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파 역대급 천재-257화 (257/288)

257화

화산검(12)

노인은 길을 걷고 있었다.

그의 삶은 시작부터 지금까지 보통 사람과는 크게 달랐다. 길에서 태어나 길에서 살아왔으니 어쩌면 지금 그가 걷고 있는 이 길은 그의 집일지도 몰랐다.

그가 태어났을 당시 천하는 지극히 혼란했다.

제국은 5년 동안 무려 다섯 번이나 황제가 바뀌었다.

또한 지금껏 본 적 없는 역병이 천하를 휩쓸었으니 손발이 검게 변하고 열이 오르며 객혈 끝에 결국 사망하는 이 역병으로 하북성 인구의 구 할이 하남과 강서성 인구의 육 할이 사망했으며 중원 전체로 봐도 두 명 중 하나가 죽어 나자빠졌던 대역병이었다.

아직 어렸던 소년은 제 아비와 어미가, 제 형제와 자매들이, 길에서 만난 동무들이 그렇게 손발이 검게 변해 죽어가는 꼴을 똑똑하게 지켜봤다.

그리고 벌어진 전란들.

그 속에서 소년은 가진 것 없이 유리걸식하는 걸인이 됐다.

운이 좋았다.

배가 너무 고파 뜯어먹었던 풀이 천하의 영초였고, 우연히 잡아먹은 기형물고기가 천하의 영물이었다.

쓸데없이 규모만 클 뿐, 딱히 제대로 된 무공이 전해지지 않던 개방에 명목상으로 내려오던 많은 무공들이 그에게 주어졌다. 어떤 것은 쓸만 했으며 또 어떤 것은 쓸모 없었다. 청년은 그 모든 것들을 취합했고 몇 가지 무공으로 엮어낼 수 있었다.

어느새 나이를 먹어 중년이 된 그는 쓸데없이 거대한 그 거지집단을 물려받았다. 의무감으로 살아왔다. 그렇게 살다 보니 어느새 천하의 무림인들은 그를 모든 거지의 왕이라 부르며 추켜세워주었다. 아니, 어찌 생각하면 그것은 추켜세우는 것이 아니라 비웃는 것일지도 몰랐다. 거지 왕초들의 왕이 어찌 명예로운 이름일 수 있을까.

하지만 노인은 알고 있었다.

지극히 호화로운 보배를 걸치고, 천하의 우뚝 선 황제조차도 결국 그 명예라는 것을 얻지 못했다는 것을. 호랑이는 그저 잘 먹고 잘 관리하면 좋은 가죽을 남기지만, 사람의 명예라는 것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거지가 어찌 협을 지킬 수 있으랴.

인심은 곳간에서 나는 법이고 당장 먹고 살기 힘든 사람에게 그런 이상(理想)은 허튼 소리일 뿐이다.

그렇기에 그는 거지들이 단순히 구걸을 넘어 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았다. 주워들은 정보는 돈이 된다. 물론 허튼소리였다. 어찌 그것만으로 돈이 될까. 하지만 무공을 익힌 이들의 노역은 충분히 돈이 되는 법이고, 그렇게 개방은 제법 부유해졌다.

하지만 그렇게 돈을 번 거지들은 더 이상 거지일 수 없는 법. 그렇기에 노인은 손수 모범을 보였다. 씻지 않았고 소유하지 않았으며 가진 것을 가장 어리고 약한 새끼 거지들을 위해 기꺼이 내놓았다.

개방의 거지들은 거지였지만 거지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협을 지킬 수 있었다.

여전히 구대문파와 칠대세가는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개방은 이미 단일 문파로 그들에게 필적할 만큼 강대한 세력이었다. 그것도 그 하나하나의 세력들이 자기 속가를 모조리 동원한 것만큼.

늙고 다친 노인은 계속해서 길을 걸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인은 존중받지 못했다. 천무십칠성의 일원이라 불렸지만 무림맹의 창설에 초청받지 못했고 개방은 여전히 강호에 이름난 문파로 대접받지 못했다.

그 세력을 단박에 떨치고 일어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저 지금처럼 꾸준히 걸었다. 삼국지 연의에서 가장 명예로운 이름은 승리자인 사마씨가 아니다. 그 시대에 가장 명예로운 이름은 관성제군이다.

“사형······.”

“아서라. 사부께서 원하는 일이시다.”

“하지만!! 저러다 정말 돌아가실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또한 사부께 가장 어울리는 일이겠지. 항상 말하지 않으셨더냐. 걸왕이 비단 금침에서 어찌 마지막을 보내겠는가. 그저 바라는 것은 그 마지막이 겨울철 아무 의미 없는 초막에서 스러지는 것이 아닌, 살아온 평생에 어울리는 무언가였으면 한다고. 그리고 지금껏 아무도 알아내지 못했던 마교의 본거지라면 사부가 말한 그 마지막에 더할나위 없이 어울리는 업적 아니겠느냐.”

그 제자들이 이미 일흔에 가까운 나이였다.

허나 노인은 자신의 자리를 제자들에게 물려줄 수 없었다. 그가 아직 젊던 시절에 개방에 들어왔던 제자들은 그가 집대성한 무공을 초반부터 제대로 익힐 수 없었고 그렇기에 그 무공이라는 것이 실로 형편없었다.

하지만 그 후대.

이제 막 쉰에 접어드는 사손들은 그보다 나았으며, 이제 막 무공에 입문한 지 일이십 년쯤 된 그 아랫세대는 그보다 더 나았다. 그렇기에 몇 년만 더. 몇 년만 더 하던 세월이 어느새 십수 년이었다.

‘이제는······.’

평생을 가꿔온 개방은 이제 그 체계가 단단해졌고 규율이 생겨났다.

그렇기에 이제 필요한 마지막 조각은 조직의 이상(理想). 그것도 말로만 나부끼는 공허한 허튼소리가 아닌 현실에 이뤄지는 이상이었다.

늙고 병든 노인.

아니 걸왕 소진평이 저 마교의 적들을 쫓는 것에 자신의 목숨을 걸었다. 그리고 그의 목숨으로 채워지지 못한 그 나머지 여분을 그가 쌓아 올린 개방이라는 거대한 조직이 채워주었다.

이준형의 몸에 들어간 티샤 마이트레야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이제 막 천급의 경지에 발을 디딘 광비검 병조량은 한 노인이 평생 쌓아 올린 인생을 알아차리기에는 너무 미숙했다.

***

“관일창 단 노사님은 이미 떠나셨다고?”

“네. 사형.”

운호의 결혼식에 찾아온 하객 중 공식적으로 가장 무림에서 이름이 높은 사람은 점창을 대표하는 고수인 남천관일 단상목이었다. 헌데 그런 그가 결혼식 바로 다음 날 아침 일찍 별다른 이유도 없이 훌쩍 떠나다니. 본래 사람 사귀기를 좋아하는 그답지 않은 행보에 많은 사람들이 의구심을 표시했다.

“떠나시면서 ‘내 어제저녁 하늘 위에 하늘이 또 있음을 깨달았으니, 하늘에서 가장 빛나는 것은 별이 아니더라. 초절정의 경지 위에 또 다른 경지가 있으니 어찌 그냥 가만히 쉬고 있을 수 있겠는가.’라는 말을 하고 자리를 뜨시는 것을 옆 사람이 ‘초절정 위에 또 다른 경지가 있다니 그게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뭐라고 답하셨다고 하더냐.”

“초절정의 경지가 신의 경지에 손을 뻗은 단계라면 그들은 그 경지에 온전히 발을 디딘 단계이니 그야말로 신(神)이라 할 수 있겠지. 그러니 출신입화경(出神入化境)이라 함이 옳지 않겠냐라고 답하셨다고합니다.”

“출신입화경이라······.”

“네, 지금 사람들은 그 말이 너무 길다 하여 대부분이 출신경. 혹은 화경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또한 그들이라는 말에 단노사께 사람들이 그게 누구냐고 물었습니다만 그저 웃으며 손가락 다섯 개를 보이고는 홀연히 떠나셨다고 합니다.”

다섯?

그가 말한 출신입화경이 무슨 의미인지는 알 수 있었다. 아마도 어젯밤에 굴불신마 영무결을 만난 것이겠지. 조왕 주고수에게 쌓인 화를 그쪽에 풀었을 테니 제법 호된 꼴을 당했을 터고. 헌데 다섯이라니······. 당장 생각나는 것은 굴불신마, 대제사장, 운호 자신 그리고 활불이다. 물론 활불은 이미 그 기생을 멈춘 채 몽원경에서 풍화되고 있었지만 굴불신마야 아직 그 사실을 모르고 있을 터이니······. 헌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나머지 하나는 누구일까?

“덕분에 지금 사람들이 모두 수군대고 있습니다.”

“수군댄다고?”

“네, 떠나는 서천관일 단 노사가 한쪽 다리를 미세하게 절었다는 이야기가 있어 그분이 말씀하셨던 그 출신입화경의 고수를 어제 만난 것이 아니냐고요. 몇몇 사람들은 그것이 등선한 청무 태사조님이라고도 말하기는 합니다만······. 아무래도 하늘에서 가장 빛나는 것이 별이 아니라는 말에서. 천무십칠성이 아닌 다른 고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냐고. 그래서······.”

“그래서?”

“대부분이 지금 모습을 보이지 않는 조왕 전하를 그 후보로 꼽긴 합니다만······. 또 몇몇 사람들은 그 후보로 사형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 저희 화산의 제자들 대부분은 단 노사님께서 간밤에 사형을 만난 것이 아니겠냐고······.”

운호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큰일 날 소리다. 새신랑이 밤에 새신부를 놔두고 어찌 이슬이나 맞으며 돌아다닌단 말이더냐. 몇몇 사람들의 이야기처럼 단 노사가 간밤에 등선한 태사조님이라도 만난 모양이지. 이미 등선하셨으니 단 노사의 말처럼 그 출신입화경이라는 말에도 어울리지 않더냐.”

출신입화경이라.

제법 그럴싸한 말이라고 생각이 됐다. 사실 절정과 초절정의 사이에 확실한 선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처럼 자신을 비롯한 몇몇 초절정 고수들과 그 외의 고수들 사이에도 그만한 선이 존재한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서천관일 단상목이라면 혹자는 천풍이(天風耳) 순풍자(順風子)라고 부를 만큼 많은 정보들을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 성정이 워낙에 떠돌며 여기저기 끼어들기를 좋아하는데, 심지어 무공까지 고강하여 어지간해서는 낭패를 볼 일이 없다 보니 자연스레 강호의 비사를 잔뜩 알 수밖에 없다. 그런 인물이 말한 이야기이니 이제 제법 큰 신빙성을 갖고 강호에 퍼져 나가겠지. 게다가 단상목 자체가 그리 입이 무거운 인물도 아니니 그 다섯이 누구인지는 금방 퍼질 것이 분명했다.

“아무튼 단 노사는 없지만, 사형을 보고자 하는 강호의 명숙들이 줄을 섰습니다. 게다가 들리는 소문으로는 무림맹 맹주님도 오고 계신다고 하고요.”

“검왕이?”

“네, 사정이 있어 결혼식에는 시간을 맞추지 못했지만, 그래도 무림 맹주나 되는 분이 찾아오신다는 것을 보면 확실히 사형의 명성이 사해를 울리고 있기는 한 것 같습니다.”

“내 명성은 무슨. 그저 이번 일에 대하여 무림맹에 서신을 보냈으니 그것을 논하고자 하는 것이겠지.”

사실 사안의 중대함을 고려하면 진즉에 달려옴이 옳았다.

아마도 이리 늑장을 부린 것 자체가 몇 년 전에 있었던 남궁 세가에서의 싸움 때문이겠지. 하지만 솔직히 말해 별 상관도 없었다. 그날 이후로 남궁세가의 가주인 남궁강이 무림맹을 장악하는 일에 속도가 붙었고 현재는 사실상 명목만 무림 맹주이지 실권은 거의 남궁강이 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힘이란 물리적인 힘이나 명성도 중요하지만 돈 역시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그것은 무림맹과 같은 커다란 단체의 경우는 더더욱 그렇다. 현재 무림맹의 자금줄 가운데 가장 단단한 것이 남궁세가고, 그다음이 모용세가인데 모용세가 역시 남궁벽이 아닌 남궁강을 지지한다.

“그러면 일단 형님이랑 그 모용세가 사람을 먼저 만나봐야겠다.”

“아, 안 그래도 어제 남궁형님께서 모용세가 분과 함께 아침에 식사를 끝내시는 대로 오시겠다고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남궁 형님?”

“네, 형님께서 제가 사형의 사제이니 자신에게도 동생이 된다고 그리 부르라고 하셔서, 혹시 사형께서 불편하시다면······.”

“아니, 아니다. 불편은 무슨. 그저 참으로 형님답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운호가 자신의 사제와 이야기를 나누는 그 시간.

발 없는 말은 천리보다 빠르고, 강호의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역시 고수, 그것도 새로운 고수에 대한 소식인 법이다.

천무십칠성. 아니 이제는 고작 열 개에 불과한 무림의 별을 대신하여 그보다 강력한 다섯 명. 출신입화경의 고수를 지칭하는 속칭 극광오신(極光五神)에 대한 이야기가 매우 빠른 속도로 강호에 퍼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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