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1화
화산검(16)
“잠깐······.”
이 정도 거리면 이제 가능할 것 같다는 말이 목구멍을 통과하지 못했다. 운호가 남긴 상처는 여전히 또렷하게 남아 이제는 호흡까지 힘들게 만들고 있었다.
이준형의 탈을 쓴 그가 자리에 앉아 결가부좌((結跏趺坐)를 취했다. 부처가 그 제자들에게 설법을 행할 때 취했던 여래좌(如來座)였다.
-후읍
힘겹게 숨을 들이켰다. 하지만 그 마음과는 달리 몸이 쉽게 반응하지 않았다.
-쿨럭······.
기침 속에서 피가 튀어나왔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다시. 또, 다시. 그렇게 조금씩 쌓인 들숨이 그 폐부를 가득 메웠을 때, 마침내 그의 몸이 보랏빛의 상서로운 서기로 빛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십만 대산을 가득 메운 마기와는 사뭇 어울리지 않는 신령함이다.
이어지는 몇 번의 호흡. 물론 쉽지 않았다.
-우득, 우드득.
망가진 기맥이 비명을 내지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이 땅의 정명한 주인이었으니, 그 미약한 울림만으로도 십만대산은 서서히 그에게 공명하기 시작했다.
거대한 진동이었다. 만약 수천 년을 묵은 용이 실존한다면 이런 울음소리를 냈을까? 그래, 그것은 마치 신령한 짐승의 울부짖음과 같은 굉음이었다.
“!?······. 대체 이게 무슨?”
은밀하게 그 뒤를 따르던 걸왕이 그 어마어마한 힘의 흐름에 화들짝 놀랐다.
흡사 세계가 뒤틀리는 것 같은 막대한 기의 움직임이었다.
과거 권신은 인간의 몸으로 화산의 기운을 사역하여 신과 같은 위용을 뽐낸 적이 있었다. 지금 티샤 마이트레야가 보여주는 것 역시 그와 흡사했다. 다만 그와 다른 점이 있다면 화산의 넓이가 어지간한 현만한 넓이였다면 십만대산의 넓이는 어지간한 국가만큼 거대하다는 점이다.
그 규모에서 감히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렇게 들끓는 거대한 마기가 한 인간에게 몰려들었다. 그것은 분명 정제되지 않은 무형의 마기였다. 하지만 그 집적도가 워낙에 엄청났던 탓일까? 흡사 초절정에 이르지 못한 이들이 기운을 뭉쳐 만든 유사 강기처럼 마기들이 검은빛의 형태를 갖춘 채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그 속에서 티샤 마이트레야가 홀연히 손을 움직였다.
밀려드는 마기 앞에서 보랏빛 서기를 내뿜으며 움직이는 그 자태는 일견 신성해보이기까지 했다.
‘항마촉지인?’
전해오는 전설에 따르자면 제6천 마왕 파순이 석가여래에게 그 공덕을 증명해보라는 말에 여래가 한 손으로 땅을 짚었더니 지신들이 솟아 나와 여래의 공덕이 부처에 닿을만했음을 증명했다고 한다. 그야말로 오직 부처만이 취할 수 있는 상징인 셈이다.
하지만 티샤 마이트레야의 항마촉지인은 그와 조금 달랐다.
여래의 항마촉지인이 오른손바닥으로 땅을 짚고 왼손은 하늘을 바라본 것에 반하여 그는 왼손의 손등으로 바닥을 짚고 오른손등으로 하늘을 바라봤으니 이것은 역항마촉지인(易降魔觸地印)이라 부름이 마땅했다.
그의 주변에 서려 있던 기운은 밀려드는 거대한 마기에 저항했다. 물론 그 시간은 길지 않았다. 보랏빛의 상서로운 서기에 검은색의 찐득한 마기가 스며들었다.
-콰과과과광!!
티샤 마이트레야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같은 얼굴임에도 불구하고 신령한 서기로 휩싸여 있을 때는 마치 탈속한 수행자와 같던 그의 얼굴이 마귀와 같은 형상으로 변했다.
심상치 않은 예감이 걸왕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평생을 빌어먹으면서 살아온 거지의 감각이다. 이럴 때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는 것이 상책일 터.
하지만 이 십만대산까지 만 리에 달하는 길을 쫒아온 집념이, 혹은 미련이 그것을 막아섰다. 지금까지 중원의 모든 사람들에게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있는 마교의 본산을 알아낼 절호의 기회다. 게다가 저들과 그의 거리는 무려 오 리에 가깝다.
이만한 거리라면······.
걸왕이 도망 대신 몸을 더 납작 엎드렸다.
제법 긴 시간.
마침내 보랏빛의 상서로운 서기가 완전히 사라지고 찐득한 검은빛에 드문드문 오염된 보랏빛이 감도는 불길한 기운이 그의 전신에 넘실거렸다.
“이 정도면 급한 불은 끈 것 같군.”
“대공을 축하드립니다.”
그의 목에서 흘러나오는 음성은 여전히 쇳소리에 가까웠다.
이 막대한 기운의 흐름으로 만들어낸 초재생의 권능으로도 그 상처를 완전히 회복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게다가 이런 식의 초재생은 몸의 수명에도 영 좋지 않았다. 그 성취는 미약하지만 그래도 이리 젊은 몸을 얻었으니 최대한 길게 써먹을 생각을 함이 옳다.
적어도 몇 개월. 길게는 몇 년에 걸쳐 천천히 몸을 수습하고 그 성취를 쌓아 올리는 것이 우선이다.
“하지만 그 전에······.”
그가 몸을 일으켰다. 초재생의 여파로 생겨난 결정화된 각질들이 후드득 몸에서 떨어졌다.
“쥐새끼는 잡아야겠지?”
한순간, 주변의 풍광이 압축된다. 크게 뛰어오른 그의 몸이 삽시간에 가까워졌다. 몸을 납작 엎드리고 있던 걸왕이 바닥을 굴렀다.
-쾅!!
그 한 번의 발길질에 땅거죽이 크게 벗겨졌다. 그 발길질이 만들어낸 거대한 울림이 바닥을 구르던 걸왕의 내장을 크게 뒤흔들었다.
-쿨럭
입에서 터져 나오는 핏물이 걸왕의 누더기를 붉게 물들였다.
“이거 누군가 했더니 안면이 있는 녀석이로구나.”
문답이 무용함을 알고 있다. 또한, 감이 좋지 않을 때 미리 도망칠걸 그랬다는 자책 따위도 하지 않았다.
늙은 거지가 자신의 옆구리에 오른손을 가져다 댔다.
“보아하니 상태도 영 좋지 않아보이는데 또 그 수법인가?”
항룡십팔장(亢龍十八掌)
항룡유회(亢龍有悔)
무한 혈사 당시 대제사장을 뒤흔들었던 그 천고 절학의 기수식이었다.
이미 경험해봤기에 알 수 있었다.
저것은 그라고 해도 쉽게 무시할 수 없는 초식이다. 가장 좋은 것은 저 초식이 발현되기 전에 그것을 파훼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저 늙은 거지의 집념을 존중했다. 인간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걸고 부딪히는 모습은 실로 기껍다. 또한, 그 노력이 덧없는 물거품으로 사라지는 모습은 실로 아름답다.
그의 몸에서 찐득한 검보랏빛의 마기가 피어올랐다.
아직 탈마(脫魔)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는 증거였지만 동시에 그 마기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극한에 도달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뒤로 당겼던 거지의 손바닥이 뻗어 나왔다.
물속에서 힘을 기르는 잠룡(潛龍勿用)은 결국 땅 위에 올라 마음껏 그 힘을 자랑하는 현룡(見龍在田)이 된다. 그리고 마침내 하늘에 날아오르는 비룡이 되어 그 뜻을 자유롭게 펼쳐내니(飛龍在天), 그렇게 하늘 높은 곳으로 날아오른 용에게 남은 것은 이제 내려오는 일뿐이다(亢龍有悔).
그렇다면 그렇게 다시 땅으로 내려온 용은 이제 어찌해야 하는가.
늙은 거지는 그것에 대하여 이렇게 답했다.
지룡허세(地龍虛勢)
하늘을 날던 항룡의 기세를 기억하는 이라면 땅에 떨어진 비루한 용을 보고도 그 기세를 떠올릴 터이니 그것이면 족하지 않겠느냐고.
항룡유회를 떠오르게 하는 그 자세 그대로 늙은 거지가 자신이 달려 나갈 수 있는 가장 빠른 속도로 몸을 날렸다. 그 속도는 실로 쾌속하였으니 그 순식간에 멀어지는 뒷모습에 티샤 마이트레야가 헛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하하······.”
그의 몸이 다시 한번 크게 도약했다.
굴불신마는 말했다.
십만 대산에 위치한 마교의 본거지에는 아주 오래된 괴물이 살고 있다고.
그 괴물은 늙을 대로 늙어 이제 그 밖을 나설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 산에서만큼은 초월자에 가까운 힘을 휘두른다고.
“네? 그게 무슨······.”
“아마 구파도 잘 뒤져보면 비슷한 노괴들이 있을 거다. 물론 그 힘의 크기가 좀 많이 차이가 난다만······. 하지만 뭐 그거야 중원의 오악이니 뭐니 하면서 떠들어봤자 십만대산이니 기련산맥, 뭐 희마랍아 같은 진짜 대산들과 비교하면 동네 뒷산이나 다름없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권신이 휘두르던 초월적인 권능이 떠올랐다.
그것은 분명 지상의 법칙에 제약을 받고 있었지만, 그 법칙을 넘어선 이들과도 자웅을 겨룰만큼 강대한 권능이었다.
만약 굴불신마의 이야기처럼 그 권능을 무한대에 가깝게 휘두르는 괴물이 있다면? 어쩌면 그것 역시 초월자라고 봐도 무방하리라. 마치 편마가 마지막에 보여줬던 그 모습처럼 말이다.
“그러니까 더 단단히 준비해야 할 것이다.”
단단한 준비.
굴불신마의 그 말이 향한 것은 운호였을까? 아니면 남궁철이었을까?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모두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준비를 시작했다. 남궁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준비는 다양했다. 그 아버지인 남궁강과 함께 세력들 간의 이권을 조정하고 그 와중에도 먹음직스러운 미끼로 그들의 전력을 더 많이 끌어내야 했다. 또한 알려지지 않은 재야의 고수들이 명성을 날릴 수 있는 기회임을 적극적으로 홍보하여 그들의 참여를 독려하는 것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일이었다.
또한, 황궁.
그들의 협조는 매우 필수적이었으나, 대체 무슨 일인지 그 몽니가 참으로 감당하기 힘들 만큼 어려웠다. 게다가 광서대장군부는 대월국에서 있었던 사건에 매우 크게 덴 탓에 마교의 정벌이 그들의 숙원사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소극적이었다.
그러한 모든 악조건 속에서 남궁강과 남궁철은 꾸역꾸역 그 모든 일들을 하나씩 해결해나갔다.
그리고 그런 그들에 반해 운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준비는 매우 단순했다.
바로 무공(武功)의 완성이었다.
결국 남궁강과 남궁철이 하는 그 모든 준비작업이 만들어낼 최선의 결과는 운호를 만전의 상태로, 그리고 마교의 대주교를 최악의 상태로 맞붙게 만드는 일이었다. 만약 거기에 조금 더 운이 따른다면 다른 초절정 고수들 역시 그 싸움에 합류시키는 일일 테고.
하지만 어찌됐건 마교의 본산.
십만대산이라는 방대한 영토에 자욱하게 쌓인 마기를 마음대로 휘두르는 마교의 대주교를 끝장내야 하는 것은 바로 운호 자신이었다.
화산검(華山劍).
자신이 가진 그 모든 검술을 오롯하게 하나의 검술로 엮어냈으니 그것은 가히 화산검이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았다.
하지만 부족했다. 그리고 그 부족함을 채울 수 있는 수많은 길 가운데 가장 쉬운 길은 분명했다. 그것은 화산의 팔대 검술 가운데 나머지 둘을 찾아 익히는 것이었다.
물론 이미 그의 경지는 생전 증무진인의 경지에 육박하였으나, 그 검술의 기반은 결국 목운평이 안배해둔 화산의 팔대검술을 기초로 했다. 그 검술의 유기성이 명백한 지금 시점에서 홀로 궁구하여 결핍을 충족시키는 것보다 이미 존재하는 것으로 그것을 메우는 것이 빠른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나머지 두 개의 검술이 오태산 혈사 이후 완벽하게 실전 됐다는 점이었다.
-역시 그렇다면 이제는 파랑검을 기반으로 무려 삼십 년을 숙고하여 창안한 나의 독문 절학 천하(天下)를 가미하는 수밖에. 무려 마교의 대주교를 침묵시켰던 그 일검이라면······.
진지한 표정으로 고민하는 운호에게 파검이 평소와 같은 헛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래요. 바로 그겁니다.”
-응?
설마 진짜로 자신의 검술을 익히겠다고 나설 줄은 몰랐기에 파검이 적잖이 당황했다. 그도 그럴만한 것이 결국 그가 익힌 검술은 기교라는 측면에서 운호에 비할 바가 못 됐다. 심지어 그는 자신이 우화등선 할 때 펼쳤던 그 마지막 일초는 기억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목운평 조사님께서는 무에서 유를 만든 게 아니라, 화산에 전해지는 무공을 재정립하고 거기에 자신의 깨달음을 섞으신 겁니다. 파검 어르신처럼요.”
운호가 매우 오래된 화산의 장서고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