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6화
화산검(1)
사람들은 종종 아름다운 풍경을 보면 마치 선경과 같다고 이야기한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참으로 우스운 이야기다. 대관절 누가 선경을 직접 목격했기에 풍광을 보고 선경과 같다는 말을 하는 것일까?
하지만 그런 비관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도 지금 이 풍경을 본다면 자신도 모르게 선경과 같다는 말을 내뱉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선경과도 같은 풍경 속에 그와 사뭇 어울리지 않는 까무잡잡한 피부의 남방계 노인이 하나 앉아 있었다.
“생각의 정리는 좀 끝나셨습니까.”
“······.”
실로 작고 왜소한 노인이었다.
까무잡잡한 피부와 달리 새하얀 수염과 머리카락이 인상적이다. 그가 멍한 눈으로 저 먼 산맥을 바라봤다. 산맥은 실로 웅장했으며 미려했다.
한참을 침묵하던 노인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부디 생각할 시간을 좀 달라고 말한 지 일주일만의 첫 음성이었다.
“오백 년······.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였으니 그야말로 의미 없는 헛짓거리였구려.”
노인의 한탄에 운호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 의미 없는 헛짓거리였다니. 그건 너무 관대한 평가인 듯하군요.”
“그렇소······, 그렇지. 그대의 말이 참으로 옳소이다.”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을 조금 돌려 화산에서의 혈사가 있었던 날의 밤.
몽원경에 든 운호의 앞에는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몸을 가진 거한 대신 전신이 삐쩍 말랐으니 기이할 정도로 복부만 불룩 나온 작고 비루한 남방계의 노인이 앉아 있었다.
잘 먹어서 나온 배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생명이 위험할 지경까지 영양을 보급하지 못하여 전신의 근육을 모조리 생존을 위한 힘으로 사용해버리고, 그 덕분에 복부의 근육까지 사라져 팽만한 복부가 그대로 노출된 참혹한 모습이다. 다만 기이한 것은, 그러한 몸임에도 불구하고 그 눈빛만큼은 실로 맑다는 점이었다.
말로만 듣던 천축에서 단식으로 깨달음에 도전한다는 수행자의 모습이 저러할까? 하지만 대체 어째서? 무슨 이유로 여기 몽원경에 갑자기 그런 수행자가 나타났단 말인가.
노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참으로 기이하다. 그저 한 번 눈을 감았다 떴을 뿐인데 세상이 뒤집히고, 눈앞에는 천상의 신장이 서 있으니. 내가 벌써 해탈을 한 것인가?”
“누구십니까? 아니 그보다 여긴 대체 어떻게······. 혹시 활불을 보지 못했습니까?”
“활불?”
“그러니까 키가 십일 척쯤 되고, 전신의 근육으로 가득 찬 거한인데······.”
“십일 척? 허어, 터무니없군. 이천년 전의 대영웅이라던 바즈라파니도 그만한 체격은 아니었을 터. 게다가 살아있는 부처라니. 이름 또한 참으로 재밌구려. 보아하니 제법 많은 사연이 있는 것 같은데 이야기를 좀 해줄 수 있겠소? 혹시 아오? 그래도 어디선가 보고 들은 것이 제법 되는 이 늙은 중이 도움이 될 수 있을지?”
어차피 몽원경. 운호에게 귀속된 갇힌 세상이었다. 현실의 시간과는 크게 상관도 없었고, 굳이 이야기를 못할 것도 없다. 게다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 노인의 눈을 보고 있자면 절로 입이 근질거렸다.
노인은 정말 훌륭한 청자였다. 그는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운호의 말을 경청했는데 중간중간 참으로 절묘한 순간에 추임새를 넣어가며 운호가 이야기를 풀어가는 것을 도왔다.
하지만 운호의 말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노인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졌는데, 처음에는 천하에 이런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는가? 하는 표정과 몸짓으로 운호의 이야기를 돕던 그의 추임새가 나중에 가서는 ‘어찌 세상에 그럴 수가.’에 더 가까워졌다.
“그것은 정말이지······, 실로 끔찍한 이야기구려.”
“그렇습니까?”
“이제야 내가 어째서 지금 여기에 있는지 알겠소. 그대는 나에게 미래를 경고하기 위해 찾아온 보살, 혹은 나를 미혹하려는 마귀겠구려.”
운호가 고개를 저었다.
지금까지 노인이 운호의 이야기를 들었던 것처럼, 운호 역시 노인에게서 참으로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물론 끊임없이 말한 쪽은 운호였다. 하지만 사람은 때론 말이 아닌 다른 무언가로 자신의 이야기를 전달한다.
노인은 매우 솔직했다. 그 덕분에 운호는 그 노인이 보이는 반응만으로 참으로 많은 것들을 유추할 수 있었다.
운호가 입을 열었다.
“두 가지 모두 아닙니다. 저는 그저 화산파의 제자인 백운호일 뿐입니다. 무엇보다 제가 한 이야기는 미래에 대한 경고가 아닌 이미 있었던 일에 대한 소회일 뿐이지요. 그리고 그대가 여기에 있는 이유는 그저 나와의 싸움에서 패배했기 때문입니다. 활불.”
노인의 얼굴이 고통으로 크게 일그러졌다.
그가 괴로워하는 이유는 현실에 대한 부정일까? 아니면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일에 대한 후회일까.
“부디 나에게 생각을······, 생각을 할 시간을 좀 줄 수 없겠소?”
“기꺼이.”
그리하여 운호의 기준으로는 일주일.
노인의 기준으로는 세상이 일곱 번 명멸하는 시간이 흘렀다.
***
활불이 기억하는 자신의 마지막은 그 스승의 경우를 단서 삼아 그와 비슷한 상태를 구현하는 법을 완성한 것이었다. 운호와 활불이 추측하기로 그가 그렇게까지 기억을 잃어버리게 된 것은 대제사장이 이준형의 몸을 차지하기 전에 있었던 바로 그 싸움 때문이었다.
“그나저나 몽원경이라고 했던가? 참으로 놀라운 세상이야. 어쩌면 나의 사부만큼이나 터무니없군. 인간의 백을 연료로 하여 움직이는 관념의 세계라니.”
증무진인 목운평이 이야기하기를 공과격이라고 했던 그것. 이 몽원경은 인간의 백을 불살라 힘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것이라면 대제사장이 보여줬던 그 터무니없는 이적 앞에서 운호가 그만한 힘을 낼 수 있었던 것도 납득이 됐다. 활불은 무려 오백년을 버텨온 백(魄)이었다. 그만한 세월 동안 쌓인 비대한 백이라면 그런 이적도 충분히 가능했겠지.
“사부는 세존의 제자 가운데 하나였다네. 사부의 말에 따르자면 세존께서 설법 중에 말씀하시기를 팔만사천겁의 시간이 흐른 뒤 미륵이 도솔천에서 용화수 아래로 하생하여 천하의 모든 이를 구원한다고 하셨으니, 사부께서 세존께 내가 미륵이 되겠노라 하셨다더군. 그러니 세존께서 웃으며 그것을 허하셨다고 하더군.”
마교의 대제사장이 석가모니의 제자라는 이야기부터, 그가 스스로를 미륵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 몇차례 마교의 대제사장 본인에게 들어왔다. 물론 여전히 너무나도 터무니없어 현실감이 떨어지는 이야기이기는 했지만.
하지만 그보다 지금 더 놀라운 사실은 활불이 스스로를 마교 대제사장의 제자라고 이야기하는 부분이었다. 물론 앞서 자신의 사부가 세상 누구보다 경험이 많다는 이야기나, 마교 대제사장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마치 활불 자신의 이야기를 듣던 것처럼 반응하던 모습에서 내심 짐작하기는 했지만, 그것을 직접 입으로 듣는 것과는 또 느낌이 달랐다.
“그러니까 정말 대제사장의 제자라는 이야기로군요. 허면 대체 어째서······.”
“어째서 내가 사부와 대립을 하게 됐느냐고? 글쎄, 그건 나도 기억이 없으니 알 수가 없구만. 다만 추측컨대······.”
활불.
아니, 이제는 자신이 활불이라 불렸었다는 사실조차 잃어버린 노인이 씁쓸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어느 순간 나도 내가 옳고 사부가 틀렸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아니었을까? 오백 년이라는 시간은 충분히 긴 시간이고 그대가 말한 사부의 모습들이 모두 진실이라면······. 사부 역시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잔혹해졌고 훨씬······. 조급해졌구만.”
“본래는 달랐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랬지······. 분명 그랬어. 본래 전하지 말라고 했던 테라와다의 비전을 중원에 전했던 보디다르마 그 배신자조차도 용서를 했었으니까.”
활불의 입에서 과거의 수많은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그의 말이 모두 진실이라면 중원의 무공은 결국 모두 대제사장에게서 시작이 됐고, 그의 묵인이 있었기에 발전할 수 있었다. 물론 운호가 느끼기에 활불은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 다만 그가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모두 진실일 수는 없었다
과거의 비사들이 이어졌다.
중요했지만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 혹은 중요하지 않았지만 어쩌면 중요해졌는지도 모르는 이야기.
그 긴 이야기들 속에서 운호는 활불의 무게가 점점 가벼워지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과거에는 알 수 없었던 감각. 어쩌면 이것 역시 운호가 성장했기에, 혹은 운호 본인이 저 천상에 매우 가까웠기에 느낄 수 있었던 감각인지 몰랐다.
“그렇군······. 이곳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 자체가 나의 인생을 소비해야만 하는구만.”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궁금한 것?”
그렇기에 운호는 물어야했다.
활불이라는 인간의 기억과 습관 그가 남긴 모든 것이 완벽하게 소멸하기 전에.
“마교의 대제사장은 대체 어떤 방법으로 이 땅에 남아있을 수 있는 겁니까?”
하늘과 땅을 잇는 그 거대한 용화수.
우화등선을 하는 이조차 함부로 할 수 없는 그 강대한 힘.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려 이천년이나 이 땅에 남아있을 수 있는 방법은 대체 무엇인가.
운호가 아는 것만 벌써 두 명이었다.
증무진인 목운평과 파검 좌부원.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여 신과 같은 권능을 휘둘렀을 그들조차 마교의 대제사장, 티샤 마이트레야를 처단하는 데는 실패했다.
말이 되지 않는다.
그만한 힘이 있다면 대체 어떻게 그는 이 땅에 그토록 오래 남아있을 수 있는가. 당장 그와 흡사한 상태가 된 운호 자신만 하더라도 천상의 부름을 거절하는 것이 날로 힘겨워지고 있거늘.
“응? 그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대체 어떤 방법으로 이 땅에 남아있을 수 있냐니?”
그리고 그런 운호의 질문에 활불이 대체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그러니까······.”
운호가 현재 자신의 상황을 그에게 설명했다.
그리하여 아주 사소한 일에도 깨달음을 얻고 자신도 모르게 천상으로 떠날 것 같은 상황이라는 그 말에 활불이 다시 한번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니까 자신도 모르게 열반을 할 것 같은데 그걸 막는 방법을 알고 싶은 것이로군.”
“네, 뭐 정확히는 열반이 아닌 우화등선이기는 한데. 어쨌거나 그렇습니다.”
“자네, 가까운 곳에 정답을 두고 먼 곳을 뒤지는 버릇이 있는 것 같구만.”
“가까운 곳에 정답이요?”
활불이 운호의 질문에 답을 했다.
아니, 어쩌면 제대로 답을 하지 못했다. 이 몽원경의 공과격은 대체 어떤 법칙으로 운용되는 것일까?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운호는 제법 똑똑했다.
고작 그 정도 이야기에도 그 정답을 알아낼 수 있을 만큼.
***
“뭐라고? 지금 뭐라고 그랬느냐.”
“무공을 전수받고 싶습니다.”
“물론 어려운 일은 아니다만, 아니 대체 어째서? 너도 알다시피 이것은······.”
“네, 마교 대제사장의 흉계죠. 하지만 지금 저에게는 그것이 필요합니다.”
자하기공.
마교의 대제사장이 안배해둔 가장 위대한 그릇의 설계도.
그것이 바로 가장 가까이에 있는 정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