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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파 역대급 천재-253화 (253/288)
  • 253화

    화산검(8)

    옥녀봉 정상.

    오늘 홍매당은 그 이름에 어울리게 온통 붉은 빛으로 가득했다. 언제부터인가 중원에서 붉은색은 가장 길한 색으로 여겨지고 있었고 그런만큼 혼례에는 온통 붉은 빛이 가득했다.

    혼례가 결정 났을 때 운호는 지참금으로 자신이 지금까지 모아온 쌈짓돈을 모조리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화산파에서 나왔던 약간의 용돈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서장에서 천인장, 오천인장으로 복무하던 당시 월봉은 제법 큰 돈이었기에 딱히 부족한 금액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남궁철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대체 어떻게 소식을 듣고 온 것인지 저 안휘에서 섬서까지 단숨에 달려온 남궁철은 터무니없는 액수의 금액을 운호의 결혼식을 위해 쾌척했다.

    “엄마야, 저게 다 비단이랍니까?”

    “비단도 그냥 비단이 아니다. 저게 전부 촉금이라고 하더라.”

    “와, 그러면 대체 저게 다 얼마야? 천 냥도 더 되는 거 아닙니까?”

    “이 녀석아. 아는 숫자가 천까지 밖에 안되니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하는구나. 일반 비단만 하더라도 은자로 열닷 냥인데, 보통 하품의 촉금이라고 해도 그 세 배는 넉넉히 받으니 여기 깔린 비단만 해도 못 해도 사천 냥은 나가겠구나.”

    “맙소사!! 사천 냥이요?”

    “뭘 그리 놀라느냐. 그 사천 냥도 하품의 촉금 기준이다. 헌데 아무리 봐도 저 비단에 놓인 수가 하품의 촉금 같지는 않아 보이니······. 이것저것 다 하면 이 혼례에 사용된 비용만 최소 이만 냥, 아니 삼만 냥은 되겠다. 과연 황제를 제외하고는 천하에서 가장 부유하다고 하더니 명불허전이로구나.”

    그날 이후 지금까지 화산파 본산은 여전히 출입이 금지된 상태였다. 오늘 입산이 허락된 곳은 오직 옥녀봉뿐. 본래 운호는 화산파 사람들과 지인들만을 초대하여 그리 크지 않은 규모로 혼례를 치를 생각이었다. 사실 운호의 지참금 규모를 생각하면 홍매당에서 자금을 보탠다고 해도 그 정도가 딱 적절했다.

    하지만 남궁철이 끼어드는 순간부터 그 규모는 기하급수적으로 커졌다.

    “현종 도사님이 귀천하셨다고 들었다. 허면 네 가족 가운데는 내가 가장 큰 어른 아니더냐. 본래 이런 경사는 어른의 말을 따르는 것이 법도다.”

    그 가족이라는 말이 좋았다.

    아주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모두 잃었다. 그를 구원했던 화산의 도사는 조가촌에서 사망했으며 그나마 그에게 은혜를 베풀었던 어른은 가족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미묘했던 그의 사부 공야찬 정도뿐이었으니까.

    그렇기에 운호는 기꺼이 남궁철에게 이번 혼례에 관한 모든 것들을 일임했다. 그리고 그 결과······.

    “형님······.”

    “어떠냐.”

    남궁철이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백마를 타고 홍매당에 올라온 운호를 바라봤다.

    그야말로 인산인해.

    대체 어디서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몰려든 것일까?

    “안 그래도 이번 화산파의 행사를 위해서 모였던 사람들 가운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아직 돌아가지 않았던 사람들이 있더구나. 게다가 발길을 돌렸던 사람들 대부분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고 말이다. 사실 이렇게 급작스럽게 사람을 모으려면 한계가 있었을 터인데, 덕분에 비교적 수월하게 사람들에게 행사를 알릴 수 있었다.”

    “그렇······군요.”

    “하지만 화산파에서 본산을 열어주지 않았던 탓에 사람들을 한곳에 모을 수가 없더구나. 덕분에 여러 연무장에 사람들이 나뉘어있으니, 일단 혼례를 올리고 시간이 나면 한 번씩 돌아보도록 해라. 물론 제일 중요한 귀빈들은 모두 여기로 모으긴 했다만 그래도 이번 기회에 네 얼굴을 최대한 널리 알리는 것도 좋지 않겠느냐.”

    어쩐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인기척이 이곳에 가득하다 했더니, 여기에 모인 사람들조차 전부가 아니었다.

    -허······. 무슨 혼례식 한 번에 어지간한 장원 몇 채를 태워버리는구나.

    최근 들어 말수가 꽤 줄어든 파검이 혀를 내둘렀다.

    “신경 써주셔서 고맙습니다.”

    “아무것도 아니다. 자자, 그러면 얼른 가보거라. 신부가 아주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을터이니.”

    운호가 백마에서 내려 천천히 걸어갔다.

    수많은 사람이 운호를 바라보며 수군댔다.

    “저게 그 신검인가?”

    “과연 실로 헌앙하구나.”

    “하지만 소문에 들리는 것처럼 그렇게 대단한 고수로는 안 보이는데요?”

    “아서라. 네 수준으로 가늠할 수 있다면 그게 진짜 고수겠느냐.”

    익숙한 얼굴들과 익숙한 기운들이 느껴졌다. 올 만한 사람들도 있었고 당연히 와야 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며 대체 어떻게 온 건지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도 있었다.

    “허······. 경지에 올랐다고 하더니 정말이었구나.”

    “허면 어느 정도입니까?”

    “나는 감히 가늠하기 힘들다.”

    “네? 나으리가 가늠하기 힘드시다 굽쇼? 하지만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최근에 화산에 큰일이 있었다고 했으니 어쩌면 그 영향이 아닌가 싶다. 이거 어쩌면 지금 북쪽만 신경 쓸 때가 아닌지도 모르겠구나. 그러니 너는 어서 내려가 공공께 이 사실을 알리도록 해라.”

    “네!!”

    그리고 그 가운데 제법 많은 이들이 산을 내려갔다.

    운호는 그 모든 것을 감지했음에도 굳이 그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것은 이 길의 끝에 있었으니까.

    -허어······. 선비는 사흘을 보지 않으면 눈을 비비고 다시 봐야 한다(士別三日 卽當刮目相對)고 하더니 그 말이 선비에게만 통용되는 것이 아니었구나.

    -오셨습니까?

    -놀라지 않는 것을 보니 이미 알고 있었던 모양이로구나.

    -아뇨, 충분히 놀랐습니다. 지금쯤 서장에서 한창 바쁘실 왕야께서 어찌 이곳까지 오셨는지······.

    -글쎄다. 막상 몇 년을 동분서주하고 나니 이제 딱히 내가 꼭 손을 써야 할 부분은 얼마 되지 않더구나. 그래도 폐관에 든다고 하고 몰래 나온 것이니 혹여라도 아는 척하지 말아라.

    -네. 그리하겠습니다.

    -크흠, 내 워낙에 놀라 눈치 없이 새신랑의 걸음을 지체시켰구나. 나머지 이야기는 차차 하도록 하자.

    청해대장군부의 좌장군.

    아니, 이제는 서평왕부의 서평왕 자리에 오른 영무결 뿐만이 아니었다. 수많은 고수들이 남들 모르게 전음을 걸어왔다. 쏟아지는 축하 인사에는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고, 꼭 필요한 인사를 나누며 꾸준히 걸었다.

    그리고 그 긴 걸음의 끝에 마침내 그녀가 있었다.

    본래도 아름다운 것은 알고 있었으나 온통 붉은 빛으로 가득한 이 혼례식장에서 홀로 초록색의 궁장을 입은 그녀의 모습은 마치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처럼 아름다웠다.

    “헌데 이런 경사스러운 날에 왜 신부가 초록색 옷을 입는 겁니까?”

    “좀 오래된 문파나 가문들은 종종 그런 경우가 있다. 당대부터 내려온 전통이라고 하는데 화산도 송나라 초기부터 내려온 전통이 있으니 이상한 일은 아니구나.”

    이후로 정신없는 행사들이 지나갔다.

    수많은 사람의 축하가 이어졌고 강진 사숙과 소여향 사모. 아니 이제는 장인과 장모라고 불러야 하는 그들이 그 내용은 그리 대단할 것 없는, 하지만 꾹꾹 눌러 담은 감정으로 충분한 덕담을 건네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행사가 끝나고 강아현이 준비된 붉은 가마에 올라탔다.

    네 명의 사내가 그 가마를 가볍게 들어 올렸다. 비단과 금은장식으로 화려하게 치장되어 그 무게가 제법 나갔음에도 불구하고 가마를 짊어지는 사람들의 면면이 워낙에 대단했던 탓에 그 무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가마꾼들이 가파른 산을 마치 평지를 내려가는 것처럼 가볍게 걸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도착한 운호의 모옥.

    홍매당이 워낙에 화려했던 탓일까? 그래도 제법 멀끔하게 고치고 꾸며둔 모옥이 심하게 초라해보였다. 하지만 강아현은 아무런 내색 없이 가마에서 내려 하늘과 땅 그리고 조사께 절을 올렸다.

    “축하드립니다.”

    가마꾼으로 사용하기에는 너무 대단한 고수들이 그 두 부부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장군께서 드디어 일가를 이루셨으니 참으로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가마를 메고 온 두 사내.

    왕효와 장당이 운호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두 분 모두 감사합니다.”

    눈치 없이 뭔가 더 이야기하려는 장당의 옆구리를 왕효가 쿡 찌르고는 뒤로 잡아끌었다.

    “하하하, 그러면 그간의 이야기는 추후에 차차 나누기로 하고 저희는 이만!!”

    장당과 왕효가 남궁의 성을 쓰는 제자 둘을 데리고 서둘러 모옥을 빠져나갔다. 그리하여 마침내 오늘 처음으로 둘만이 남은 상황.

    운호가 아현을 똑바로 바라봤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하루 종일 이런저런 행사를 치르느라 공들여 쌓아올린 화장이 조금 무너지긴 했지만 워낙에 본바탕이 아름다웠던지라 여전히 경국지색의 아름다움이라는 말이 부끄럽지 않은 얼굴이었다.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운호의 눈빛에 강아현이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앞으로 있을 혼례의 가장 중요한 행사를 그녀라고 어찌 모르겠는가.

    운호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현아, 아······, 아니. 부인.”

    “······.”

    그 낯간지러운 호칭에 아현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운호의 내민 손을 꼭 움켜쥐었다.

    옥녀봉의 기슭.

    작은 모옥에 밤은 길었다.

    ***

    종화는 마지막까지 의연하게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진심을 다해 그들을 축하했다.

    후회?

    물론 가득했다.

    어린 날. 문파의 원한을 갚아주기 위해서는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수련만을 거듭하는 것이 답이라 생각했고, 남녀간의 정이 짐이 될 것이라 확신했던 과거의 선택에 대한 후회였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는 그 선택으로 인하여 생긴 결과를 받아들일 만큼 충분히 성숙한 인간이었다. 단순히 아현이가 더 아름답기 때문이 아니었다. 중요한 순간 운호의 옆에 서있던 것이 그녀였기 때문이다.

    식의 모든 행사가 끝나고 아현이가 탄 가마가 홍매당의 문을 나서는 순간.

    아현은 등에 매고 있던 검을 뽑아 들었다.

    “어!?”

    주변 사람들이 놀랄 겨를도 없었다.

    그저 두둥실 떠오른 검을 따라 그녀의 몸이 하늘 높은 곳으로 사라졌다.

    “거······, 검선?”

    자기 옆에 있던 젊은 종남의 여제자가 종남의 검선이 보여주던 어검비행의 조화를 보여줬다는 사실에 그 자리에 있던 대부분 이들이 깜짝 놀랐다.

    그리고 그 어검비행에 놀라지 않은 이들 가운데 몇몇은 남들 눈을 신경 쓰지 않은 채, 그리고 몇몇은 남들 눈에 띄지 않게 슬며시 그녀가 사라진 곳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리고 그렇게 몸을 날린 이들 가운데는 천무십칠성. 아니, 이제는 너무 많은 이들이 죽어 그리 부르기도 힘들어진 중원의 대표 고수 가운데 하나. 오랜 시간 점창을 대표해온 고수인 남천관일 단상목이 포함되어 있었다.

    ‘흐음, 검선 그 늙은이가 그토록 자랑하던 아이가 저 아이인가? 과연, 신검이라는 그 아이도 놀라웠지만, 이 아이도 그에 못지않구나. 하지만 아직 어려서 그런지 조심성이 없군. 이렇게 모두가 보는 자리에서 자신의 실력을 공공연하게 드러내다니. 여기선 검선 그 늙은이를 봐서라도 내가 좀 지켜줘야겠어.’

    그를 제외하고도 그 아이를 쫓는 여러 기척이 느껴졌지만, 그는 자신했다.

    아마도 무한에서의 혈사 당시에도 자신이 무공에 약간의 깨달음을 얻어 폐관에 들지만 않았더라면 그런 최악의 결과는 나오지 않았으리라.

    어디선가에서는 남녀 간의 사랑이 이뤄지는 시간.

    강호에 이름을 떨칠만한 고수들의 만남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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