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화
화산검(15)
“허어, 이 녀석이? 기둥뿌리를 뽑지 말라고 했더니 아예 그보다 더 한 것을 내놓으라고 하는구나.”
영무결이 허리를 쭉 펴고 운호를 바라봤다. 실로 단순한 동작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그 기세가 일변했다.
과연 신마(神魔)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기세다.
“서평왕부에서 유일하게 대체 불가능하며 가장 귀한 것이 무엇이냐. 바로 본왕이다. 헌데 본왕이 직접 친정(親征)을 나가라? 지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물론 공짜로 부탁드릴 생각은 없습니다. 왕야. 제가 왕야께서 가장 원하는 것을 드릴 수 있다면 어떻습니까?”
“내가 가장 원하는 것?”
영무결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의 인생 목표는 무엇이었던가.
서장 포달랍궁의 멸절. 그리고 서평왕부를 여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모든 목표는 현실에서 이뤄졌다. 헌데 가장 원하는 것이라니?
“뭐, 내가 가장 원하는 것이라면 역시 네 녀석이 현이와 결혼을 해서 후계를 든든히 하는 일이지. 하지만 네가 이혼은 싫다 하였으니······. 아, 혹시 중혼을 생각하고 있느냐? 하지만 중혼이라면 그래도 위계상 우리 현이가 첫째여야 할터인데······.”
“전하, 그건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어렵습니다. 저 이제 결혼한 지 하루 지난 새신랑입니다.”
“내가 가장 원하는 것을 주겠다더니? 지금에 와서 내가 원하는 게 그것 말고 또 뭐가 있다고.”
“방금 말씀하셨잖습니까. 후계를 든든히 하고 싶으시다고요.”
“네가 내 손주사위가 되는 것도 아니면서 후계를 든든히 해주겠다고? 왜? 어디 너 정도 되는 녀석이 또 있기라도 하다는 것이냐?”
물론 세상에 그런 일이 또 가능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음 한켠에는 혹시 또 모를 일이라는 생각도 고개를 치켜든다. 운호의 주변에는 불가사의한 놈들이 워낙 많기 때문이다. 당장 눈앞의 이 남궁가 놈만 하더라도 그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무위를 지니고 있다. 이제 고작 불혹을 앞둔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릇이 꽉 차 넘치기 직전이다.
게다가 그 종남의 여자아이는 또 어떤가. 운호라는 비상식적인 존재가 있기에 조금 빛을 바래는 감이 있긴 하지만, 그녀 역시 고작 이십 대에 초절정이다. 그것은 굴불신마 자신보다도 몇 년이나 빠른 성취다.
“그건 아닙니다. 그런 녀석이 있다면 좋긴 하겠네요.”
“그러면? 대체 어떻게 네가 내 후계를 든든히 해주겠다는 말이더냐.”
“활불. 제가 해결해드리겠습니다.”
“활불?”
구미가 당기는 이야기였을까?
지금까지 의자에 앉지 않았던 영무결이 모용준효가 앉아 있던 의자에 착석했다.
-운호 너?
파검이 운호의 꼼수에 감탄했다.
정확한 인과관계는 알지 못했지만, 그는 활불의 무한한 전생이 그 백(魄)을 근간으로 한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고 현재 그 활불의 백이 운호의 몽원경에 존재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결국 무한할 것 같았던 활불의 전생은 이제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는 의미다.
“네, 결국 전하께서 걱정하시는 그 불안한 후계 문제의 근원은 활불 아니겠습니까. 물론 전하께서는 초인이시니 다음 대의 활불 정도는 무난하게 처리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하지만 그다음? 그리고 또 그다음은 어떨까요? 전하와 같은 초인이 또 나타난다면 별 걱정 없겠습니다만 그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죠. 그러니 그 문제 제가 해결해드리겠습니다.”
“흐음, 그건 제법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구나. 하지만 지금 네 제안에는 어떻게가 빠진 것 같구나.”
“그게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결과만 보여드리면 그만이지요.”
고민은 길지 않았다.
운호의 말이 사실이라는 전제하에 이것은 무조건 남는 장사다.
영무결은 역대 최강이었다는 전대의 활불이 찾아온다고 해도 상대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만약 자신이 사라지고 없다면? 그때는 어떨 것인가?
게다가 그럴 리는 없겠지만 운호가 설사 거짓을 말한 것이라고 해도 상관이 없었다. 그 때는 그에 걸맞은 것을 받아내면 그만이니까.
“좋다.”
영무결이 고개를 끄덕였다.
“빌어먹을······.”
-으드득
조왕 주고수가 굴욕감에 이를 갈았다.
영무결에게 뺨을 맞은 것이 그토록 큰 굴욕이었을까? 아니, 아니다. 그것보다 그를 더 굴욕적이게 만든 것은 영무결의 무공 앞에서 손가락 하나 제대로 까딱하지 못한 무력한 자신의 모습이었다.
무형검강을 완성했다면 결과는 달랐을까?
-우우웅
황룡검이 너무 당연한 소리 아니냐며 크게 울었다.
그래, 너무 당연한 질문이었다.
그의 할아버지인 홍무제 주원장은 서장 너머, 최초의 세계제국 황제였던 성길사한(成吉思汗)의 후예를 자처하는 철목아(鐵木兒)의 대군을 상대로 자신의 무공을 증명했다. 당시 철목아는 남으로는 천축부터 서쪽으로는 옛 대진국의 영토까지를 정복한 제 2의 성길사한이라는 칭호가 부끄럽지 않은 정복 군주였다.
하지만 그런 위대한 정복군주도 결국 자신의 수하들과 함께 홍무제의 칼 아래 그 목숨을 잃어버렸으니 기록에 따르자면 당시 홍무제는 단신으로 철목아는 물론이거니와 그 휘하의 사대 위장이라는 자들까지 모조리 참살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의 할아버지는 대체 어떻게 그렇게 강해졌던 것일까?
재능의 차이일까? 그래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열일곱의 늦은 나이에 정식으로 무공에 입문하여 고작 이십년 만에 걸리지 않아 초절정에 이른다는 것은 보통 재능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니까.
주고수가 고개를 저었다.
단순히 재능만의 문제가 아니다.
실제로 기록을 살펴보면 그의 할아버지는 치열한 실전에서 죽을 고비를 넘길 때마다 크게 성장했다. 그리고 그 커다란 성장들이 모여 결국 그를 그 드높은 경지로 이끌었다.
초절정에 오른 이후에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홍무제는 파양호에서 장사성과 진우량의 연합군을 깨트리며 초절정에 올랐고 이후 장강 북쪽의 원제국 잔당을 몰아내며 그 성취를 점점 높여갔다.
그리고 그가 처음으로 무형의 검강을 사용한 것 역시 북원의 수도인 대도 공략에 실패하여 목숨을 걸고 후퇴하던 과정에서였다.
게다가 굴불신마는 또 어떠하며 백운호는 또 어떠한가.
주고스는 절대 자신의 재능이 그들보다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부족한 것은 단지······.
“실전인가.”
한바탕 싸움이 있었던 자리.
모두가 떠난 그곳에 쓸쓸하게 남은 한 사람이 있었다.
-끄으응······.
나이가 느껴지긴 했으나 실로 준수한 외모의 중년 사내.
바로 혁리광이 그 주인공이었다.
“망할 영감탱이······. 분명 이것만 완성하고 강호에 출두하면 천하에 적수가 없을 거라고 그래놓고는······.”
무려 사십삼 년.
그 길었던 수행의 시간이 눈앞을 스쳤다. 무공을 완성할 때까지 그저 골방에 처박혀 무공만 팠다. 마침내 무공을 완성했고 천하에 널리 이름을 떨치겠다는 마음으로 좋은 옷까지 입고 강호에 출두했거늘.
그래, 처음 그가 상대했던 늙은이야 그렇다고 치자.
천무십칠성이면 오랜 시간 강호의 정상에 군림하던 이들이고 나이 차이도 있으니 그저 시간문제일 뿐.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 당장 자신이 그 나이가 되면 그보다 훨씬 강할 것이라는 자신도 있다.
또한, 동년배로 보이던 나머지 두 녀석도 뭐 제법이긴 했지만 상대할만했다.
종화 소저······. 뭐 그것도 괜찮다. 부부는 일심동체니까 계획대로 청혼만 잘 성공한다면 오히려 좋다. 이래 봬도 젊은 시절. 근처만 가도 여인네들이 자지러지던 외모다. 지금도 어디 가면 어지간한 이십 대 정도는 상대도 되지 않는다.
문제는 그 마지막에 등장했던 신마라는 늙은이다.
자신을 비롯한 자신과 동급의 고수 다섯을 동시에 상대했고 심지어 어렵지 않게 이겼다. 특히 그 마지막 한 수.
“마과공덕불시인이라고 했던가?”
무서운 수법이었다.
도저히 어떻게 상대해야할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천하에 적수가 없기는 개뿔······.”
다시 한번 어린 시절 순진했던 자신을 꼬셨던 그 영감탱이를 향해 작은 원망을 내뱉어본다. 하지만 원망은 딱 거기까지. 이미 벌어진 일이다. 무를 수도 없고 뭐 어쩌겠는가.
“계속해봐야지.”
완성하면 천하에 적수가 없을 거라는 말 한마디에 사십삼 년을 가문에 틀어박혀 무공만 익혔던 외골수.
그가 자신의 다음 목표를 정했다.
“굴불신마라고?”
“네, 왜 그러십니까 형님?”
모용준경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다. 그저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서 그런다. 그래, 강호에 신마라는 칭호가 붙을만한 인물이라면 응당 굴불신마겠지.”
“참으로 광오한 아이였습니다. 스스로를 천무십칠성보다 한 수 위의 고수라 이야기하는 것도 그렇고 나머지 넷을 그렇게 일일이 꼽는 것도······.”
“넷? 누구누구? 누구누구를 꼽더냐?”
“아, 그게 그러니까 굴불신마와 자기 자신. 그리고 중원의 삼대 숙적인 마교의 대제사장, 서장 활불. 그리고 달단의 살리답을 말했습니다.”
“대제사장, 활불, 살리답······. 그렇다면 그들도 그만한······.”
“헌데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궁금한 것?”
“극광오신. 대체 다섯 명은 어떻게 꼽으셨길래 다섯이 나오는 겁니까?”
응?
갑자기 튀어나온 극광오신이라는 말에 남궁철이 귀를 쫑긋 세웠다.
영무결이 등장하기 직전까지만 하더라도 간밤에 운호가 서천관일 단노사와 모용준경에게 천외천을 보여줬다고 생각했지만, 지금보니 그들과 한바탕 싸움을 벌였던 것은 운호가 아닌 굴불신마인 듯 싶었다. 허면 그 극광오신이라는 것도 운호가 꼽은 것이 아닌 굴불신마와 관계된 것일 터.
영무결이 손사레를 쳤다.
“극광오신은 무슨. 그저 단가 늙은이가 내 수법을 받아낼 이가 얼마나 되냐고 묻기에 당장 생각나는 인물이 넷 정도 된다고 답한 것뿐이다.”
“하나는 저일 것이고, 또 하나는 마교의 대제사장일 터. 허면 나머지 둘은 누구입니까? 백번 양보해서 하나는 살리답이라고 해도 나머지 하나가 아직 똥오줌도 제대로 못 가릴 활불은 아닐 텐데요.”
“그렇지. 살리답이라면 내가 직접 붙어본 적은 없지만, 너희가 무신이라고 떠받들었던 모용경 그 늙은이가 스스로 백초지적쯤 된다고 이야기했으니 손에 꼽을만하지.”
“아, 아니. 모용경 노사님께서 생전에 그런 말씀을 하셨었단 말씀입니까?”
“그래, 이십오 년 전쯤인가? 잠깐 인연이 닿아 만났을 때 나에게 자신을 이긴 정도로 자만하지 말라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었다.”
“그렇군요······. 허면 나머지 하나는?”
“정말 모르는가 보구나. 난 네가 마교를 상대로 최대 오 할의 승률을 이야기하기에 이미 알고 있는 줄 알았거늘.”
“네? 그 말씀은 설마?”
“그래, 뭐 비록 그 장소가 십만대산으로 한정되기는 한다만······.”
절정의 고수 둘이 맨 가마.
그리고 그 옆을 달리는 또 하나의 절정 고수. 바로 어제 영무결에게 크게 낭패를 당한 동창의 인물들이었다.
“공공,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크윽······. 괜찮다. 괜찮으니까 속도나 더 높이거라. 이 사실을 하루라도 빨리 태감께 전해야한다. 우리의 대전략은 잘못됐다. 청해대장군부, 아니 서평왕부의 힘은 그 정도가 아니였어.”
“알겠습니다!! 서두르도록 하겠습니다.”
그들이 서둘러 속도를 높이려는 그 찰나.
-서걱
핏빛의 검강이 절정고수 둘의 몸을 절반으로 갈라놓았다.
“누구냐!!”
붕대로 전신을 감싼 사내.
이제는 더 이상 벽안이 아닌 혈안의 마검이 말 없이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