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6화
화산검(21)
파검은 이제 운호의 무공에 감 놔라, 대추 놔라를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역시 비록 지금 기억에는 없다고 하지만 등선까지 성공한 무인의 백(魄)이었으며 그만한 자격을 갖추기까지의 기억을 품고 있는 존재였다.
그렇기에 그는 지금 운호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음을 알 수 있었다.
-역시······, 하나가 부족하구나.
“네······. 그러네요.”
운호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금 이 자리에 처음과 같이 선 것은 오직 그 자신뿐이었다. 다섯의 초절정 고수 모두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운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실로 터무니없는 싸움이었다.
차라리 다섯 명의 초절정 고수를 힘으로 물리쳤다든지, 절세의 초식으로 단번에 날려버렸다면 충격은 훨씬 덜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기에 다섯 초절정 고수가 받은 정신적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을만큼 거대했다.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다.
하지만 고작 1장 남짓한 범위에서 움직이는 운호를 아무도 건드릴 수 없었다.
그는 마치 스승이 어린 제자들을 지도하는 것처럼 때론 몸을 돌려 피하고, 때론 그들의 공격을 툭툭 건드려 빗나가게 만들며 그 자리에서 초절정 고수 다섯의 합공을 무려 반 시진 가깝게 받아냈다.
마지막까지 발악한 것은 조왕 주고수였다.
그는 빛의 폭풍우와 같은 검강을 휘둘러 공간 자체를 파괴하려 했지만, 운호는 그것을 너무 쉽게 비껴냈다. 차라리 그것이 단순히 운호의 힘이 훨씬 거대했기에 벌어진 일이었다면 그는 지금처럼 절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운호는 마치 그의 검술 자체에 허점이 있다는 것처럼 매우 적은 힘으로 매우 효율적이게 그 일격을 비껴냈다.
그렇게 모든 힘을 쏟아낸 다섯명의 초절정 고수 사이에서 운호는 고민했다.
어째서 하나인가.
내가 놓친 것이 있었나?
혹시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검술 가운데 무엇인가가 일곱 번째 검술이었고 이 검술이 여덟 번째인 건 아니었을까?
“신검!! 방금 이건 대체 뭐였지?”
가장 먼저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혁리광이 이글이글 불타는 눈동자로 물었다. 다른 초절정 고수들의 시선이 그 목소리를 따라 운호에게 틀어박혔다.
-서로 다른 것을 하나로 엮어냈더니 하늘과 땅이 온통 너의 것이었다. 그러니 이 검술의 이름은 건곤(乾坤)이라 함이 마땅치 않겠느냐.
“건곤검(乾坤劍). 이 검술의 이름은 건곤검이라고 합니다.”
“건곤검이라······. 실로 대단한 절학이었다.”
혁리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다시는 상대하고 싶지 않은 무서운 검술이었다. 꿈에서 다시 볼까 두렵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아마도 여기서 그냥 모든 것을 포기하고 외면했을 것이다.
하지만 혁리광은 무려 40년을 홀로 수련하고 강호에 출두한 괴인이었다. 그가 운호를 향해 소리쳤다.
“하지만 내일은 다를 것이다!!”
그 큰소리에 모용준경 역시 쓰게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뭐······. 그렇다고 하는군. 증무 도사 그러면 내일 같은 시간에 보세나.”
종자명은 언제나 그렇듯 아무 말 없이 사라졌다. 종화 또한 한동안 운호를 빤히 바라보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등을 돌려 사라졌다.
그리고 마지막.
주고수가 물었다.
“증무 도사······. 대체 무엇이 문제였나.”
주고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오늘 마지막 순간 자신이 휘두른 그 일 검에는 그야말로 경천동지할만한 위력이 담겨 있었다. 그것은 그가 살아오면서 휘두른 모든 검 가운데 가장 강력한 검이었으며 지금까지 다섯 명의 초절정 고수와 운호가 몇 차례나 비무를 벌이는 가운데서 나온 모든 공격 가운데 가장 강력한 공격이었다.
헌데 그런 공격이 이토록 허망하게 막히다니.
운호가 방긋 웃었다.
“염치없는 부탁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네. 하지만 부디 가르침을 주게나.”
조왕 주고수가 고개를 숙였다. 천하에서 가장 존귀한 피를 타고 태어나 그것에 걸맞은 자부심을 안고 살아온 그가 고작 도사에게 고개를 숙이다니. 만약 그를 조금이라도 아는 이에게 지금 광경을 설명했다면 백이면 백 미쳤거나, 헛것을 봤다 말했을 것이다.
“조왕께서는 화산파의 역사에 대해 혹시 아십니까?”
“화산파의 역사?”
무공에 대한 가르침을 달라고 했더니 갑자기 이게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리인가.
운호가 말을 이어갔다.
“아주 오래전부터 화산은 노자께 직접 가르침을 받았던 관윤자 윤회 선생 이후 수많은 도관들이 자신의 가르침을 전하며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화산이 지금의 화산파로 뭉친 것은 불과 오백 년 남짓밖에 되지 않습니다. 오백 년 전 진단노조께서는 당시 난립하던 화산의 도관을 하나로 뭉쳤습니다. 그 가운데는 제대로 된 도관도 많았지만 몇몇은 실로 혹세무민이라는 말이 어울릴 만큼 엉망이 곳도 있었지요. 아마도 진단노조께서 화산의 도관을 하나로 한 데는 화산이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는 그러한 사이비들 때문이었으리라 추측됩니다.”
“그렇군. 참으로 훌륭한 분이었구만. 헌데 갑자기 화산의 역사는 왜?”
“진단노조께서 화산을 일통하던 당시 화산에는 진단노조에 버금가는 고수가 셋이 있었습니다. 한분 한분은 진단노조에 비할 바가 아니었지만 세분 모두 힘을 합치면 충분히 그 통합을 거부할 수도 있었지요.”
“사이비를 몰아내고자 하는 진단노조의 대의에 동감했기에 참석을 했나보군.”
“아닙니다. 그랬더라면 참으로 아름다운 이야기였을 터인데, 사실은 그보다 훨씬 현실적인 이유였죠. 세금이었습니다.”
“세금? 그러니까 나라에 내는 세금?”
“네, 당시 진단 노조께서는 송태조께 커다란 가르침을 전했고 그에 감화된 송태조께서는 화산에 영구적인 면세를 약속하셨습니다. 이처럼 화산의 도사가 황실의 귀인께 가르침을 전하는 것은 아주 오래 전부터 있어온 일이지요.”
“허면 자네가 나에게 가르침을 주는 것 역시 아무 문제가 없겠구만. 아, 그리고 보니 송태조께서는 가르침을 받고 면세를 약속하셨다고 했었지. 혹시 지금 화산에 면세권이 위험한가? 아니, 그럴 리가 없을 텐데.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화산의 면세권을 박탈하는 것은 송제국의 계승을 포기하는 일이 될 터이니······.”
“화산의 면세권은 안전합니다. 다만 위험한 것은 화산의 존립 그 자체이지요.”
“화산의 존립? 설마 그때 그 마교의 작당들 때문에 하는 이야기인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자네가 있는 이상······.”
“지금이야 그렇겠지요. 하지만 그 마교의 악적은 지금 화산에 있는 모든 이들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이 땅에 남아 화산을 지우려 할 것입니다.”
주고수가 운호의 말을 확실히 알아들었다. 비록 주변에서는 그가 안하무인으로 살아간다고 생각하지만, 황실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그만한 눈치 없이 어찌 살아올 수 있었을까.
“북경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네. 비록 내가 황제의 숙부이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어려운 부분이 있지. 황실 최고의 고수이자 강력한 계승권을 지녔다는 것은 그런 것이거든.”
“어차피 마교는 저 북쪽이 아닌 남쪽에 있습니다.”
“뭐, 그 정도라면······. 광서에 백기 대장군이라면 내가 신세를 베풀어 둔 것이 있으니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걸세.”
“감사합니다.”
“자자, 알았으니 이제 내 무공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나 말해주게. 얼른!!”
운호가 말했다.
“귤화위지(橘化爲枳)의 고사를 아십니까?”
“귤화위지? 강남의 귤이 강북에 가면 탱자가 된다는 말 아닌가. 잠깐······. 자네 설마? 중요한 것은 무공이 아니라 개인의 재능이라는 말을 하려는 건가?”
주고수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한참동안 빙빙 이야기를 돌리더니 결국 하는 이야기가 귤화위지라니. 자신을 농락하는 것이 아니라면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이야기다.
당장에라도 폭발할 것 같은 주고수를 바라보며 운호가 부드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비슷하지만 다릅니다. 강남의 귤이 강북에 가서 탱자가 되는 것은 강북 땅의 잘못이 아닙니다. 그저 귤이 강북에 어울리지 않는 식물이기 때문이지요.”
“······. 만승지검이······. 무형 검강이 나와 맞지 않는 무공이라는 이야기인가?”
“그 역시 비슷하지만 다릅니다. 만승지검도 무형검강도 천고의 절학입니다. 태조황제의 무공이 하늘에 닿았던 것을 대체 누가 부정하겠습니까. 그리고 왕야 역시 그것을 통하여 초절정에 올랐으니 그 무공이 몸에 맞지 않는 옷이라는 것 역시 틀린 말이겠지요. 하지만 절정이 무엇이며 초절정은 또 무엇입니까.”
“유사 이래 지금까지 있었던 사람 가운데 대체 누가 완전히 같은 사람이겠습니까. 헌데 왕야께서는 초월에 손을 뻗으시고는 그것이 앞서 걸었던 태조 폐하와 완전히 같기만을 바라고 계시니 그것이야말로 강북에 귤을 심고 왜 강남에서 본 것과 같이 탐스럽지 않으냐 따지는 격이지요.”
“허면 자네의 말은?”
“만승지검과 무형검강은 전하를 지금 그 위치까지 끌어왔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그것들이 이끄는 방향이 아닌, 그것들을 부려 전하가 가고자 하는 곳으로 가셔야겠지요.”
늙은 거지의 콧구멍이 쉴새 없이 벌름거렸다.
진한 향기가 저 근방을 맴돌고 있었다. 하지만 길은커녕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허허벌판뿐이다.
대체 어떻게?
호기심이 고개를 치켜 들었다.
그의 감각에는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다. 슬쩍 가서 살펴볼까?
아니, 아니다.
만약 정말로 마교의 대제사장의 행적이 딱 저기까지라면 저곳이야말로 지금까지 숨겨졌던 마교의 비밀을 풀 열쇠 역시 저기에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추측이 진실이라면 마교에서 저곳에 아무런 조처없이 그냥 내버려뒀을리 만무하다.
그래, 여기까지다.
걸왕이 주저 없이 몸을 돌렸다. 그리고 채 몇걸음을 걷기도 전.
그가 갑자기 몸을 돌려 오른손을 크게 휘둘렀다.
“쯧, 늙은 거지가 참으로 조심스러운 데다가 감각까지 제법 예리하구나. 이왕 온 거 조금만 더 들어왔다면 시끄러울 일 없이 좋았을 것을.”
“그러니까 여기까지 이렇게 쫒아온 거 아니겠소. 헌데 대체 여긴 어떻게 알고 온 것인지······.”
“글쎄다. 분명 존자의 뒤는 깨끗하게 지웠는데······. 뭐 잡아서 족쳐보면 알 일이지.”
아무것도 없던 허공이 일그러지고 그 사이로 갑자기 나타난 마인 둘이 마기를 물씬 풍겨댔다.
‘지마? 아니, 인급의 마존이다.’
지금 몸 상태를 고려할 때, 지마였다면 그가 감지하기도 전에 모가지를 틀어잡혔으리라. 하지만 지금 상태를 생각할 때, 인급의 마존이라고 해도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다.
더 접근하지 않은 것은 다행이나, 고민할 시간에 빠르게 후퇴했더라면······.
걸왕이 침을 꿀꺽 삼켰다.
최선은 도주.
아니, 사실 도주는 최선이 아닌 유일한 길이다. 상황을 유추해볼 때 이곳은 마교의 근거지 근처다. 싸움이 길어지면 증원이 올 것이다.
두 발로 땅을 단단히 딛고 은밀하게 주변을 살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빽빽한 숲속.
“쯧, 늙은이가 눈알 굴리는 소리가 참으로 요란하다.”
“얼른 모가지 잡아 끌고 돌아가시죠. 길어져봐야 좋을 것도 없으니까요.”
“그래, 그러자꾸나.”
두 명의 마인이 몸을 날렸다.
그리고 마인들 가운데 하나는 반쪽으로 갈라졌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달려든 속도보다 두 배는 빠르게 피투성이가 되어 뒤로 튕겨 나갔다.
그 상황에 가장 크게 놀란 것은 걸왕 소진평이었다. 분명 주변에서 아무것도 보지도 느끼지도 못했거늘. 대체 어떻게!!
“이거, 이거. 쥐새끼같은 놈들이 어디에 숨어있었나 했더니. 바로 여기 있었구나.”
호피를 뒤집어쓰고 거대한 대부를 든 장한.
광서대장군 백기의 둘째 제자.
좌장군 궁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