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5화
무의 이름(18)
화산파에 예정됐던 대대적인 행사가 갑자기 취소됐다.
“아니!! 갑자기 이러는 것이 어딨소. 내가 여기 참여 하겠다고 취소한 일정이 몇 개인데.”
몇몇 물정 모르고 상황 파악 못 하는 이들은 그것에 대하여 분통을 터트렸다.
“조용히 하게.”
“아니, 형장은 화도 안 난단 말이오? 형장도 저기 광동에서 왔다고 하지 않았소. 아무리 화산이 대단하다고 해도, 우리 벽산······, 아니, 중원 각지에서 모인 이 군웅들을 모조리 무시하는 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오?”
“이 사람아. 자네는 지금 저기 저 사람들도 안 보인단 말인가?”
하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몇몇.
지금 화산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 정도는 그들 역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 입구에서 쫓겨난 것이 각 지방에서 몰려온 중소 문파만이 아니었다는 점이 그들을 더욱 자중케 했다.
“아미타불······.”
중원에 절은 많았다. 그리고 그 절에 기거하는 중의 숫자 역시 헤아리기 힘들 만큼 많다. 하지만 머리에 저렇게 세 개에서 아홉 개의 계인을 받고, 오른손으로 반장을 하는 중은 오직 소림의 승려뿐이었으니, 지금 화산의 산문을 넘지 못하고 돌아서는 저 스님들이 바로 그 중원 무림의 태산북두인 소림의 승려였다.
“아미타불······. 아무래도 화산에 아주 단단하게 변고가 생긴 것이 분명한 것 같다. 중원의 오악인 화산에 그런 끔찍한 마기라니······.”
“그래도 다행히도 화산에서 그 흉사를 막아내긴 막아낸 것 같습니다. 굉성장 현오자와 같은 고수가 산문을 지키고 있을 만큼 여유가 있으니까요.”
“글쎄······.”
그보다는 그만한 고수가 산문을 지키러 나와야 할만큼 여유가 없다는 의미가 아닐까? 소림의 공하가 말을 아꼈다.
“헌데 정말 이대로 돌아가도 괜찮을까요?”
“허면? 몰래 담이라도 넘어가랴?”
“그건 아니더라도······.”
“화산이다. 무언가 필요한 것이 있다면 무림맹을 통해 직접 청할 것이고, 시기가 되면 알아서 어련히 다 이야기를 하겠지.”
지난 백 년 동안 천하제일을 다퉜던 화산이라는 이름이 주는 신뢰감은 그토록 대단했다. 당연한 일이다. 보통 사람의 인생이 육십 남짓한 이 시대. 중원을 살아가는 대부분 이들이 태어났을 그때부터, 혹은 그들의 아버지, 할아버지 때부터 화산은 천하제일의 대문파였다.
그리하여 백 년의 시간.
그 아득한 세월이 만들어낸 신뢰의 방패 뒤에서 화산은 자신들을 휩쓸고 지나간 거대한 사건의 여파를 직시해야만 했다.
“태사조님은 신선이 되신 걸까?”
무덤과 무덤.
서른 개가 넘는 무덤이 화산에 생겨났다. 화산의 장문인이었던 굉허를 비롯하여 현종과 같이 그 치열한 싸움 중에 사망한 제자들. 그리고 오랜 시간 천하제일의 대문파 화산의 무력을 상징하던 청무 진인의 무덤이었다.
“글쎄······.”
마지막 순간.
청무진인의 주먹은 천상과 연결돼있던 운호를 뒤흔들었다.
대체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당시 운호는 그야말로 주변의 모든 것을 읽어낼 수 있는 전지에 가까운 능력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운호도 그 현상만큼은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어쩌면 당시에는 이해를 했을지도 모른다. 천상과의 연결이 끊어진 지금. 운호는 그 당시의 기억 상당 부분을 소실했으니까. 아마도 그것은 지상의 인간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지혜겠지.
“모든 신선이 우화등선 하는 건 아니잖아.”
“그래, 그렇지.”
운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도가에서 우화등선을 통해 신선이 되는 것은 매우 드문 경우였다. 대부분 도사가 시해를 통해 신선이 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이론에 따르자면 지금 그들이 묻은 시체는 진짜가 아닌 그저 그들이 남긴 유품이 시신인 양 그들의 눈을 속이는 것이다.
“사형, 사부님도! 사부님도 신선이 되셨겠죠?”
아직 약관도 채 되지 못한 나이에도 벌써 코밑이 거뭇한 사제의 이야기에도 운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도 봤잖아. 사부의 검이 사라지고 보이지 않던 거.”
과연 저 서른 개의 무덤 가운데 정말로 신선이 되어 하늘로 떠난 이가 있을까? 알 수 없었다.
바람이 불었다.
참으로 시원한 바람이었다. 화산에 거하던 명성 높은 이들이 저리 무수히 죽어나갔음에도 화산의 바람은 여전히 시원하구나.
운호의 몸이 가벼워졌다.
향긋한 꽃향기가 풍겨났고 운호의 주변이 환하게 밝아졌다.
“백운호!! 운호야!!”
“어? 어!!”
강아현의 부름에 운호가 화들짝 놀라 정신을 되찾았다.
참으로 별 것 아닌 감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순간 커다란 깨달음이 찾아올 뻔했다.
그날의 싸움 이후 고작 닷새가 지났음에도 벌써 세 번째였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모두 주변에 강아현이 함께 있을 때 이런 일이 발생했다는 점이었다. 아니, 사실 다행이라고 할만한 일이 아니었다. 강아현이 그의 곁에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닌 필연이었으니까. 처음 이와 같은 현상을 발견한 이후, 강아현은 의식적으로 운호의 주변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선단은 완전히 끊은 거 맞지?”
“응, 오늘 아침에도 향채를 넣은 밥 같이 먹었잖아.”
항상 먹던 그 끔찍한 맛의 벽곡단을 대신하여 정상적으로 식사라고 할만한 음식을 섭취하기 시작했다. 참고로 두 번째로 우화등선할 뻔한때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세상에 정상적인 음식을 먹었다고 곧바로 신선이 되어 날아갈 지경이라니. 어쨌거나 정상적인 식사를 다시 시작한 덕분일까? 운호의 얼굴에는 반질반질한 광까지 나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 반해 강아현의 얼굴에는 짙은 눈그늘이 과장 조금 보태 턱 끝까지 내려왔다. 밤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탓이다. 혹시 아는가? 장자가 백일몽에서 깨달음을 얻었던 것처럼, 운호도 자다 말고 갑자기 깨달음을 얻어 저 하늘 높은 곳으로 떠나갈지?
“그나저나 운호야. 이제 우리 화산은 어떻게 되는 걸까?”
“글세······. 일단 청허 태사조님을 비롯해서 굉자배 사조님들이 말씀을 나누고 계시니까 조만간 뭔가 결론이 나지 않겠어?”
***
“하지만 그건 너무 무책임한 일 아닙니까!!”
“무책임?”
“그렇잖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기존의 계획대로 일대 제자들이 물러난다는 것은······.”
이번 사태를 통해 화산이 입은 피해는 실로 막대했다.
화산이 자랑하던 천하제일의 고수가 사망한 것을 시작으로 장문인이 사망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 당시 화산의 주전력이라고 볼 수 있던 자하기공을 익힌 절정 고수들 전부가 한순간 내공을 완전히 잃어버렸었다. 물론 단련된 기맥과 혈맥이 그대로였던 만큼 사라진 내공은 대부분 돌아왔다. 하지만······.
청허가 회의장에 모인 면면들을 돌아봤다.
그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화산파 자하기공은 노화를 방지한다. 그것도 단순히 피부 등을 젊어 보이게 만드는 주안공과 달리 진정한 의미에서 노화를 늦춘다. 그렇기에 화산의 장로들은 보통의 경우보다 훨씬 젊었다. 보통 절정 고수들의 퇴보가 시작되는 나이는 예순을 전후로 하는데 자하기공을 익힌 절정 무인의 경우 일흔까지도 그 무위가 꾸준히 증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지금 우리 꼴을 좀 보거라.”
한순간 무공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 순간 자하기공의 힘으로 억제되던 노화가 찾아왔다. 그리고 그 여파는 엄청났다. 단순히 억제된 노화가 진행된 수준이 아니었다. 길게 당겼던 고무줄을 단번에 놓아버린 것처럼 일흔을 전후한 나이에도 불구하고 쉰에서 예순 정도로 보이던 장로들 대부분이 폭삭 늙어 마치 당장이라도 무덤에 들어가야 할 노인들처럼 변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청허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물론 초절정에 달했던 무공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환갑 정도의 몸으로 초절정의 무공을 가진 것과 아흔에 가까운 몸으로 초절정의 무공을 가진 것은 완전히 다르다. 순수하게 무력으로 따지자면 지금 청허는 이번 사태가 있기 전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 꼴로 대체 뭘 할 수 있단 말이더냐.”
“하지만······.”
“사백님의 말씀이 옳다고 봅니다. 우리가 이대로 모두 은퇴를 하고 은거해버리면 적어도 우리가 이렇게 약해졌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극히 드물어지겠죠. 오히려 아이들에겐 그게 더 도움이 될 겁니다.”
“허면 종남과 조왕의 입은 어찌 한단 말이냐. 어차피 다 알려질 사실이다.”
“그래도 최대한 조심해달라 부탁한다면 소문이 퍼지는 속도는 늦출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사이에 다시 성세를 회복해야지요. 그래도 이대 제자 이하 젊은 아이들은 우리와 달리 그 피해가 좀 덜하지 않습니까.”
“성세를 회복한다고? 대체 어떻게? 또 그 마인의 수괴가 나타나면 모조리 뺏겨버릴 신공으로?”
그 순간, 모두가 외면하던 바로 그 이야기가 외당주 굉명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무거운 침묵이 회의실을 짓눌렀다.
자하기공.
신공이라 불리며 화산파의 근간을 이루던 이 무공이야말로 이 모든 상황에 가장 근본적이며 가장 심각한 문제였다.
천하제일문파 화산을 만들어낸 그 무공이 가장 사악한 마교의 수괴가 비틀어둔 무공이었다니. 게다가 그 수괴의 몸이 화산이 자랑하는 천하제일인 백운진인의 몸이었으며, 이제 앞으로 사용할 몸이 화산의 미래를 책임지리라 기대되던 후기지수 이준형의 몸이라니.
“그래서, 굉명 사형의 말처럼 우리가 물러나지 않는다면 뭔가 방법이 있기라도 하단 말이요?”
“문을 걸어 닫고 모두가 머리를 맞대 연구를 해야지. 청무 사백님이 돌아가신 이상 여기 모인 우리야말로 자하기공에 대하여 가장 잘 아는 사람들 아닌가. 백년 전 화산에도 자하기공은 있었고, 마교의 수괴는 그것을 비튼 것 뿐이니, 마교의 수괴가 혼자 비튼 것을 우리가 개량하지 못하리라는 법은 없지. 이대로 은퇴를 하고 물러나는 것은 매우 쉬운 선택이야. 하지만 난 그래선 안된다고 생각하네. 어른이라면 마땅히 어른의 책임을 져야지.”
“좋은 말이요. 하지만 그 좋은 연구를 꼭 우리가 자리를 지키고 해야 한다는 것은 없는 것 아니요. 모두 다 같이 산으로 올라가 연구에 전념하면 될 일이지.”
지루한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아마도 지금 상석에 앉아있던 사람이 죽은 굉허진인이었다면 의견을 취합하여 조율하느라 일주야를 이어가도 끝나지 않을 토론이었다. 하지만 지금 상석에 앉아있는 청허는 조금 달랐다.
“모두의 의견은 잘 들었다. 여기서 더 이야기를 끌어봐야 같은 이야기의 반복일 것 같구나. 결정하겠다. 모든 일은 예정대로 진행한다. 그리고 물러나는 굉자배 제자들의 하산은 허락하지 않는다.”
***
참으로 초라했다.
어쩌면 지난 백년을 통틀어 가장 초라한 행사가 아니었을까? 축하하기 위해 모인 외부의 인물이라고는 종남의 무인 몇십과 조왕 주고수. 그리고 그를 호종하는 몇몇 인원뿐.
하지만 그럼에도 그 분위기만큼은 실로 장엄하였으니, 그것은 어디까지나 지금 이 자리에 선 사람의 무게감때문이었으리라.
“······그리하여 너의 사부를 대신하여 너에게 증무라는 호를 내리겠다.”
한 자루의 화산검.
칠대 만에 돌아온 돌림자 증(曾).
항렬에서 으뜸의 무공을 상징하는 무(武).
그리하여 증무(曾武).
운호가 자신에게 내려진 화산검을 움켜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