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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파 역대급 천재-265화 (265/288)
  • 265화

    화산검(20)

    늙은 거지가 정신을 차렸을 때 주변은 온통 깜깜해진 이후였다.

    전신의 근육에서 눅진한 통증이 올라왔다.

    살았구나.

    그가 호흡을 통하여 기운을 가다듬었다. 메마른 기해혈이 찢어질 것처럼 아파왔다. 허리춤을 뒤져 고릿한 내음이 퍼지는 단약을 하나 꺼내 삼킨다. 까칠하게 메마른 입에서는 침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아 뻑뻑한 단약을 삼키는 것도 고역이다.

    가뭄으로 메마른 땅 위에 물방울이 몇 방울 떨어지는 것처럼 메말랐던 기해혈에 저릿한 통증과 함께 약성으로 비롯된 약간의 진기가 생성됐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다. 이렇듯 본래 최초의 한 걸음이 가장 힘든 법이다.

    순식간에 기적적으로 몸이 회복되는 일은 없었다. 그러기에 그는 너무 늙었고 병들었으며 심지어 그가 먹은 단약은 그렇게까지 좋은 약도 아니었다.

    하지만 당장 두 다리를 움직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그의 시선이 저 북쪽을 향했다.

    지금까지 알아낸 것들을 전하는 것만 하더라도 정말 대단한 정보가 될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것으로 충분한가?

    늙은 거지가 또다시 품속에서 무언가 고약 같은 것을 꺼내더니 그것을 퍼내 자신의 코밑에 양껏 발랐다.

    -킁킁

    특수한 약품과 특수한 무공.

    강호에 흔히들 천리향이라 말하는 향이 많이 있지만, 진정으로 천리를 가는 향은 보기 드물다. 게다가 그 향이 발린 이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은밀한 것은 더더욱 찾기 힘들다. 아니, 단순히 찾기 힘든 정도가 아니다. 걸왕은 근 백 년 가깝게 강호를 종횡하면서 참으로 많은 것들을 만나왔지만 단언컨대 그런 터무니없는 물건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걸왕이 자신의 코 밑에 바른 이 약물이야말로 걸왕이 알고 있는 모든 향료 가운데 그 이야기로 전해지는 전설의 천리향에 가장 가까운 물건을 추적할 수 있는 약물이었다.

    물론 그 천리향 역시 상대가 눈치를 전혀 채지 못하게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또한 그 대상이 고수면 고수일수록 그 희박한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더 크게 낮아진다. 하지만 시전자가 걸왕이라면 이야기는 조금 다르다. 그의 무공 때문이 아니다.

    걸왕을 지칭하는 수많은 칭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천하에서 가장 더러운 인간이라는 칭호다. 호신 강기를 완성한 이유가 빗물에 자신의 몸이 씻겨 나가는 것이 싫어서라는 풍문까지 돌 정도다. 그리고 그것은 일정 부분 사실이었다.

    바늘을 숨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인가. 바로 바늘 사이에 던지는 것이다. 그렇게 천리향의 미미한 향기를 그의 지독한 악취로 감춰버린다.

    그 향을 추적할 수 있는 시간은 고작 사흘.

    상대가 자주 씻으면 씻을수록 그 시간은 더 줄어든다.

    저 먼곳에서 희미한 향기가 느껴졌다.

    이대로 그 향을 추적하다가 걸린다면 탈출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고 그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던진 아이들의 죽음은 그야말로 개죽음이 될 것이다.

    잠깐의 고민.

    걸왕이 발걸음을 옮겼다.

    초절정 고수 다섯. 그리고 출신입화경에 이른 고수 하나. 여섯 초고수의 무공 교류가 시작됐다.

    공자가 말하기를 세 사람이 길을 걸으면 그 가운데는 반드시 나의 스승이 될만한 사람이 있으니 좋은 점은 본받고 나쁜 점은 살펴 스스로 고쳐야 한다고 했다(三人行, 必有我師. 擇其善者而從之, 其不善者而改之).

    그처럼 여섯의 초고수들은 각기 상대에게서 마땅히 본받을만한 점들과 절대 본받아서는 안될 것 같은 점들을 다양하게 발견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운호가 불러낸 시간에 오직 운호와 오대 일의 싸움만을 계속했다.

    “니미럴······. 이거 어째 점점 쉬워지기는커녕 더 어려워지는 것 같은데?”

    “확실히······.”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운호는 그들을 점점 더 쉽게 상대하는 것이 아닌가. 그들로서는 매우 환장할 노릇이었다. 사실 그들이라고 해서 성장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심지어 그 성장의 속도는 상상 이상으로 매우 가팔랐다.

    이유는 간단했다. 일반적으로 초절정의 고수라함은 한 문파, 아니 한 지역을 대표하는 고수이기 때문이다. 설사 구대문파나 칠대세가라고 해도 시기에 따라 초절정 고수를 보유하지 못한 경우도 있을 정도다.

    그렇기에 그들은 압도적인 비대칭 전력으로 매우 귀한 대접을 받는다. 경우에 따라서는 경지에 오른 이후 십수 년간 같은 경지에 이른 이와 제대로 검 한 번 섞어 보지 못하는 경우도 생길 정도다.

    공자는 쉰 살을 지천명이라 하여 하늘의 뜻을 아는 나이라 했다.

    하지만 무인에게 쉰 살은 그것도 초절정의 경지에 오른 무인에게 쉰 살은 이제 막 전성기를 관통하는 나이에 불과하다.

    헌데 그런 나이에 더이상 누군가와 실력을 겨루지 못하고 오직 홀로 벽을 보고 수련을 해야 한다? 그 성장의 속도가 느려질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의 이런 상황은 그들에게 매우 큰 행운이었다.

    모용준경과 혁리광.

    경지에 이르러 정체되어 있던 그들의 실력이 다시 성장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 성장은 종화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스물여섯의 나이에 초절정.

    고금을 통틀어 대체 누가 이런 성취를 얻을 수 있었을까? 최근 가장 젊은 나이에 초절정의 경지에 올랐던 이는 홍무제 주원장으로 그 나이 서른넷에 초절정의 경지에 올라 천하를 손에 쥐었다.

    물론 그가 무공에 제대로 입문한 것은 무려 열일곱의 나이였으니 다섯 살에 무공에 입문하여 스물여섯에 초절정의 경지에 오른 종화보다 오히려 더 빠른 것일수도 있다.

    하지만 그 비교 대상이 중화 역사상 최초로 길거리 거렁뱅이에서 시작하여 천하를 손에 넣은 황제라는 점 자체가 종화의 대단함을 말해준다.

    그리고 그 놀라운 성장속도에 조왕 주고수 역시 크게 자극 받았다. 지금이야 자신이 가장 운호에게 가까운 실력자인지 모르겠지만 그것이 근 시일 내에 따라잡힐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그를 채찍질했다.

    하지만 그 모든 성장에도 불구하고 운호의 검은 차근차근 그들을 해체하여 점점 더 쉽게 그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그들 하나하나가 천고의 기재 소리를 들으며 자라난 인물들이다. 비록 그 상대가 천하에 다시 없을 고수라고는 하지만 무려 다섯이서 덤벼드는데 그 차이가 점점 벌어지는 것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이는 없었다.

    “거기 덩어리. 네가 아까 전에 거기서 이렇게 움직였으면 좀 나았잖아.”

    “흥, 촌닭. 그러는 네 녀석이야말로 쓸데없이 휘청이지 말고 직선으로 나가서 버텨줬다면 조왕 전하의 검이 증무 도사의 팔에 닿을 수 있었다.”

    “뭐? 촌닭?”

    그렇기에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그들은 자신들간의 교류를 넓혀갔으며 그 교류의 시간은 점점 늘어나서 이제는 아침에 눈을 뜬 순간부터 운호와 오 대 일의 비무를 하는 그 시점까지. 심지어 그 이후까지 쭉 이어졌다.

    그리고 강아현.

    그녀 역시 그 나름대로 매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는데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그녀야말로 화산에서 가장 힘든 일을 담당하고 있었다.

    “여보?”

    “하하······. 미안.”

    운호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뒤로 몇 걸음을 물러났다.

    본인이 생각해도 이번 건 너무 심하긴 했다.

    “에휴······.”

    강아현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처음에는 그녀가 충분히 알만한 글자들이었다. 중간중간 고문이 섞여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글의 맥락을 살핀다면 충분히 해석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점점 고문의 비율이 늘어가더니 이제는 아예 글자 자체가 현재 사용하는 것과 완전히 다른 형태의 기이한 것을 들고 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가운데는 이게 대체 글자가 맞기는 한 걸까? 의심이 가는 수준의 기괴한 문자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이제 정말 거의 끝났어.”

    “알겠어. 일단 오늘 아버지한테 또 다녀올게.”

    아득한 고대.

    후한의 채륜이 중구난방으로 전해지던 종이 기술을 집대성하여 국가 주도의 채후지가 개발되기 이전의 서적들은 그 재질이 매우 조악하여 글자가 거의 남아있지 않거나, 혹은 종이가 아닌 죽간이나 목간에 쓰인 글들이었다. 최초의 채후지가 나온 것이 약 천사백 년 전이었으니 지금 운호가 읽고 있는 서적들은 대부분 그 이전 시기의 서적들이었다.

    천사백 년.

    실로 아득한 과거다.

    이야기로만 전해지는 삼국지의 영걸들이 태어나기도 이전. 어쩌면 최초의 황제가 천하를 통일하기 전에 쓰인 글들일지도 모른다. 세월에 삭아 없어진 글귀도 글귀이지만 글자 자체가 현대의 글자와 사뭇 다르다. 아현을 통해 여러 차례 고서의 해독본을 받는 과정에서 오래된 글자들을 거의 준전문가급으로 해독할 수 있게 된 운호였지만 여전히 이런 글귀를 해석하는 것은 아현,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인 강진을 따라갈 수 없었다.

    아현은 운호를 위하여 그 서적들을 해석하는 데 최선을 다해주었다. 그리고 강진은 스스로가 그 오래된 고서들을 해석하는 것을 매우 흥미로워했으며 심지어 그 고서들 중 상당수는 다른 경로를 통하여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라며 주해서를 따로 직접 작성해주기까지 했다.

    그리고 운호는 그들의 그런 노력에 힘입어 마침내 화산의 장서고에 있는 거의 대부분 책들을 주파할 수 있었다.

    이상했다.

    -네 말대로 조금 이상하구나.

    처음 운호는 수많은 서적들을 통하여 몇 가지 검술의 후보를 만들 수 있었고, 그 모든 검술을 차근차근 다섯의 초절정 고수를 통하여 시험해왔다.

    어느 것은 어울리지 않았고, 어느 것은 부족했으며, 또 어느 것은 넘쳤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제외하고 남은 몇 가지를 가다듬었을 때 마침내 운호는 큼지막한 덩어리 두 개를 남길 수 있었다.

    그리고 운호는 그 두 개의 덩어리야말로 증무 진인 목운평이 남겼으나 실전돼버린 나머지 두 개의 검술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

    조왕 주고수가 이글거리는 검을 내밀었다.

    그리고 그 극명한 광채 뒤로 천하에서 가장 날카로운 기운을 품은 핏빛의 강기가 은밀하게 숨어 들어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저 뒤로는 종화가 그 옆으로는 모용준경과 혁리광이 각기 자신의 절학을 뽐내며 접근해왔다.

    운호가 찾아낸 두 가지 무공 가운데 첫 번째는 너와 나의 구분이었으며 외부를 향한 방출이었고 압도적인 파괴를 품은 공격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모든 것을 어우르는 합일이었으며 그것을 위한 흡수였고 모든 것을 막아내는 방어였다.

    운호가 그들과 자신 사이에 선을 그었다.

    이것은 그가 찾아낸 첫 번째 무공일까. 아니면 두 번째일까.

    그저 확실한 것은 운호가 만들어낸 이 둥그런 공간이 운호가 찾아낸 구분과 합일. 방출과 흡수. 공격과 방어를 모두 품고 있다는 점이었다.

    정 반대라 생각했던 두 가지 검술이 하나로 뭉쳐졌다.

    그리하여 그 순간 운호의 머릿속에서 그 검 밖의 모든 것이 지워졌다. 그의 인식 속에 남은 것은 오직 그 검안의 세상뿐. 그리고 그것으로 운호는 마치 천상과 연결됐을 때 같은 감각을 얻을 수 있었다.

    물론 그 범위는 천상과 연결됐을 때처럼 광범위하지 않았다. 그가 인지할 수 있는 것은 고작 한 자루의 검이 닿는 범위일 뿐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그 한 자루의 검이 닿는 그 작은 공간 안에서 운호는 전지(全知)했으니 그것은 곧 전능(全能)의 다른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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