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3화
무의 이름(16)
운호의 시야가 강아현에게 닿았다.
그녀의 마음이 읽혔다. 스물다섯 처녀의 연정이라니. 참으로 뜨거웠다.
그렇기에 운호가 아주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 스스로 그 망설임에 놀랐다.
대체 무슨 이유일까? 인간성? 이미 그의 정신은 한없이 고양되어 태초의 순수한 영(靈)에 가까운 상태로 올라섰다. 헌데 고작 이 저급한 차원, 그 짧은 인생동안 쌓아 올린 인간성이 그만한 영향을 줄 수 있다고?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렇기에 선택해야 했다. 그는 아현이가 다치기를 원하지 않았다. 남궁혜처럼 편마의 저 아무것도 아닌 공격에 휩쓸려 사라지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렇기에 운호에게는 지금 이 상황을 모두 해결할만한 거대한 힘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것은 오직 더 높은 차원에 도달하는 것으로만 다다를 수 있었다.
거대한 힘이 강아현을 덥쳐왔다.
특별히 그녀를 노린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저 모든 것을 잃어버린 편마가 내뿜은 힘의 편린이었다.
“백운호!! 나는 남궁혜와는 달라!!”
강아현이 몸을 슬쩍 틀어 그 날아오는 공격을 흘려냈고, 흘려내지 못하는 공격을 튕겨냈으며 그러지도 못하는 공격에는 몇 걸음을 밀려났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강아현은 조금씩이나마 운호에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다 책임지려고 하지 마!! 그럴 필요 없어. 같이 하자.”
가까이 다가갈수록 감당하기 힘든 거대한 파편이 날아든다.
옥녀진결의 삼단공이 자연스럽게 이뤄졌다. 하지만 부족하다. 억지로 사단공의 옥녀진결을 일으켰다. 기해혈이 찌릿 아려온다.
-콰과과과광!!!
한 걸음을 더 전진했다.
그래, 고작 그 한 걸음의 차이일 뿐이었다. 옥녀진결의 사단공. 초절정 고수의 공격조차 한 차례 감당했던 그 경지에서도 감히 경시하기 힘든 강기의 덩어리들이 물밀듯이 밀려온다.
“강아현!!!”
하지만 종화가 나타난 바로 그 순간.
그녀를 위협하던 그 모든 공격들이 춘풍에 눈 녹듯 사그라들었다.
“위험하다고 오지 말라고 했잖아.”
“운호가!! 운호가 떠나려고 해.”
“알아!!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 도사가 도를 깨닫고 하늘로 떠나려는 것을 어떻게 막을 수 있겠어.”
맞는 말이었다.
도사란 무엇인가. 결국 도를 깨닫기 위해 수양을 쌓는 이들이다. 수양이 극에 다다라 깨달음을 얻어 귀천하는 것은 축하할 일이지 막아야 하는 일이 아니다.
강아현이 종화의 말에 쉽게 반박하지 못했다.
-쾅!!!
단박에 수십 명의 사람을 격살할만한 거대한 힘을 저 하늘 높은 곳으로 쳐낸 청무진인이 가볍게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얼굴에 피곤함이 물씬 묻어났다. 육체의 피로가 아니었다. 비록 마기에 눌려버린 화산의 용맥은 그의 의지를 따르지 않았지만, 완성된 자하기공의 구단공은 단단하게 그의 육체를 보호하고 있었다.
피곤한 것은 정신. 그래, 정신이었다.
그의 시선이 저 하늘로 향했다. 넘실대는 검은 마기들이 마치 먹구름처럼 화산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마치 태풍의 눈처럼 오직 운호의 주변만이 신령한 기운으로 가득했다.
등선(登仙).
평생을 목표로 했지만, 이제는 절대 다다를 수 없음을 깨달은 그것이 저 어린 제자에게서 이뤄지고 있었다. 검종은 좌도의 방문이고 기종이야 말로 대도의 무문이라 이야기했던 그 과거가 참을 수 없을 만큼 부끄러웠다.
그리고 그 순간, 운호가 감당하는 권역이 한층 확장됐다.
마치 동시에 수십 명의 백운호가 존재하는 것처럼 흐릿한 인형들이 편마가 내뿜는 기운들을 둘러쌌다.
그야말로 신선이나 보여줄법한 이적이다.
-후우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러고 보니 저쪽에 검선의 직계와 강진 그 아이의 여식이 있었다. 운호가 워낙에 터무니없었던지라 조금 충격이 덜하기는 했지만, 검선의 직계 역시 고작 이십 대 중반에 초절정이다. 마찬가지로 터무니없는 성취다.
“여기서 무엇들 하느냐.”
“사조님!!”
“아무래도 여긴 이대로 일단락이 난 것 같다. 문시진인 문시진인.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로구나.”
“막아야 합니다!!”
“막다니? 뭐를? 아, 그 도망간 마인 말이더냐? 그거라면 일단 저곳을 정리하고 바로 추격을 시작하자꾸나. 비록 경지에 이르른 마인이지만 이곳은 중원의 한복판이다. 마침 이곳에 조왕 전하도 계시니 관과 무림이 합심을 한다면 얼마든지 색출할 수 있을 것이다.”
청무진인의 이야기에 강아현이 거세게 고개를 저었다.
“아뇨, 운호요. 운호를 막아야합니다.”
“운호를? 그게 무슨 소리냐? 설마 지금 우화등선을 막아야 한다. 뭐 그런 이야기냐?”
“네!!”
“얘야, 네 마음이 어떤지는 이해한다. 하지만 도사가 도를 이루는 것을 억지로 막아야 한다니. 그래, 좋다. 백번 양보해서 그래야 한다고 치자. 대체 무슨 방법으로 그것을 막는단 말이더냐. 게다가······.”
청무가 말끝을 흐렸다.
편마.
아니, 이제는 사람의 형상조차 제대로 남지 않은 검붉은 기운의 덩어리가 가열차게 주변에 기운을 흩뿌렸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로 청색의 번개가 번뜩인다. 실로 자연재해를 넘어선 풍경이다.
저것은 그야말로 신선의 경지에 다다른 운호이기에 막아낼 수 있는 공격들이다. 천상의 꽃향기가 더 그윽해졌다.
그리고 그 순간 강아현은 자신이 이와 비슷한 순간을 언제 경험했는지 마침내 기억해낼 수 있었다.
활불과의 싸움.
그녀가 붉은 꽃과 같은 핏물을 흩뿌리며 죽음을 향해 걸어가던 당시, 운호는 지금과 같은 형상으로 그녀에게 다가와 삼도천에 발을 담궜던 그녀를 강제로 지상에 되돌렸었다.
“운호는 원하지 않습니다!!”
“뭐라고?”
“운호는 지금 우화등선을 원하지 않습니다. 지금 운호는 스스로 깨달아 기꺼이 선계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 그저 저희를 위해 희생하려는 것뿐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더냐. 아무리 네가 연정에 눈이 멀었다고 해도 해도 될 말이 있고 아닌 말이 있다.”
도사가 우화등선을 원하지 않는다? 그것은 과거에 응시하는 이가 합격을 바라지 않는다는 말이요, 상인이 돈을 원하지 않는다는 말이며, 무인이 무공을 원하지 않는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이와 비슷했던 순간이 있었습니다. 활불과 싸우던 당시였죠. 운호는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저와 약속했어요. 함께 하겠노라고.”
“뭐라고?”
청무와 강아현이 대화를 이어나갔다.
당시에 있었던 일들. 그리고 운호의 이야기들. 그 모든 대화 속에서 함께 있던 종화는 침묵했다.
그러고보니 무언가 찝찝했다.
하지만 대체 뭐 때문에 찝찝한지 콕 집어 이야기 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보광현에서 파검을 만들 당시······.”
그 순간 종화의 귓가에 파검이라는 이름이 들어왔다.
파검?
그리고 그 순간 그녀는 무언가 터무니없는 이야기 하나를 상상해냈다.
“잠시, 잠시만요.”
“응?”
“만약에, 그러니까 이건 아주 만약에 말입니다. 지금 저 마교의 제사장이 노리는 것이 동귀어진이라면······.”
“동귀어진? 그게 무슨 소리······. 잠깐······.”
우화등선은 도사의 목표이며 그렇기에 크나큰 경사다.
도를 깨달은 인간의 본원적인 영을 깨닫고 더 높은 차원으로 도약을 한다.
“정말로 운호가 우화등선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리고 저게 마교의 제사장이 노리는 일이라면······. 그리고 여기서 운호는 우화등선을 해버리고 도망간 마교의 대제사장이 무사히 도망가서 깨어난다면······.”
도를 얻어 우화등선하는 신선은 모든 도사들의 꿈이다.
그렇기에 감히 그런 식으로는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정말 마교의 마인들이 그런 의도를 가지고 있다면?
“아니, 아니다. 그건 터무니없는 추측일 뿐이야.”
“하지만 추측인지 아닌지 확인해볼 가치는 있는 일 같은데요.”
“방법이 없지 않느냐. 아까도 말했지만 깨달음을 얻어 선계로 떠나는 이를 우리가 무슨 수로 막는단 말이더냐.”
청무의 질문에 강아현이 대신 답했다.
“그것을 막을 필요는 없습니다.”
“막을 필요가 없다고?”
“운호는 등선을 원하지 않으니까요. 그러니까 그저 저 폭주하는 마인만 우리가 막아낸다면 운호는 자연스럽게 다시 돌아올 겁니다. 예전에 청해에서 그랬던 것처럼요.”
다시 한번 청무진인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젊은 시절 장강의 용오름을 본 적이 있었다. 참으로 장관이었다. 용의 승천이라 착각하는 것이 무리가 아닐 만큼 압도적인 광경이었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지금 저기 폭주하는 마기에 비하자면 하찮다.
검붉은 마기가 세상을 집어삼킬 것처럼 휘몰아치고, 그 사이로 사이한 푸른빛의 번개가 운호를 위협했다.
그리고 똑같은 얼굴과 똑같은 복장을 한 수십 명의 운호가 화산을 닮은 검을 휘둘러 그 공격을 막아냈다. 환영이나 잔상이 아니었다. 분명 운호는 지금 저 자리에 동시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이야기속의 신선들이나 보여준다는 분신술이다.
범인들이 보기에 강호의 무인들은 초인이며, 초절정의 무인은 그런 강호인들이 보기에도 초인적이다. 하지만 지금 저기서 벌어지는 싸움은 봉신연의나 서유기에 나오는 신선들의 싸움이었다.
헌데 저것을 막아낸다?
그것도 영원히 도(道)에 닿지 못할 이 비루한 늙은이가?
실로 어이없는 이야기 아닌가.
청무 진인이 크게 숨을 들이켰다.
생각을 멈췄다.
그저 주먹을 꾹 쥐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마기는 여전히 자욱했고, 화산의 정기는 그의 의지를 따르지 않았으며 평생을 믿어왔던 대도(大道)는 사실 마교의 수괴가 설계해둔 오랜 함정이었다.
그리고 저 앞에는 오래전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대도무문(大道無門)을 이야기하던 소년이 모든 도사들이 꿈꾸는 초월을 거부하고 있었다.
대도(大道)는 무문(無門)이라고 했다. 옳다. 오직 좌도(左道)만이 방문(傍門)이라 하여 문이 없는 곳에 억지로 문을 만드는 법이다. 자하기공은 방문이었다. 그것도 그 끝이 막혀있는 방문.
하지만 괜찮다. 저 아이의 말처럼 대도는 본래 무문이니까.
늙은 도사가 평생을 수련해온 동작 그대로 주먹을 내뻗었다.
마교의 대제사장이 설계한 그대로.
그것은 인간의 영과 혼을 함양하는 대신, 그저 비대하게 백을 살찌우고 육을 최고의 상태로 유지하기 위한 좌도였다.
팔십 년.
이제는 눈을 감고도 펼칠 수 있는 그 방문좌도의 수법이 세상에서 그것을 가장 완벽하게 숙달한 멍청한 노인의 손에서 펼쳐졌다.
-쾅!!!
마인의 마기는 흔들리지 않았다.
노인의 귓가에 천상의 노랫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노인을 부르는 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검종의 무공으로 대도를 걷겠다 이야기했던 소년을 초청하는 천상의 노랫소리였다.
노인이 한 번 더 주먹을 내뻗었다.
자연스럽게 몸을 틀어 발길질을 했고, 다시 다리를 접어 주먹을 내뻗었다.
방문의 좌도를 끊임없이 두들겼다.
오직 도에 닿기를 원하는 하나의 마음으로.
무려 팔십 년 동안이나.
그의 사제들은 그 나름의 방식으로 자신의 한계를 극복했다.
그리고 또 다른 사제는 그들을 잊지 않겠다며 하나의 무공을 창안했다.
자운장(紫雲掌)
불망우공(不忘雨空)
청허진인은 그 일장에 삼갑자의 거력을 담아냈다. 그것은 개방의 걸왕이 펼쳐냈던 항룡유회의 칠할에 가까운 위력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지금 청무 진인은 그 일 장에 팔십 년에 달했는 그 멍청한 수련을, 그 멍청한 인생을 그리고 그 쓸데없이 단단하게 남아있던 생명을 담아냈다.
그리하여 그것 역시 수십의 운호가 펼쳐내는 저 검처럼 화산을 닮아 있었다.
물론 멍청한 늙은이의 일 장은 운호가 펼쳐내는 화산검처럼 아름답지 못했다. 그것은 그저 그가 살아온 화산처럼 황량하고 날카로운 돌산이었다.
그렇기에 저 마인들을 막아내기에 너무 부족했다.
하지만 운호가 한 계단 정도 지상에 내려오기에, 충분한 위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