질 수 있을까? 확신하기 힘들다.
“당장 백기 대장군과의 대담을 준비해주게. 아, 그리고 대체 마교 대제사장의 부상은 어떤 경로로 흘러나간 것인지 철저하게 조사하도록 하고.”
“알겠습니다.”
“후······. 도무지 마음대로 풀리는 일이 없군. 참, 철이는 지금 뭐하고 있는가?”
“처남이라면 지금 혈마당의 사람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혈마당?”
“그들이 대완마를 바탕으로 하여 최근에 늪지에 강한 품종의 말을 개량했다고 합니다.”
“알겠네. 혹시라도 미숙한 부분이 있다면 자네가 좀 도와주게나.”
“네, 최대한 신경쓰도록 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대체 또 무슨 소식일까.
남궁강이 피곤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리고?”
“맹주님께서 화산으로 떠나셨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하긴······. 그 성정에 오래 참긴 하셨지.”
“괜찮겠습니까?”
“걱정할 것 없다네. 어차피 거기에는 조왕 전하도 계시니까. 차라리 잘 됐다고 볼 수 있지. 괜히 원정군 꾸려지고 안에서 힘싸움 하는 것보다 여기서 제대로 정리를 해두는 편이 나을 테니까.”
끝없이 이어지는 회의와 회의.
그리고 문파를 대표하는 이들의 개인적인 만남들. 검왕 남궁벽은 그 모든 것들에서 철저하게 소외되어 있었다. 사실 그 성정을 생각할 때 이십 일이나 참은 것도 대단한 일이다.
어쩌면 그 대단한 참을성의 근간에는 들려오는 운호에 대한 소문들이 마냥 거짓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때와는 다를 것이다.”
하지만 지난 삼 년.
검왕 남궁벽 역시 많은 발전이 있었다. 초절정 고수의 실력이 정체되는 것은 그 위치가 무공의 완성이라는 생각 때문인 경우가 많다. 검왕 남궁벽은 이제 칠십 대 중반으로 천무십칠성 가운데 비교적 젊은 축에 속했다. 그런 그가 한참이나 어린 아이에게 패배하고 몇 년 간 칼을 갈았다. 성장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큼지막한 코에 잘생긴 얼굴. 한 자루 검을 품에 안고 휘적휘적 산을 오르는 그의 풍모가 실로 전설에 나오는 검선을 연상케 했다.
“누구십니까?”
“장문께 가서 전하게. 화산의 변고를 위로하러 무림맹의 맹주가 직접 찾아왔노라고.”
무림맹의 맹주.
번을 서던 어린 제자가 화들짝 놀랐다. 그와 함께 서 있던 조금 나이든 제자 역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무림맹의 맹주가 대체 누구던가.
천무십칠성의 일좌. 검왕 남궁벽이다.
비록 그가 운호에게 패배했다고는 하지만 사실 그 사실은 아는 사람들만이 알음알음 알 뿐이지 강호에 널리 퍼지지도 않았다. 그리고 화산의 제자에게 천무십칠성은 곧 청무진인이었다.
게다가 청공과 청우 그리고 청허까지.
화산에는 초절정에 다다른 고수가 셋이나 더 있었건만 천무십칠성에 이름을 올린 것은 오직 청무진인뿐이다. 차라리 다른 초절정의 고수를 못봤으면 모르겠으나 최근 청허를 몇 차례나 직접 목격했던 만큼 그런 청허보다 명성이 더 높은 검왕이라는 이름 앞에 놀라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또한, 무림 맹주.
그 이름값은 어떠한가.
현재 화산은 손님을 받지 않는다는 말은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산문을 지키던 두 제자 가운데 하나가 나는듯한 속도로 본산을 향해 달려갔다. 그 뒷모습에 검왕이 짐짓 자신의 수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경공의 성취가 훌륭하군. 과연 화산이로다.”
“과······, 과찬이십니다!!”
“허허, 아니네. 아니야. 내 청공 형님과 청우 형님 생전에 화산을 와야지, 와야지 하면서도 한 번을 들르지 못했는데. 이런 기회에 오게 되어 그저 형님들께 미안할 따름이야.”
그윽한 눈빛으로 화산을 올려다보는 그 풍모란.
안 그래도 검왕이라는 이름에 압도되어 있던 어린 제자가 존경심 가득한 눈빛을 보내왔다.
그래, 바로 이거다. 강호인이라면 응당 자신에게 보내야 하는 시선.
검왕 남궁벽이 실로 만족스럽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