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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파 역대급 천재-254화 (254/288)

254화

화산검(9)

금의환향이라는 말이 있다.

성공했다면 응당 비단옷을 입고 고향을 한 번 밟아줘야 한다는 뜻이다.

사람이란 본래 그렇다.

밥 먹고 살기 힘들 때는 그것에 집중하지만 이제 먹고 살 만해지면 사회적인 인정이라는 것이 필요해진다. 그것이 명성이고 권력이다.

무림인 역시 마찬가지다.

한 자루의 검이 되어 날아가던 종화가 어느 지점에 내려와 나지막하게 소리쳤다.

“어디서 오신 고인들인지는 모르겠으나 지금은 선약이 있어 곤란하니 저와 볼일이 있으시거든 따로 약속을 잡아주시지요.”

잠깐의 정적.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 것은 운남성을 대표하는 고수인 점창의 남천관일(南天貫日) 단상목이었다.

“허허, 네 사조와는 교분이 있어 한 번 본 적이 있었는데 워낙에 오래간만이라 기억할는지 모르겠구나.”

“단 어르신을 뵙습니다.”

“어이쿠, 기억하는구나. 십오 년 전에 봤을 때는 요만한 아이였는데 언제 이리 아름답게 자라났는지······. 검선 선배가 봤다면 크게 자랑스러워했을게다.”

“감사합니다.”

종화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헌데······?”

“크흠, 나는 뭐 너와 특별히 볼 일이 있다기보다는 그저 아는 얼굴을 봐 반가운 마음이 절반. 그리고······.”

단상목이 눈을 크게 떴다. 그 순간 어마어마한 기파의 흐름이 주변을 휩쓸었다. 그리하여 주변을 소란스럽게 하던 풀벌레 소리부터 심지어 나뭇잎에 바람이 스치는 소리까지 모든 소음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오직 고요뿐.

“혹여나 누군가가 해코지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의 마음이 절반 정도였겠구나.”

그야말로 절대고수의 풍모.

남천관일 단상목의 언행에는 감히 뉘가 있어 이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강호에 이름을 떨쳐 온 나에게 반박할 수 있겠느냐는 자신감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그 순간 또 다른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화려한 의복. 이마에는 용이 수 놓인 영웅 건을 둘렀다.

전체적으로 이야기에 나오는 젊은 협사의 복장 그대로였지만 그 복장을 입고 있는 주체가 그런 옷을 입기에는 조금 묘했다.

분명 잘생긴 사내였다. 하지만 보통 저런 의복을 걸치는 것은 약관의 무림 초출. 혹은 기껏해야 이립 이전의 젊은 사내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지금 등장한 이 사내는 아무리 젊게 본다고 해도 지천명 이전으로 보기는 힘들다.

“거참, 이제 슬슬 은퇴해서 손주 재롱이나 보셔도 될 것 같은 영감님이 손녀뻘 되는 여자애 앞에서 그 무슨 추태요. 집에서 증손주 보고 있을 손녀 며느리 보기 부끄럽지도 않소이까?”

그리고 그 묘한 복장의 사내는 고작 한마디 말로 마치 남천관일 단상목을 나이는 먹을 대로 먹은 주제에 어린 여자에게나 껄떡거리는 파렴치한으로 만들어버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단상목은 그자를 단매에 때려죽이겠다 창을 뽑아들 수 없었다. 주변에 숨은 다른 고수들을 생각해서만이 아니었다.

“누구냐.”

이 사내의 등장 직전까지만 하더라도 일대는 남천관일 단상목이 내뿜은 기세 아래 놓여있었다. 하지만 이 기묘한 사내는 자신의 주변으로 교묘하게 단상목의 기세를 완벽하게 흘려내고 있었다.

초절정의 고수다.

“혁리광이라고 하외다. 뭐 별호는 이번이 초출인지라 없지만 개인적으로는 무신 정도가 적절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소.”

“혁리광?”

들어본 적은 없는 이름이다.

하지만 혁리 씨라면 짐작이 가는 구석이 있다.

“단양의 혁리백에게 재능이 뛰어난 아들이 셋 있다고 들었던 기억이 얼핏 나는구나.”

“맞소. 뭐 무공에 재능은 오직 나 뿐이었지만. 형님들도 나름대로 재능이 있긴 했지.”

“실로 무례하기 짝이 없구나. 석년 네 아비도 내 앞에서는 예를 갖췄다.”

“그때는 영감이 무례했던 거지. 우리 아버지가 영감보다 적어도 서너 살은 많았을 텐데. 아아, 뭐 그걸 탓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요. 강호의 법라는 것이 본래 그렇지 않소. 나도 그 법 참 좋아한다오.”

“강호의 법?”

혁리광이 자신의 주먹을 들어 보이며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내보였다.

“이거 쎈 사람이 대접받는 법 말이요.”

그 예의 없는 말에 단상목의 말문이 턱 막혀왔다. 당장이라도 창을 휘두를까? 그리고 바로 그 때. 또 누군가가 단상목의 기세를 헤치고 들어왔다.

“녀석 말 한번 번지르르하게 잘하는구나.”

“응?”

대체 저 장대한 체구를 어떻게 그렇게까지 완벽하게 숨기고 있었던 것일까?

구 척에 가까운 체구. 제멋대로 뻗은 수염. 연의에 나오는 연인 장비가 다시 태어난다면 저럴까? 실로 철탑과도 같은 사내였다.

단상목은 그 모습에서 무언가 떠오를 것 같은 간질간질함을 느꼈다.

“뭐, 싫지는 않다. 다만 그 별호 말이다. 그건 너에게 좀 어울리지 않는구나.”

“별호? 뭐? 무신?”

“그래, 그 별호를 쓰려거든 적어도 나에게는 허락을 받아야 하거든.”

“허락이라고? 대체 네 녀석이 뭔데 나에게 별호를 허락하느니 마느니 하는 거냐?”

“무신의 손자.”

“무신의 손자?”

그 순간 단상목이 탄성을 내질렀다.

“아!! 네가 황이의 첫째인 준경이로구나. 황이는 잘 있느냐?”

“네, 아버지는 잘 계십니다. 그나저나 인사가 조금 늦었습니다. 아버지께는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강호 여기저기 안 가보신 곳이 없으시다고······. 모용세가의 소가주인 모용준경입니다.”

“허어······. 네가 어찌 벌써······.”

십 년 전.

마지막으로 봤을 때, 당시 무신 모용경의 아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무력을 지녔던 모용황조차도 아직 초절정의 경지에 발을 디디지 못한 상태였다. 헌데 그 손자인 모용준경이 벌써 초절정의 경지에 이르렀다니.

지금 그의 등 뒤에 고작 이십대에 초절정의 경지에 오른 아이가 있어 충격이 덜하지만 벌써 오십대 초반에 초절정에 오른 이가 둘이다. 그와 같은 세대였던 천무십칠성 가운데서는 최강을 다투던 무신과 권신만이 그런 성취를 보였었다.

“흐음······. 할아버지의 별호이니 네 허락을 받아야 한다라······. 그래, 뭐 좋다. 무신 모용경노사 정도면 그런 존중을 받기 충분한 인물이었지. 그렇다면 겸허하게 무신 대신 무황 정도로 별호를 수정하도록 하마.”

“흥흥흥······. 하여간 이래서 무식한 무림 것들이란······. 처맞아야 겸손이라는 것을 배우는 족속들인가 봅니다. 감히 무엄하게 황(皇)이라니요.”

“응?”

이제는 그리 놀랍지도 않았다.

코끝까지 가리는 새하얀 가면을 쓴 뚱뚱한 사내가 나무 위에서 사뿐하게 땅으로 내려앉았다. 가벼운 수법이었으나 땅에 진동은 고사하고 공기의 흐름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초절정이라고 하여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경공, 혹은 암행에 대가다.

“동창?”

“역시 순풍자(順風子)라는 이름이 부끄럽지 않은 견문과 눈썰미로군요.”

“순풍자?”

“동창 놈들이 제멋대로 부르는 이름이다. 신경 쓸 필요 없다. 그나저나 동창에 그만한 무공에 턱선을 보아하니 아직 환갑도 되지 않은 것 같은데다가 이런 곳에 나온 것을 보니 아직 십이지신에도 이름을 올리지 못한 놈이로구나.”

“홍홍홍, 이번에 무한에서 잔뜩 죽어 나간 무림과 달리 관부는 아직 인사 적체가 심해서 말이지요.”

앞에는 이제 고작 지천명 초반에 불과한 세 명의 초절정 고수.

그리고 뒤로는 아직 이립도 되지 않은 젊은 초절정 고수.

단상목은 수십 년 전 장강의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어낸다(長江後浪推前浪)고 한탄하던 선배들의 심정을 드디어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부웅!!

단상목의 등과 허리춤에 세 조각으로 나뉘어 걸려있던 장창이 어느새 조립되어 그의 손에 들어왔다. 젊은 시절부터 지금까지 수만 번을 거듭해온 동작은 그 자체만으로 하나의 신공절학과 같았다.

어느새 그와 세 명의 젊은 고수들 사이에 긴 선이 하나 그어졌다.

“네 녀석들의 자기 소개는 잘 들었다. 하지만 오늘은 여기까지다. 이 아이의 이야기처럼 볼 일이 있거든 따로 약속을 잡도록 해라.”

혁리광이 미간을 찌푸렸다.

방금 전의 일 초는 실로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 어찌하여 천무십칠성이라는 이름이, 남천관일 단상목이라는 이름이 사해를 진동시키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게 영 상대 못 할 것 같냐 하면 그건 또 아닌 것 같단 말이지.”

대체 언제 적의 천무십칠성인가.

지난 번 무한에서의 혈사로 죽어나간 이가 수두룩하다. 하지만 아직도 사람들은 천무십칠성을 이야기한다. 본래 빈 자리가 있으면 그 자리를 채우는 사람이 생기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다.

허나 그 당연한 일이 당연하지 않았던 것은 무한에서의 그 충격적인 사건. 그리고 이후 결성된 무림맹의 영향 때문이었다.

무림의 명성은 어떻게 퍼지는가.

결국 싸움이다.

신검 백운호의 이름이 널리 퍼진 것은 그가 그만한 고수들과 싸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싸움들은 대부분 관부, 혹은 오랑캐들과의 싸움이었다. 현재 무림맹은 마교라는 대적으로 인하여 무림 전반에 걸쳐 매우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고, 덕분에 명성을 얻은 무림인들 간의 싸움은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었다.

“본래는 그 신검이라는 녀석과 싸워 볼 생각이었는데······. 천무십칠성이라. 뭐 이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거기 두 사람. 방해를 할 생각이라면 지금 이야기하라고. 먼저 손 봐줄 테니까.”

“글쎄, 난 등 뒤에 믿을 수 없는 놈을 둔 채로 무식하게 싸움부터 벌이는 유형은 아니라서.”

“홍홍홍, 생긴 것은 딱 그렇게 생긴 작자가 그런 유형은 아니라고 하니 참으로 재밌군요.”

모용준경과 이름 모를 동창의 내관이 서로에게서 한 걸음씩 멀어졌다.

“그렇다면!!”

혁리광이 단상목이 그어둔 선을 가볍게 넘어섰다.

관일창(貫日槍).

사일검(射日劍)과 함께 점창을 대표하는 신공.

저 하늘의 해를 꿰뚫는 것과 같은 속도로 한 자루의 창이 날아들었다. 그 속도는 그야말로 빛과 같아서 혁리광이 인지 가능한 속도를 넘어선 곳에 존재했으니 혁리광의 발이 선을 넘어서는 순간과 단상목의 창이 그의 어깨에 닿는 순간은 동시라고 봐도 무방했다.

-쾅!!!!

혁리광의 몸이 순식간에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쯧.”

단상목이 인상을 찌푸린 채 가볍게 혀를 찼다.

본래라면 이런 거대한 소음이나 저런 요란한 밀려남 따위 없이 그저 조용히 혁리광의 어깨에 딱 그 창날만한 구멍이 생김이 옳았다. 하지만 충돌의 순간. 혁리광은 인지의 속도보다 빠르게 그 공격에 반응했다.

“쯧이라니!! 아니, 강호의 선배로써 삼 초를 양보하고 뭐 그런 것도 없는 거요? 아, 이거 비싸게 주고 맞춘 옷인데. 어쩔 수 없군.”

혁리광이 입고 있던 화려한 비단옷은 어깨가 폭발하듯 날아가 완전히 걸레짝이 되어 있었다. 그가 균형을 맞추려는 듯 반대쪽 어깨도 주욱 찢어내고는 다시 뚜벅뚜벅 단상목을 향해 걸어왔다.

“후배 대접을 받고 싶다면 선배 대접부터 제대로 해야지.”

두 사람의 싸움이 시작됐다.

그리고 같은 시간. 모용준경이 자신과 눈싸움을 벌이던 내관에게 물었다.

“자, 그러면 어쩔 생각인가? 이대로 지켜보며 어부가 되어 볼 생각인가?”

“글쎄, 그건 어부가 하나일 때 이야기겠지?”

마침내 초절정의 경지에 올랐건만 강호의 다툼은 없었고, 가문의 후계자로 군문에 종사할 수도 없었다. 그 끓어오르는 혈기를 대체 어찌 감당할 수 있을까.

화석신공(化石神功).

무신 모용경이 보여줬던 그 광세의 절학이 그 손자의 몸에서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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