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6화
화산검(11)
그날 밤.
종화는 천외천이란 무엇인지를 여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분명 강호의 기준으로 보자면 초절정이라는 말로 뭉뚱그려 표현된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는 명확한 수준의 차이가 존재했다.
하지만 그 수준의 차라는 것이 그 날 그 날의 상태나 환경에 따라 크게 바뀔 수 있는 정도의 차이. 혹은 조금 차이가 나는 경우더라도 그래도 둘이 합공하면 어찌어찌 해결될 수 있는 수준에 불과했다.
하지만 굴불신마 영무결은 달랐다.
그가 아주 가까이 다가오는 그 순간까지 아무도 그를 느끼지 못했다.
“맙소사!!”
존재감이 희미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너무나도 거대하기에 오히려 감각을 마비시켜버렸다고 해야 할까?
가장 먼저 그를 감지한 것은 그래도 개중에 가장 나은 실력자인 남천관일 단상목이었다. 그가 창을 크게 휘둘러 혁리광을 뒤로 물리고 허공을 향해 창을 뻗었다. 그리고 동시에 아차 하는 마음이 들었다. 갑작스럽게 느껴진 압도적인 존재감에 반사적으로 창을 찔러내기는 했으나 적대적인 상대가 아니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었다.
물론 그것은 괜한 걱정이었다.
-쾅!!!
“그래도 강호의 명성이라는 것이 아주 헛소문은 아니로구나. 개중에 네가 제일 낫다. 미혹됨이 없이 전력을 다해온다면 어떤 모습일지 제법 궁금하다.”
하늘에 떠 있는 해를 꿰뚫었다던 관일창은 고작 사람의 손바닥에 막혀 더 나아가지 못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영무결이 검지와 엄지를 오므려 단상목의 창끝을 움켜쥐었다. 단상목이 힘껏 창을 움직이려 했으나 무용지물. 그야말로 산악에 깔린 것처럼 창은 옴짝달싹하지 않는다.
“시······, 신마?”
정신없이 단상목을 향해 달려들던 혁리광은 한 박자 늦게 그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 동작에는 파탄이 없었다. 마치 본래부터 영무결을 상대하려 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그 양손이 영무결의 가슴과 복부를 노렸다.
허나 고작 한 걸음.
그저 강하게 땅을 밟은 것만으로 혁리광의 몸이 땅에서 한 치 떠올랐다. 그리고 그것으로 자연스레 그의 동작이 무너졌다. 동시에 뻗어나온 영무결의 발끝. 혁리광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그 양손으로 발끝을 막아내는 것이 전부였다.
-쾅!!!
“나쁘진 않다.”
혁리광의 몸이 한순간에 십여 장에 가까운 거리를 튕겨 나갔다. 하지만 끝이 아니었다. 아슬아슬하게 싸움을 이어가던 모용준경과 내관. 두 사람 역시 갑작스럽게 등장한 영무결의 존재를 느꼈다.
대화는 필요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두 사람 모두 내뻗던 손을 거뒀다.
지금까지의 싸움을 통하여 서로를 파악했기 때문일까? 그 합을 맞추는 것이 오늘 처음 만난 사람들 같지 않다. 적어도 수십 번은 호흡을 맞춰본 것 같은 연수합격.
영무결이 단단히 쥐고 있던 단상목의 창을 끌어당겨 그 창대를 움켜쥐고는 마치 철퇴처럼 그 창의 반대편을 잡고 있던 단상목을 휘둘렀다.
물론 남천관일 단상목 역시 강호에 이름을 널리 알린 고수다. 그의 의도대로 쉽게 움직이지 않는다. 단상목의 강철 창은 세 개의 부품을 하나로 연결한 기물이다. 그가 손목을 회전시켜 창의 끝단을 분리했다. 십이 척 장창이 한순간에 팔 척의 강철봉으로 변신했다.
“호오.”
“신마 당신이 대체 어째서!!”
“지금 입으로 하는 대화가 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그저 이렇게 만났으니 한바탕 어울리면 그만인 것을.”
영무결의 손바닥이 단상목을 위협했다.
그렇기에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합공.
세 명의 초절정 고수가 영무결을 압박했다.
-아이야, 뭘 그리 멀뚱히 보고만 있느냐.
그리고 동시에 종화의 머릿속에 영무결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종화가 깜짝 놀랐다. 지금 이 상황에서 자신에게 전음까지 보낸다고?
보통 사람이 초절정 고수 셋, 아니 곧 합류할 이까지 넷을 앞에 두고 이런 전음을 보냈다면 객기가 지나치다 비웃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 저 자리에 서 있는 이는 굴불신마다.
그녀는 무한 혈사 당시 대제사장이 보여줬던 신위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 그것을 살피기에 당시 그녀의 수준은 너무 낮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대제사장이 행했던 일의 결과는 똑똑히 알고 있었다. 그 자리에 없던 많은 이들은 결과만 두고 대제사장이 다수의 제사장들을 데리고 왔기에 가능했던 결과라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당시 대제사장이 단신으로 수백의 절정 고수를 묶어두고, 서넛의 초절정고수가 벌이는 합공을 막아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심지어 그 가운데는 당대 최고의 무인으로 꼽히던 무신 모용경과 우화등선에 성공한 파검 좌부원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지금 저기 서 있는 이는 굴불신마.
무려 마교의 대제사장과 함께 중원 최악의 적으로 불리던 활불을 무릎 꿇린 사내다. 만약 그의 실력이 대제사장에 필적한다면 오히려 다섯의 초절정 고수로도 부족한 감이 있을 터. 종화가 사양하지 않고 자신의 검을 움켜쥐었다.
굴불신마 영무결이 자신의 역량을 마음껏 드러냈다.
고수를 상대하는 것은 언제나 즐겁다. 물론 하나하나의 수준은 만족스럽지 못했으나 각자의 방식으로 경지를 넘어선 고수들이다. 특히 저 젊은 여자아이. 운호와 같은 불가사의까지는 아니다. 하지만 자신에 버금가는 재능을 타고났다.
천마신공(天魔神功)
욕계 제 육천에 거하는 마왕 마라 파피야스의 이름을 딴 무공이 펼쳐졌다.
아니, 어쩌면 그것조차 옳지 않다.
애당초 마(魔)라는 글자 자체가 마라 파피야스를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글자다. 그렇다면 천마라는 단어가 먼저였을까? 아니면 천마신공이라는 무공으로 인하여 천마라는 단어가 만들어진 것일까.
종화가 내뿜는 태을의 기운이 천지를 억누르는 거대한 마기를 와해시켰다.
세상천지가 있기 전에 존재했던 그 신령한 기운 앞에서는 마라 파피야스의 이름을 딴 그 거대한 마기조차도 그저 한 종류의 힘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 현상 앞에서 영무결은 호탕하게 웃었다.
“천마는 본디 십팔억의 군대를 가지고 있으니, 가히 그 위세가 부처조차 위협할 만하다. 허니 그 일부가 사라진다고 하여 어찌 당황하겠는가.”
천마신공(天魔神功)
협불군세(脅佛軍勢)
본디 천마란 그 기운의 강성함이 천지간의 정기조차 억누를 만하다 하여 천마라 한다. 그리고 얼마 전, 마교에서 나온 다섯의 대제사장은 다섯 천마의 힘이면 중원오악으로 불리는 영산 화산의 정기조차 억누를 수 있음을 증명했다.
하지만 지금 굴불신마 영무결이 보여주는 것은 또 달랐다.
그들이 보여준 것이 화산의 정기를 단지 억누르는 것이었다면, 굴불신마 영무결이 보여주는 것은 화산의 기운이 스스로 그의 위세 아래 굴복하는 것과 같았다.
‘이것은 마치······.’
그래, 청무진인이 보여주던 무한에 가까운 화산의 정기를 이용하는 것과 닮았다. 굴불신마 영무결이 그렇게 인간의 몸으로 신에 가까운 힘을 휘둘렀다.
그리고 그 순간, 영무결을 향해 돌진하던 내관이 크게 인상을 찌푸렸다. 워낙에 경황이 없어 바로 생각이 나지 않았었다. 게다가 서쪽은 그의 담당이 아니라 더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이런 모습을 보고도 굴불신마 영무결을 떠올리지 못한다면 동창이라는 이름이 부끄럽다.
-탓하지 않겠다. 아니, 오히려 지금에 와서 뒤로 물러나면 크게 탓하겠다.
그리고 그것을 눈치 챈 굴불신마 영무결의 전음이 그의 귀를 때렸다.
-그렇다면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왕야.
황실 최고의 고수인 현음명 최염이라면 과연 이만한 신위를 보여줄 수 있을까? 글쎄, 여러 가지 조건이 붙겠지만 그 모든 조건들을 충족시킨 상태에서 잠깐이라면 가능할지도.
하지만 장담컨대 남의 집에서, 그것도 화산과 같은 영산에서 이런 신위를 발휘하는 것은 절대 불가능할 것이다.
지금 어쩌면 황실 최고, 아니 천하제일인일지도 모르는 이에게 무료로 무공을 지도받는 셈이다. 이런 소중한 기회를 허투루 날릴 수는 없었다.
그리고 모용준경 역시 지금 영무결이 보여주는 신위가 어느 날인가 자신의 할아버지인 모용경이 보여줬던 무공의 극한에서 한 걸음을 더 나아간 것임을 직감했다. 허나 그는 지금 저 터무니 없는 마기를 휘두르는 신마라는 자가 누구인지를 몰랐다. 그렇기에 자신의 목숨이 안전하다는 것 역시 몰랐다.
화석신공(化石神功).
하지만 그의 몸속에 흐르는 무신의 피가 물러섬을 허락하지 않았다.
청동빛으로 빛나는 그의 몸이 한 걸음을 앞으로 내디뎠다.
그리고 마지막.
영무결의 발차기 한 번에 저 멀리 나가 떨어졌던 혁리광이 멋드러진 미소를 지으며 그 싸움에 합류했다.
중원 실로 멋지지 않은가. 그래, 쉰이 넘는 나이까지 죽어라 무공만 연마한 것은 결국 이런 것을 경험하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그 모든 공격 앞에서 영무결은 기꺼이 자신의 절학을 풀어냈다.
천마신공(天魔神功)
마과공덕불시인(魔誇功德佛是認).
천마의 공덕이 지대함을 부처조차도 인정하였으니, 그 지대함을 어찌 말로 다 설명할 수 있을까.
천지간에 영무결이 가득했다.
겹쳐진 세상 속에서 수없이 많은 그가 내뻗은 손이 한 점을 향하여 중첩됐다. 그리고 다섯 명의 초고수가 내뻗은 모든 공격 역시 한 점으로 집중됐다.
분명 다섯 명의 초절정 고수는 서로 다른 방위를 점하며 절묘한 시간차로 영무결을 압박했었다. 하지만 그 기묘한 초식 앞에서 모든 것이 무의미해졌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무려 다섯 명의 초절정 고수가 전력을 다해 내뻗은 공격들의 총합이다. 그야말로 산조차 힘을 품고 있었다.
-······.
거대한 힘과 힘이 충돌했다.
허나 아주 작은 소음조차 없었다.
그야말로 완전한 정적.
그리고 그 정적의 끝에 제 자리에 두 발로 서 있는 것은 오직 굴불신마 영무결뿐이었다.
제각기 정신을 잃고 널브러진 네 명의 초절정 고수들.
그리고 그 가운데 오직 하나.
남천관일 단상목만이 이제는 창이라 부르기도 힘든 짧은 금속 조각을 움켜쥔 채 한쪽 무릎을 땅에 꿇고 영무결을 바라봤다.
“쿨럭······.”
“과연 생강도 늙은 생각이 더 매운 법이라더니. 이번 공격은 나도 전력을 다했거늘 제법이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 실력의 격차.
흐릿해져 가는 의식 속에서 단상목이 영무결에게 물었다.
“신마. 그대의 무공이 천하제일이요?”
“글쎄다. 천하가 이리 넓으니 어찌 그것을 확신하겠느냐. 다만 본래 이 공격을 단신으로 막아낼 만한 이는 내가 알기론 적어도 넷이 있었다. 최근에 하나가 사라졌으나 어찌 된 영문인지 다시 넷이 됐더구나.”
“허허······. 천하에 그대에 비견될만한 고수가 넷이나 더 있단 말이던가······.”
-털썩.
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 순간.
단상목은 생각했다.
범인들은, 아니 그것을 넘어선 강호의 고수들은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이들을 초절정이라는 이름으로 규정한다. 어쩔 수 없다. 땅을 기는 개미에게는 동네 뒷산이나 저 태산이나 평생이 걸리더라도 등반할 수 없는 거대한 무언가인 것은 똑같을 테니까.
하지만 과연 굴불신마와 같은 고수를. 저 무한에서 혈사를 일으켰던 대제사장과 같은 고수를. 그저 자신과 같은 초절정이라는 이름으로 묶을 수 있는 것일까? 절정의 고수가 인간의 영역에서 힘껏 팔을 뻗은 경지라면, 초절정의 고수는 절정을 초월하여 인간의 영역에서 크게 뛰어올라 마침내 신의 영역에 손끝 정도를 들이민 경지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남천관일 단상목.
동창에서 칭하기를 천풍이(天風耳).
그가 생각하기에 지금 굴불신마가 보여준 위용은 인간의 그것을 명백히 벗어나 신의 경지에 발을 들이밀었으니 단순히 절정을 초월했다는 표현보다는······.
‘그래, 출신입화경(出神入化境). 출신입화경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