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2화
화산검(7)
“그렇······습니까?”
-쾅!!
한 자루의 두꺼운 장검이 크게 튕겨 나갔다.
“흐음, 그 수법은 볼 때마다 참으로 신묘하구나.”
천하에 가르는 것이 없을 무형 검강의 절삭력을 그저 단순한 타격으로 흩어버리다니.
물론 절대적인 힘의 총량 자체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인지 그렇게 풀린 힘의 크기가 실로 막대하긴 했지만 어쨌거나 상대하기 까다로운 기운을 자기 마음대로 비교적 처리하기 쉬운 형태로 변환시킨다는 것 자체가 사기적인 수법이다.
한 자루 장검을 쥔 처녀가 다시 한 자루의 검으로 변했다.
처음에는 제법 집중의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비무가 이어지는 동안 그 시간은 점점 짧아져 이제는 고작 숨 한 번 들이킬 시간도 걸리지 않는다.
물론 그 정도 시간이면 주고수만한 고수에게는 검을 휘둘러도 수십 번을 휘두를 만큼 긴 시간이었지만 참았다. 애당초 이기겠다는 마음보다는 상대의 역량을 박박 긁어내서 재미를 보고자 하는 마음으로 하는 비무였으니까.
한 자루 검이 날아든다.
태을이라고 했던가? 그 주변에 일렁이는 이상한 기운은 한층 더 안정됐다. 하지만 아직이다. 역량의 차이는 압도적이다.
무엇보다.
바로 어제의 풍경이 그려진다.
여전히 그들의 대화는 이해할 수 없었다. 뭐, 무슨 말을 하는지 대충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이 와닿는 이야기인가 하면 전혀다.
하지만 한순간. 운호가 그 관옥 구슬을 깨트리고 보랏빛 연기를 들이마셨을 때.
보통 사람이라면 인지할 수도 없을 찰나(刹那).
아니, 찰나를 다시 찰나로 쪼갠 것 같은 그 짧은 시간. 조왕 주고수는 똑똑하게 그것을 목격했다.
사람이 일순간 수천만 개의 작은 빛으로 분해됐다가, 다시 사람의 형상으로 돌아왔던 그 장엄한 광경을.
날아드는 검을 향하여 주고수의 검이 움직였다.
그가 휘두르는 검은 전장의 검이었다. 그의 할아버지가 저 달자들의 피로 창안했으며, 동료였던 이들의 핏물로 발전시켰고, 마침내 그의 아버지가 조카의 피로 완성한 만승의 검이다.
그의 할아버지는 자신의 욕망에 충실했다. 그의 아버지 역시 자신의 욕망에 충실했다. 대의라는 명목이 있었으나 그것은 분명 그들의 욕망이었다. 군왕은 무치(君王無恥)하며 그렇기에 만승의 검이다.
주고수는 자신의 형을 존경했다.
비록 무공에 자질은 부족하였으나 그는 용서를 아는 좋은 형이었다.
주고수는 자신의 조카를 기억했다. 그 작은 손발로 꼬물거리던 그 아이가 아무리 시커먼 사내놈이 됐다고 한들 어찌 징그럽기만 할까.
그렇기에 주고수는 만승의 검을 완성할 수 없었다.
마인들과의 그 치열한 싸움을 끝냈음에도 그의 검은 아주 조금 더 밝아지는 데 그쳤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
그 우화등선이라고 했던가?
참으로 아름답구나.
맞지 않던 옷을 걸친 사내가 마음에 쏙 도는 옷을 찾아냈으니.
그저 마음이 바뀌었을 뿐임에도 그 검의 움직임은 사뭇 달랐다.
-콰과과과광!!!
종화가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주고수의 흥이 크게 올랐다.
“그래!! 뭐 사내가 좀 없으면 어떠하냐. 내 살아보니 남녀 간의 정이라는 것은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더구나.”
물론 그 흥이 올라한다는 말이 이제 막 좋아하던 남자의 혼사를 알게 된 여인에게는 참으로 무신경한 말이었으니 그야말로 참으로 조왕 주고수다웠다.
“왕야께서는······. 종남에서 수학하는 것이 어쩌면 더 좋으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종남이라!! 그래, 어쩌면 도사의 삶도 그리 나쁘지 않았을지 모르겠다.”
평생 동정으로 사는 것이 더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비꼬는 아현의 이야기를 그저 도사의 삶 정도로 받아들인 주고수가 한층 힘차게 검을 휘둘렀다.
-우우웅
황룡검이, 아니 신검 두베가 그의 의지에 응했다.
화산에서의 시간.
그렇게 두 명의 초절정 고수가 절차탁마(切磋琢磨)라는 표현에 더없이 적합한 나날을 보냈다.
***
화산(華山).
아니, 더 엄밀히 말하자면 그것은 화산이 아니었다. 그 산의 기세는 화산을 닮았으나 그 세부적인 형태를 살펴보자면 화산과 크게 달랐다.
몽원경이었다.
본래 단 하나밖에 없던 봉우리는 어느새 그 팔을 넓게 뻗어 산맥을 형성하였으니 그 모습은 사뭇 화산을 닮아 있었다.
하지만 반야검의 영향일까? 운호가 그려낸 화산은 현실의 화산과 크게 달랐다. 조금 더 부드러웠으며 조금 더 따듯했다. 또한, 현실의 화산은 그 형상이 꽃과 같다 하여 화산이라 이름이 붙었으나, 꽃의 산이라는 이름과 달리 그야말로 거대한 돌산인지라 제대로 된 꽃나무 하나 찾아보기 힘들었다. 하지만 운호가 그려낸 화산에는 희고 붉은 꽃들이 군데군데 가득했다.
운호가 사뿐히 걸음을 옮겨 검을 휘둘렀다.
활불은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스스로 바즈라파니를 말하던 활불이 없었으며, 마교의 대제사장인 티샤 마이트레야를 스승이라 말하던 조금 더 정의롭던 활불 역시 없었다. 남은 것은 그저 활불의 껍데기를 한 이제 거의 남지 않은 희미한 백의 잔영뿐이었다. 그 늙고 희미한 잔영이 하는 것은 그저 운호가 휘두르는 검을 바라보는 것뿐.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과거, 몽원경에서 파검이 사라지고 활불이 다시 나타나기 전. 홀로 외로이 검을 휘둘렀던 시절보다는 지금이 훨씬 좋았다. 그저 누군가다 지켜본다는 것만으로도 그 외로움은 절반 이상 줄어드는 법이다.
또한, 선단(仙丹).
과연 연단사 일족 이천년의 비원이라고 하더니, 그런 거창한 이름을 붙일만한 영단이었다. 지금까지 먹어왔던 자소단은 음식에 가까웠다. 이야기 속의 영단처럼 물처럼 스르륵 녹아 흘러내리는 그런 일은 없었다. 꼭꼭 씹어 삼켰고 몸 속에서 몇 달에 걸쳐 천천히 영향력을 발휘했다. 하지만 선단은 완전히 달랐다.
관옥을 깨고 나온 보랏빛 기체를 흡입하는 그 순간, 운호는 즉각적으로 평소 지상의 법칙을 벗어나 천상에 도달하던 그 시점을 경험했다. 그것도 거의 극한에 가까운 수준으로.
무언가 잘못된 건가?
하지만 걱정도 잠시.
그렇게 분해됐던 몸은 순식간에 다시 조립됐다. 그것도 매우 단단하고 강력하게. 환골탈태라고 해야 할까? 아니, 아니다. 그보다는 양신(陽神)에 더 가깝다고 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정말 순간적인 초월이었기에 살필 수 있는 것은 크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초월자의 시점이다. 다시 지상에 내려와 헤아려보니 얻은 것은 실로 적지 않았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지금까지 운호는 초월에 가까이 다가갔을 때 얻었던 정보 대부분이 휘발되어 사라지고 없었지만, 이 선단을 통하여 경험한 초월 속에서 얻은 정보들은 그의 머릿속에 단단히 박혀있다는 점이었다.
검을 휘두르며 자하기공의 깨달음을 정리했다.
아니, 그것은 엄밀히 말하자면 깨달음이 아닌 그 구조에 대한 이해였다. 몽원경에서의 수련을 현실 세계로 가져갈 수는 없었다. 여기에서 아무리 몸을 단련한다고 해도 현실의 몸이 단단해지지는 않았으니까. 하지만 적어도 이곳에서의 경험 그리고 기억은 또렷하게 남았다.
그리하여 운호가 눈을 뜨고 한 차례 호흡했을 때.
그의 코와 입에서 보랏빛의 기운이 또렷하게 흘러나왔다.
-우우웅
그의 단중혈이 강하게 진동했다.
기해혈에 쌓여있던 포원공의 기운이 흔들리지 않고 단단히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아무 특징 없이 그저 단단하기만 한 기운이었지만 십삼 년이나 수련해온 기운이었다. 중심을 지키기에는 충분했다. 무엇보다 현재 운호의 몸은 도가의 꿈 가운데 하나인 양신(陽神)아니던가.
과거 누군가는 양신을 이룩하는 것이 곧 신선이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강진이 만들어낸 선단은 단지 그것을 복용하는 것만으로 양신을 가능케 했으니 그 목표를 이뤘다고 볼 수 있을지도 몰랐다.
운호의 코와 입으로 들어온 보랏빛의 또렷한 기운은 그 단중혈에서 마치 액체처럼 변화했는데 거기까지는 평소와 같았으나 단중혈에서 이뤄지던 강력한 진동이 그것을 한층 더 높은 성질로 이끌었다.
본래라면 단중혈이 충만하여 더이상 채워지지 못하는 상태까지 이르러서야 도달할 수 있는 경지였으나 이미 성취를 이룩한 청허진인의 도움. 그리고 자하기공에 대한 운호의 높은 이해. 무엇보다 그 의지가 곧 자신의 육체로 이어지는 드높은 경지가 그것을 가능케 만들었다.
운호의 단중혈에 모인 자하기공의 기운이 물과 같은 액체를 넘어 마치 끈끈한 진액처럼 변화했으니 본래 그 물과 같은 기운의 양이 백이었다면 이 진액의 양은 일에 불과하였으되 그 힘의 크기는 오히려 그 반대였으니 그것이야말로 자하기공의 사단공. 오직 자하기공만을 익힌 무인들을 기준으로 절정이라 평가하는 경지로 운호가 여기까지 도달하는데 걸린 시간은 불과 한 달에 불과했다.
“후우······.”
가볍게 호흡을 내쉰 운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햇빛을 제대로 못 받은 것 같은 새하얀 빛을 띄고 있었다.
물론 본래 자하기공을 일정 이상 성취하면 얼굴이 보랏빛으로 물들고 성취가 깊어질수록 그 보라색이 더 진해지지만, 운호의 경우 육신에 자하기공이 영향을 미칠 만큼 그 기운이 충만해지기도 전에 그 기운을 응축하여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상황이었던 터라 무려 사단공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그 얼굴빛은 이제 막 자하기공에 입문한 제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형, 기침하셨습니까.”
“그래.”
운호가 미리 준비된 옷을 하나씩 꺼내 입었다.
본래 운호가 입는 옷은 화산에서 지급하는 무복과 도복들로 과거 중원을 떠돌아다니며 옷이 헤졌을 때도 그와 꼭같은 형태로 옷을 맞춰입곤 했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금실로 수놓아진 특품의 붉은 비단으로 제작된 화려하기 짝이 없는 의상을 하나씩 몸에 걸쳤다. 안휘성과 강소성을 통틀어 가장 솜씨가 좋은 장인이 만들어낸 의복답게 몸에 정확하게 딱 들어맞았다.
새하얀 피부를 감싼 붉은 비단옷이 사뭇 잘 어울렸다.
“하하하, 이것 참. 훤칠하구나.”
“형님······.”
문을 열자 그 앞에는 그의 사제인 장호 외에 여러 사람이 줄지어 있었는데 그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이는 역시 큼지막한 코가 인상적인 그의 의형. 남궁철이었다.
“역시 오늘 같은 날에 이 정도는 입어줘야지. 참고로 네가 입겠다고 했던 그 옷은 저기 가져다 버렸으니 이 경사스러운 날에 그런 궁상맞은 옷을 입을 생각 따윈 저 멀리 내다 버리거라.”
사실 운호가 본래 준비했던 옷도 남궁철의 말처럼 그리 궁상맞은 옷은 아니었다. 섬서성의 지배자인 화산파다. 아무리 경황이 없다고 해도 문파를 대표할 고수의 혼례식에 사용할 옷을 아무거나 사용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천하에서 손에 꼽히는 부호인 남궁세가에서 작정하고 준비한 옷에 비할 바는 아니다.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대체 벌써 몇 년을 미룬 일이더냐.”
둘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그의 사제인 장호가 티끌 하나 없는 백마를 끌고왔다. 중원에서 보기 드문 순혈의 대완마로 이것 역시 남궁철이 준비해온 명마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그 속도는 당연히 운호가 직접 경공을 사용하는 것에 감히 비할 수는 없었으나 오늘이 무슨 날이던가.
“네 혼례인데. 응당 이 형이 그 정도는 해줘야지.”
새신랑 일행이 옥녀봉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