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9화
화산검(14)
“커헉······.”
폐부 깊숙한 곳에서 숨이 터져 나왔다.
살았나?
“존자!! 정신이 드셨습니까?”
목에서 느껴지는 어마어마한 통증. 그 통증을 참고 성대를 울렸을 때 그곳에서는 흡사 쇳가루를 가는 듯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여기······는?”
“파현(波縣)입니다.”
“다른······?”
다른 사람들은 어찌 됐냐는 질문. 병조량은 그저 깊숙하게 고개를 떨굴 뿐. 아무 것도 답하지 못했다.
“······.”
짧은 침묵.
“내려······.”
“괜찮으시겠습니까?”
뭐라 말하고 싶었으나 목에 아무리 힘을 줘도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운호가 남긴 거대한 상처는 회복이라기보다는 재생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한 수준에 오른 그로써도 완벽하게 회복하기 힘든 거대한 상처였다.
-탁.
병조량이 자신의 팔을 풀었다. 그리하여 그 등에 업혀있던 대제사장이 자신의 발로 두 땅을 딛고 섰다.
“큭······.”
그리고 그 순간 전신에 어마어마한 통증이 밀려왔다.
꼼꼼히 살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따. 몸 상태는 그야말로 엉망진창이다. 목에 새겨진 상처뿐만이 아니다.
마지막 순간이 기억났다. 분명 익히 알고 있는, 목운평이 한차례 보여줬던 그 화산의 검이 올 것으로 생각했거늘 그 어린아이가 내민 것은 그와 닮았으나 완벽하게 다른 무언가였다.
천리.
그것은 대체 언제까지 나의 앞길을 가로막는단 말인가. 실로 원망스럽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괜찮다. 이번에도 나는 그 그릇된 천리에게 패배하지 않았으니까. 어린 아미타의 화신이 그릇된 천리를 등에 업었다면 나 티샤 마이트레야는 오직 자신의 힘으로 오롯하게 쌓아 올린 기나긴 업이 있다.
무릎을 꿇고 쉬는 병조량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 이 아이 역시 그 업의 한 부분이다. 그리고 이 아이의 혈육.
프라타파나.
아니, 아직 그 이름을 받기 전 관일이라는 이름을 쓰던 아이가 눈에 선했다.
그 아이는 마이트레야 자신이 내려준 모든 것과 그가 스스로 쌓아 올린 나머지를 모두 불태워 자신의 목숨을 살렸다. 그리고 그것 역시 자신이 쌓아올린 업의 결과물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죽지 않았다는 점이다. 살아 있다면 기회는 무한하다.
무엇보다 그에게는 자신의 피와 살을 바탕으로 무려 이친 년의 세월 동안 쌓아 올린 저 거대한 불괴의 요새가 있지 않던가.
부상을 회복하고, 기량을 되찾는다.
“존자, 아직 갈 길이 제법 남았습니다. 일단은 다시 업히시지요.”
대제사장.
이준형의 몸을 입은 티샤 마이트레야가 병조량의 목에 팔을 둘렀다.
목적지는 십만대산의 중앙.
그가 쌓아 올린 모든 업보가 축적된 곳.
그래, 그곳이라면 감히 적들도 침범할 생각은 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시간만 주어진다면 아미타의 화신이 어디까지 강해진다고 해도 인간의 몸을 입고 있는 이상 절대 그를 넘어설 수 없으리라.
두 사람이 다시 길을 재촉했다.
그리고 저 멀리 떨어진 곳.
아직 늙은 거지가 그들의 흔적을 놓치지 않았다.
“제가 생각할 때 우리가 십만대산의 어딘가에 위치한 마교 본단을 정확히 알고 있다고 해도 승률은 오 할 남짓. 그게 힘들다면 승률은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들 겁니다. 그리고 대제사장과의 일대일이라면······. 아마 불가능할 겁니다.”
“뭐라고요? 증무 도사.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보고서대로라면 증무 도사가 그 악적을 거의 초죽음으로 만들어 쫒아내지 않았습니까.”
“네, 그랬죠. 아마도 당장 싸운다면 그리 어렵지 않을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마교도들의 불가사의한 공능을 생각한다면 그 육체의 상처가 언제까지 갈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저희는 마교 본단의 위치를 아직 특정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아무리 그렇다고 한들 스스로를 극광오신의 일좌. 초절정을 초월한 입신경의 고수라고 하셨으면서 어째서 같은 수준이라는 대주교를 상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말씀이십니까. 게다가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다고 해도 고작 오 할이라뇨. 지금 구대문파와 칠대세가의 저력을 너무 낮게 평가하시는 거 아닙니까?”
모용준효의 그 질문에 남궁철이 대신 답했다.
“그건 아닐 겁니다. 운호의 말은 그저 그곳이 십만 대산이라는 말입니다.”
“아니, 아무리 십만 대산이라고 해도······.”
똥개도 자기 집 안방에서는 반은 먹고 들어가는 법이다. 하물며 십만 대산이 어디인가. 마기로 그득한 마인의 본고장 아닌가. 마인들이 중원의 영산에서 그 행동에 제약을 받는 것처럼 불가와 도가의 전통 무공을 수련한 고수들 역시 십만 대산에서 제약을 받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
“하지만 분명 마교의 대제사장은 이번에 화산에서······.”
“모용 형님, 형님도 아시다시피 그래서 그 대가로 무려 여섯에 달하는 천마와 스물다섯의 지마가 죽어 나가지 않았습니까.”
“아니, 그리고 설사 그렇다고 해도 고작 서른으로 쳐들어온 그들과 달리 우리는 숫자에서 압도적이잖더냐.”
“글쎄요, 그것도 확신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십만대산이 좀 멉니까. 게다가 우리는 공격을 하는 상황에서 모든 문파가 하나가 되어 전력을 동원할 수 있다고 확신할 수도 없고요. 당장 모용세가만 하더라도 무력 단체를 전부 내보낼 수 없잖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굳이 운호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운호를 대신하여 따박따박 대답해주는 남궁철에게 모용준효가 약간의 짜증을 담아 물었다.
“아니, 자네는 그걸 그리 잘 알면서 대체 뭣 하러 증무 도사에게 그런 것을 물으러 온 겐가.”
“그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호라면 방법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있어서 아니겠습니까. 하하하하하.”
남궁철이 호탕하게 웃으며 운호를 바라봤다.
얼핏 듣기에는 별 생각 없이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이었지만 그 웃음 사이로 보이는 번뜩이는 눈빛이 답을 재촉했다. 불혹을 목전에 둔 남궁철은 자신만의 형태로 이제 그 나이와 직책에 어울리는 모습을 갖췄다.
“글쎄요. 방법을 찾으신다면 그 답은 처음 오셨을 때 드렸던 답과 똑같은 답을 드릴 수밖에 없겠군요.”
누가 도사 아니랄까봐. 애매모호한 운호의 답변에 모용준효가 고개를 갸웃했다.
“처음에 왔을 때 줬던 답?”
물론 이번에도 남궁철은 운호의 그 개떡 같은 말을 찰떡같이 알아먹었다.
“그건 너무 어렵지 않겠느냐.”
“어렵지만 해내야지요.”
운호가 입꼬리를 슬쩍 들어 올렸다.
저 멀리 느껴지는 영무결의 기척에 못마땅함이 그득히 느껴진다. 아니, 저 먼 곳에서 단순히 기척만으로 이렇게 다양한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니. 이건 대체 어떻게 하는 것인지 요령이 궁금할 지경이다.
“아니, 대체 무슨 소리들을 하고 있는 겐가. 처음에 왔을 때 줬던 답이 대체 뭐길래?”
“아아, 서평왕 말입니다.”
“서평왕이라면 굴불신마? 그러니까 지금 서평왕부의 도움이 필요하다 뭐 그런 이야기인가?”
남궁철의 대답에 모용준효가 잠시 고민했다.
“서평왕부라면······. 확실히 서장도 최근에는 조금 안정되는 기색이 보이고.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 하지만 그들이 굳이 자기 세력을 깎아 먹어가며 마교를 치는 것을 도울 이유가 있을까? 삼대 대장군부가 앙숙인 것은 유명한 이야기 아닌가. 마교를 정벌하면 광서대장군부도 남평왕부로 승격이 되는데 그들이 그것을 도울까?”
“뭐 그거야 협상하기 나름 아니겠습니까. 운호는 그저 방법을 제시했고 그 길을 찾는 것은 무림맹의 몫 아니겠습니까.”
“서평왕부······. 서평왕부라.”
차라리 광서대장군부라면 쉽다.
청해대장군부에게 서장 포달랍궁이 필생의 대적이었던 것처럼 광서대장군부 역시 십만대산에 또아리를 튼 마교가 필생의 대적이었으니까. 게다가 최근 무림맹이 모든 신경을 쏟은 곳 역시 십만대산으로 그 기간 동안 광서대장군부와의 관계 역시 제법 돈독하다고 할만큼 올라와 있었다. 그렇기에 걱정이 됐다.
괜히 여기서 서평왕부를 끌어들이려다가 서평왕부의 도움도 얻지 못하고 덤으로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은 광서대장군부까지 비협조적으로 나오게 되는 것은 아닐까?
“자자, 모용 형님. 이러지 말고 이 자리는 이쯤에서 마무리를 하시지요. 어차피 결정은 위에서 내리는 것이고, 그 결정에 따라 세부적인 업무를 짜는 것은 또 다른 사람들의 몫 아니겠습니까. 저희 임무는 그저 이런저런 정보들을 잘 수집해서 아버지께 전하는 것까지입니다.”
“그래. 네 말이 옳다.”
“자, 그러면 전 오래간만에 만난 동생과 좀 찐하게 회포를 풀어봐야 할 것 같은데. 모용 형님 어떻습니까? 함께 하시겠습니까?”
“아니, 아니다. 의형제들의 만남에 내가 초를 칠 수는 없는 노릇이지. 게다가 나도 망할 형ㄴ······. 크흠. 아무튼 우리는 이따 저녁에 화산 장문 어른을 만날 때 다시 보자꾸나.”
“네. 그러면 그러시지요.”
“자, 그러면 이제 어색한 사람도 사라졌겠다 툭 터놓고 솔직히 말해 보거라. 갑자기 서평왕부 이야기는 왜 꺼낸 것이냐. 물론 네가 서평왕부와 인연이 깊은 것은 잘 알고 있다만 솔직히 그 인연이 아무리 깊다고 해도 고작 그런 개인적인 인연으로 굴불신마가 움직여줄 것 같지는 않구나. 무엇보다 네 결혼식에 그쪽에서 보낸 사절의 무게감만 보더라도 고작 정사품 문관 하나가 전부 아니더냐. 참, 네가 활불 때려 잡을 때 결정적인 공을 세운 것은 천하사람 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것을.”
“형님!!”
“그래, 나도 안다. 알아. 본래 사람 마음이라는 것이 본래 똥 싸러 갈 때 다르고 싸고 나온 이후가 다른 법이지. 하물며 집단으로 가면 그건 더 심해진다는 것도. 다만 이상한 점은 그 사실을 똑똑한 네가 모를 것 같지는 않건만, 대체 무슨 의도로 굳이 그런 이야기를 한 것이냐는 점이다.”
남궁철의 이야기에 운호가 입가에 어색한 미소를 띠었다. 이야기를 끊으려 했건만 그 시점이 상당히 묘해졌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서평왕부, 혹은 굴불신마 영무결에 대하여 심한 욕은 하지 않은 점일까? 운호의 그 어색한 미소에 남궁철이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래, 똥 싸러 갈 때 다르고 똥 싸고 나온 후가 다른 것이 사람 마음이지. 하지만 지금 서평왕부에서 중순대부를 축하사절로 보낸 것은 우리 현재 행정 상황에서 최대한 쥐어 짜낸 것이다. 전시에는 장군들이 할 일이 많지만 이후로는 문관들이 죽어나가는 법이거든.”
남궁철은 굳이 갑자기 나타난 이 노인이 누구냐고 묻지 않았다.
굴불신마 영무결은 그저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 자신의 특별함을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서평왕 전하!!”
“예의 차릴 것 없다. 그런 것 받자고 온 것도 아니고. 그보다 마교 놈들을 때려 잡는데 우리 도움이 필요하다고?”
영무결의 질문에 운호가 뻔뻔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결혼 선물 주러 오신 것 아닙니까?”
“허어, 이놈 봐라? 아주 결혼 한 번 하는 걸로 남의 집 기둥뿌리를 뽑아먹을 놈이로구나. 게다가 내 손녀사위 삼으려던 놈이 엄한 곳에 장가를 갔는데 내가 뭐가 좋다고 집안 기둥뿌리를 넘겨주겠느냐. 뭐 혹시 모르지. 네 녀석이 지금이라도 마음을 돌린다면······.”
“전하, 저 오늘이 새신랑 1일 차입니다.”
“크흠······.”
“게다가 제가 결혼 선물로 바라는 것은 서평왕부의 기둥뿌리가 아닙니다.”
“응? 네가 그러지 않았느냐. 마교 놈들을 치는데 우리 도움이 필요하다고.”
운호가 방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착각하신 것 같군요. 제가 처음 답했던 것은 서평왕부가 아닙니다.”
“허면······. 잠깐. 설마?”
“네, 맞습니다. 바로 서평왕 전하입니다. 그리고 그런 도움이라면 제 결혼 선물로 적절하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