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7화
화산검(2)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청허가 느낀 것은 지독한 모욕감이었다.
물론 현재 상황은 명약관화했다. 청허 자신이. 아니, 그들 모두가 틀렸고 운호가 옳았다.
즉 기종이 패배했으며 검종이 승리했다. 그렇기에 운호는 그에게 이런 모욕을 줘서는 안 됐다. 승자는 승자다워야 하고 패자는 패자다워야 한다. 그리고 청허가 생각할 때 승자의 권리는 점령이지 조롱이 아니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위험합니다.”
“위험? 무슨 위험? 설마 이전과 같은 일을 걱정하는 것이더냐? 그거라면 자하기공을 익힌 이들이 모두 모여 머리를 맞대고 있다. 굳이 증무 네가 아니더라도······”
운호가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닙니다. 지금 위험하다는 건 제 이야기입니다.”
“네 이야기?”
청허 진인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 운호는 굳이 입 아프게 말로 설명하는 대신 눈으로 보여주기로 결심했다.
그가 잠시 시선을 돌렸다. 한순간 두 눈동자가 멍해졌고 천상의 이치가 그의 머리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빛의 입자가 흩날렸고 향기로운 내음이 그 빛을 따라 흘러나왔다.
우화등선?
그것도 이렇게 갑자기?
“어······,어······, 어?”
청허가 눈에 띄게 당황했다. 그도 그럴 것이 우화등선이다.
물론 최근에 파검이라는 그도 익히 아는 인물이 우화등선에 성공했고, 마교의 그 사악한 악적이 그와 흡사한 모습을 보여준 적도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우화등선은 모든 도사의 꿈이며 그것은 청허 진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운호의 주변만이 환하게 밝아졌다.
분명 지붕과 네 벽으로 막힌 방안이었음에도 오직 운호만이 저 청명한 하늘 아래 선 것 같았다.
“문시진인······. 문시진인······.”
청허가 자신도 모르게 도호를 외웠다. 하지만 그의 놀람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후우······.”
마치 당장에라도 저 하늘로 승천할 것 같던 운호가 크게 한숨을 내뱉었다. 동시에 그의 주변을 감돌던 초월적인 기척이 모두 사라졌다. 빛이 사그라들고 향이 사라졌다. 그리하여 그 자리에 남은 것은 이제 조금 살이 오르긴 했으나 여전히 비쩍 마른 퀭한 눈의 청년뿐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보시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 제 백과 육은 너무 가벼워서 제가 조금만 고개를 돌리면 저의 영혼을 이 땅에 잡아두지 못합니다. 다행히 청무 태사조님께서 손을 써주신 덕분에 그럭저럭 버티고는 있습니다만······. 어쨌거나 이러한 이유로 자하기공이 필요합니다.”
“사형이 손을 써?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 게다가 우화등선을 막기 위해서 자하기공이 필요하다고?”
운호가 차근차근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자하기공은 단순히 마교의 대제사장이 파놓은 함정이 아닙니다. 어떻게 보자면 거기에는 그의 가장 큰 깨달음이 담겨 있습니다.”
“가장 큰 깨달음?”
“네.”
우화등선, 해탈, 탈각. 참으로 많은 용어가 있지만 결국 그 본질은 깨달음을 얻은 인간이 자신의 백육을 버리고 더 높은 차원으로 도약하는 일이다. 혼을 공명시켜 그 본질인 영을 일깨우고 그 거대한 진동으로 육과 백을 떨쳐내 마침내 더 높은 차원을 향해 나아간다.
“하지만 마교의 대제사장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지상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본래라면 불가능한 일이죠. 이건 어쩌면 그의 불가사의한 영생만큼이나 대단한 일입니다.”
“그러니까 그 비밀이 자하기공에 담겨 있다?”
“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청허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번 일이 있기 전에도 그의 사형인 청무는 종종 자하기공은 초절정의 극한을 향해 나아가지만 그저 양적인 팽창만이 느껴질 분, 마지막 질적 변환은 결코 이뤄지지 않을 것 같다는 그런 이야기를 하곤 했다.
마치 본래 딱 여기까지만 가능하도록 설계된 무공인 듯 하다는 뜻이다. 물론 이내 고개를 젓고는 걸어가는 것은 인간이고, 무공은 단지 길일 뿐이라며. 이건 그저 험한 길이라고 했지만, 지금에 와서 보니 결국 그의 이야기처럼 자하기공은 본래 그렇게 안배된 무공이었다.
“하지만······. 위험할 수도 있다. 이건 어찌됐건 그 대마두의 손길이 닿아있는 무공이다. 혹여라도 준형이에게 일어난 것 같은 일이 네게도 일어난다면······.”
“아마 괜찮을 겁니다.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것 같다는 예감이 듭니다.”
천상과 닿았던 당시.
운호는 청무와 청허. 그리고 이준형의 몸에 존재하는 특별한 색을 읽어냈었다. 그것은 대제사장이 영생하는 비밀이었다. 하지만 다시 지상에 내려온 지금. 그 당시의 전지는 이미 사라졌고 그에게 남은 것은 그저 그 당시에 느꼈든 그 희미한 감정의 잔향들 뿐이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청허를 설득하는데는 그런 불확실한 말로도 충분했다. 초절정 고수만 돼도 그 육감이 단순한 착각이 아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각의 집합일 확률이며 때론 천기를 읽었다는 표현이 더 적합한 절대적인 예지로 작용할 때가 있다. 하물며 청허가 보기에 현재 운호는 일반적인 초절정 고수의 경지조차 초월하여 거의 옛이야기에 나오는 신선과도 같았다. 그리고 그런 이의 예감이라면 그것은 사실상의 예지나 다름없다.
“좋다. 그렇다면 앞으로 매일 이 시간에 이곳으로 찾아오도록 해라. 어차피 자하기공을 배우고 싶다면 가장 충실하게 그것을 익힌 이에게 배우는 것이 좋을 터. 내가 직접 가르쳐주도록 하마.”
사실 적당히 비급 정도만 내어준다고 해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책만 보고 무공을 익히는 것과 그것을 매우 높은 수준까지 성취한 이가 지도해주는 것에는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네, 감사합니다.”
운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
종남은 이번 사태를 통해 제법 큰 이득을 얻었다.
물론 죽은 제자들이 있었고, 현재 종남의 가장 강력한 무인인 벽운 진인이 족히 일 년은 요양해야 할만한 커다란 상처를 입었지만 그럼에도 굳이 손익을 따지자면 이득일 수밖에 없었다.
검후(劍后).
그녀의 나이 이제 고작 스물여섯. 나이를 생각한다면 너무 광대한 별호다. 보통은 미래를 기대한다는 의미에서 소검후 정도만 붙어줘도 또래 최강을 칭할만하다. 하지만 어찌 그 별호 앞에 소(小)따위를 붙일 수 있을까.
종화가 검을 뽑았다.
햇살이 그 검 앞에 산산이 부서진다. 어느새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그 자리에 남아있는 것은 한 자루의 강건한 종남검뿐.
“좋구나.”
그 훌륭한 모습에 그 앞에 선 조왕 주고수가 흥을 냈다.
“두베야, 가자.”
-우우웅
그의 손에 들린 신검이 거대한 공명음을 내뿜었다. 지난 싸움이 그에게도 어떠한 도움이 됐던 것일까? 본래 무형검강이라는 이름을 붙이기에는 그 탁함이 지나쳤던 주광색의 백열하는 검강이 조금은 더 투명한 무언가로 진화했다.
종화는 감히 그것을 경시하지 않았다.
검의 형상을 한 인간. 혹은 사람의 형상을 한 검이 세상에 가르지 못하는 것이 없는 무형의 검강을 상대했다.
본래 무형검강의 장점은 예리한 절삭력에 있었다.
“태을이라고 했던가? 참으로 묘한 힘이로구나.”
하지만 종화가 내뿜는 태을의 기운이 그것을 풀어냈다. 그리하여 집적되면 집적될수록 투명하게 변해가던 그의 무형검강은 그 예리함을 잃고 그저 둔탁하게 풀려나왔다.
-쾅!!!
물론 그렇다고하여 종화가 유리하다는 말은 아니었다.
무형의 검강이 가지는 그 터무니없는 예리함이 순수한 힘으로 풀려나왔을 때, 그 충격량은 실로 어마어마하여 종남의 강검이 일순간 크게 휘청인다.
약 삼십 합.
조왕 주고수가 입을 다시며 뒤로 물러났다.
“쩝, 아쉽구나.”
“아직 괜찮습니다.”
“괜찮을 리가. 아이야 어서 가서 몸이나 추스르거라. 그래도 제법 흥미로웠다. 이제 고작 스물여섯에 이만한 성취라니. 앞으로 십 년 후가 기대되는구나.”
고작 삼십 합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것을 바라보는 종남의 늙은 도사들 눈에는 기쁨이 가득했다. 그도 그럴것이 조왕 주고수가 누구인가. 벌써 이십 년 전부터 초절정의 무위를 자랑했던 청허진인 조차 패배를 인정했던 고수 아니던가.
“과연, 사백님의 눈은 틀리지 않았구나.”
“그러게나 말입니다. 이거 우리도 어서 물러나야 하는 것 아닌가 모르겠군요.”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종남의 적자배 일대 제자 둘이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글쎄다. 본래라면 종남에 돌아가는 대로 강호의 동도들을 모아 종남에 새로운 장문인이 탄생했음을 알림이 옳았겠으나, 아무래도 벽운이 떨치고 일어나려면 제법 시간이 걸리지 않겠습느냐. 게다가 지금 상황을 생각하면 아이들에게만 모든 것을 맡기고 물러나기도 조금 그렇지. 아직은 우리가 해줘야 하는 일이 많이 남았으니까 말이다.”
“하긴, 저희는 화산과는 상황이 많이 다르니까요.”
“그보다 벽운이 걱정이로구나.”
“그래도 화산에서 반경 오백리 이내에 가장 용한 의원을 불러왔다고 하니 일단은 좀 지켜보시지요. 게다가 화산금정의 약은 강호의 일절 아닙니까. 앞으로 두 달이면 거동은 가능하다고 하니······.”
“화산에서 부상의 회복에 적극적으로 지원을 해주니 다행이다.”
“그거야 벽운이 뭐 때문에 그리 됐는데, 당연한 일이지요. 솔직히 그 자리에 벽운이나 종화가 없었더라면 화산이 입은 피해가 고작 이 정도에서 그쳤겠습니까? 그러니 저희도 고작 이 정도에 그칠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뭔가를 받아내야 합니다.”
“자자, 진정해라. 아무리 그래도 옆집에 불이 났는데 거기서 빌린 돈을 달라고 하면 그건 도적놈 소리밖에 못 듣는다. 화산은 천하제일 소리 듣던 대문파 아니더냐. 염치가 있다면 알아서 하겠지.”
말을 끝낸 적균의 시선이 저 담장 너머로 향했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 법이다.
하물며 이곳은 화산파의 안방이다. 이 비무가, 그들의 대화가 화산의 고위층에게 전해지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다.
백 년.
화산이 섬서의 제일을 넘어 중원의 제일로 발돋움하고, 그 결과로 곁에 있던 종남은 구대문파의 중위권에서 말석까지 떨어지는 데 걸린 시간이다.
스물여섯에 초절정. 어찌 기대가 되지 않을까.
‘하지만······.’
종화를 바라보던 적균도인의 머릿속에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랐다.
***
“허어······.”
바로 세 시진 전.
자하기공의 일단공에 입문한 운호의 모습을 바라보며 청허진인이 크게 감탄했다.
축기의 속도가 남달라서?
물론 아니었다.
내공이 쉽게 쌓이지 않는 체질은 운호의 타고난 천형이었다. 물론 선단을 장복함으로써 그것을 어느정도 극복했지만, 여전히 운호는 축기의 속도는 비범 보다는 평범에 가까웠다. 심지어 청허진인은 운호가 이미 초월자에 한없이 가까운 것을 알고 있었고, 그 기대 역시 거기에 맞춰진 상태였다.
청허진인이 감탄한 부분은 축기의 속도가 아닌 진기의 성질이었다.
자하기공의 핵심은 ‘양적인 축적은 언젠가 질적 변화로 이어진다.’에 있었다. 그것을 통하여 범상한 인간도 오랜 세월 꾸준히 수련하면 경지에 이를 수 있다.
분명 그런 의미에서 운호의 육체는 딱 범재 수준에 불과했다. 양적인 증가인 축적 자체가 자기 사형들인 청무, 청우, 청공. 심지어 청허 자신보다 훨씬 느리다. 하지만 지금 저 모습을 보고 있자면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운호의 호흡을 따라 희미한 자색의 서기가 콧구멍에서 흘러나왔다.
“진기의 양 따위는 의미가 없다는 것인가······.”
자하기공의 이단공.
입문한 지 고작 세 시진.
양적인 축적은 언젠가 질적 변화로 이어진다.
하지만 양적인 축적이 더 어렵다면? 그렇다면 모로 가도 목적지에 도달하기만 하면 그만 아니겠는가.
천재가 천재만의 방식으로 자하기공을 익혀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