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화
무의 이름(14)
신검합일(身劍合一).
진즉에 깨우친 경지였다. 하지만 지금 종화가 보여준 것은 조금 달랐다. 운호는 지금까지 검선이 보여줬던 어검비행이 어검술의 극한이라 생각해왔다. 하지만 그 날, 검선이 운호에게 신검합일을 가르쳐줬던 날, 그가 마지막으로 보여줬던 어검비행은 그 가르침의 연장선이 아니었을까? 검과 하나가 된 종화가 운호의 곁으로 날아들었다.
천마란 무엇인가.
그 끓어오르는 마기가 하늘과 땅의 기운마저 굴복시킬 만큼 압도적인 경지에 이르렀다고 하여 천마다.
그리고 그런 마인이 자신의 진원을 깨트렸다.
진원은 진기를 구성하는 핵심이며 혹자는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진기 그 자체라고 봤는데, 심지어 그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내가진기는 그저 진원의 부산물이라고까지 말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원을 사용한다는 것이 무조건 더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내공이 근육을 사용하여 발휘하는 힘이라면 진원은 근육 그 자체다. 근육의 파열을 담보로 한다고 해서 한순간 더 큰 힘을 끌어낼 수 있을까? 물론 한계까지 몰린 상황에서 쉬지 않고 근육을 계속 사용하여 근육이 파열되는 경우는 나올 수 있다. 하지만 애당초 근육의 파열을 전제로 하여 한 번에 더 큰 힘을 끌어낸다? 보통의 경우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기에 이것 역시 상리를 벗어난 이치 밖의 힘이다.
절대적인 마기가 주변의 기운을 잠식한다.
화산의 지맥이 비명을 내지른다.
중원의 오악. 중원에서도 가장 기운이 성한 이 땅이 거세게 저항했다. 하지만 역천을 이룩해낸 인간의 생명이 그 의지가 그것을 밀어낸다.
중원에서 가장 신령스러운 땅이 마기에 오염된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지금까지 화산의 땅은 마인과 화산의 무인들 모두에게 중립적이었다. 화산의 무인에게도 힘을 빌려주지 않았고, 마인의 행사를 방해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 순간 그것이 달라졌다. 그것도 화산의 무인들에게는 아주 나쁜 쪽으로.
화산이 화산의 무인들을 밀어낸다. 마치 허락받지 못한 땅에 발을 디딘 이방인처럼.
반면 마인들은 마침내 물고기가 물로 돌아간 것 같은 감각을 느꼈다.
지금까지 화산의 땅이 그들에게 중립적이었다고 해도 그것이 마기로 가득한 십만대산에서 행동하는 것과 같을 수는 없었다. 자신의 힘으로 천지간의 기운을 억누르던 천마와 지마가 그 행위에서 완전히 해방됐다. 오히려 오염된 용맥이 그들의 힘을 북돋웠다.
-쾅!!
그것을 가장 먼저 체감한 것은 한 자루 신검으로 천마를 거의 제압했던 주고수였다.
‘이 할? 아니, 삼 할.’
동작은 같았다.
하지만 그 동작에 실린 힘이, 그 속도가 달라졌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수세에 몰렸던 마인이 순식간에 여유를 되찾았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마인들 역시 마찬가지다.
한순간에 전투의 현황이 달라졌다.
‘이 정도라면?’
광비검 병조량이 자신의 몸을 가득 채우는 거대한 힘을 느꼈다. 그 마음을 눈치챈 것일까? 편마가 다시 한번 소리쳤다.
“량아, 병조량!! 정신 바짝 차려라. 적은 아미타의 화신이다. 혹여라도 허튼 마음 따위 품을 생각하지 말아라.”
“할아버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존자의 목숨을 지켜야 한다. 그분이야말로 이 세상을 구원할 유일한 진인이시다. 이 할애비는 비록 그 구원을 지켜보지 못하겠지만, 이 늙은 목숨이 구원에 결정적인 공로로 작용할 수 있다면 그 이상의 행복은 없을 테니까.”
실로 무시무시한 힘의 격류가 편마에게서 뿜어나왔다.
검과 하나가 되어 날아온 종화도 그것을 느꼈다. 이것이 과연 사람이 뿜어낼 수 있는 힘의 크기일까? 상상을 아득히 넘어선 힘이다. 경지를 넘어섰음에도 감히 맞상대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야말로 대자연을 눈앞에 둔 것과 같았다.
“운호야 저 자는?”
“편마.”
기억이 났다.
무한 당시 남궁혜의 목숨을 앗아갔던 악적이다. 순간적으로 느낀 힘의 크기로는 어쩌면 혹시 말로만 듣던 마교의 대제사장이 아닐까도 생각했었다. 헌데 편마라니.
운호가 검을 움켜쥐었다.
종화와 달리 운호는 그 기운에 압도되지 않았다. 비록 힘의 크기가 초월적이라고 하지만 무한에서 대제사장이 보여줬던 하늘에 닿던 용화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이건 기껏해야 청무진인이 보여줬던 그것과 비슷한 수준이다. 물론 청무진인의 그것이 한순간에 그치고 기운이 소실됨에 따라 급격히 약해졌던 것과 달리, 이 터무니없는 상황이 적어도 몇 각은 계속될 것이라는 차이가 있었지만.
‘가능할까?’
목숨을 걸고 그를 막아서는 편마를 넘어 저 마교의 대제사장을 격살할 수 있을까?
망설임은 짧았다.
천상과 통하던 때만큼은 아니었다.
하지만 화산의 검을 완성함에 따라 천상과 지상의 경계가 한층 더 옅어졌으니 운호의 몸이 희미한 향기를 남긴 채 빛과 같이 나아갔다.
“감히!!”
편마가 운호를 막아섰다.
무한 혈사 당시 청공이, 그리고 청우가 대제사장을 막아섰던 것처럼.
혹은 조금 전 이 자리에서 청무가 대제사장을 막아섰던 것처럼.
지상의 법칙이 허락하는 한계 지점에서 천상과 지상의 경계에 선 공격이 나아가지 못했다. 그리고 그 싸움의 틈새로 하나의 검이 파고들었다.
운호의 왼손 검결지가 감히 이 싸움에 끼어든 검을 후려쳤다. 하지만 그 사소한 동작이 운호와 편마 사이에 존재하던 그 미세한 간극을 메워주었다.
-쾅!!!
한순간 거대한 소음이 장내를 진동시켰다.
크게 튕겨 나간 운호의 몸이 다시 종화의 옆에 섰다. 편마는 그 자리에 그대로 우뚝 서 있었고 이준형을 등에 업은 병조량은 서너 걸음을 물러났으며 편마의 등 뒤에 종화와 싸우던 마인이 입에서 핏물을 흘리며 서있었다.
“프라타파나······.”
“산지바. 존자를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죄를 묻지는 않겠소. 이 모든 것은 그저 거대한 운명의 수레바퀴일 터이니. 하지만 그 수레바퀴 앞에서 하나의 돌부리가 되는 것이 우리의 역할일 터. 바로 이곳이 우리가 목숨을 걸 장소외다.”
산지바라 불리운 마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공부는 마교의 팔대제사장 가운데 수위를 다투는 프라타파나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이미 자신의 목숨으로 이 땅을 십만대산과 흡사하게 만들었으니 그만한 환경 속에서 그의 희생을 흉내내지 못한다면 산지바라는 이름이 아까울 터.
그의 몸에서 청색의 불길한 마기가 뭉클뭉클 샘솟았다. 그것은 지상의 용맥을 따라 흐르는 마기를 타고 상승하여 마침내 그의 진원을 깨트렸다. 정확히 그 순간이었다.
-쾅!!!
저 멀리서 마인의 몸에 한 발의 강기가 정확하게 꽂혀들어갔다.
청무진인이었다.
“내가 좀 늦었군.”
급격하게 변한 전투의 정세.
목숨이 경각에 달린 제자 몇을 돕던 청무가 상황의 심상찮음을 깨닫고 더 중요한 것을 해결하기 위해 달려왔다.
“네, 늦으셨습니다.”
한 발의 강기는 매우 정확했으나 그것은 그저 약간의 피해만을 입혔을 뿐, 스스로 진원을 폭주시킨 두 마인이 진정으로 천마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위용을 드러냈다. 조금 전에는 편마를 제치고 대제사장을 격살할 일말의 가능성이 보였다면, 지금은 청무와 종화가 합류했음에도 그런 가능성이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이제는 그들의 목숨.
그리고 화산 제자들의 목숨을 걱정해야 할 판국이었다.
운호가 청무를 힐끔 바라봤다.
여전히 엉망이다. 화산의 거대한 기운을 홀로 사역하던 그 위엄은 찾아볼 수가 없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이제 막 초절정에 발을 디딘 종화보다는 훨씬 든든했지만······.
“자, 아미타불의 어린 화신. 거짓된 천리의 대행자야. 비록 내 목숨은 여기서 다하겠으나 그 목숨으로 존자의 앞길을 닦아두겠다.”
편마의 오른손이 움직였다.
검붉은 마기에 휩싸인 채찍이 무수하게 분화됐다. 눈의 착시? 아니었다.
지금 편마의 채찍은 지상의 법칙이 한계로 정한 빛의 속도에 한없이 근접하게 움직였다. 그리하여 인간이 인지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시간의 단위 속에서 편마의 채찍은 분명 동시에 존재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선과 면이 아닌 공간 그 자체가 편마의 것이 됐다.
종화가 검을 그었다.
태초에 존재했던 하나의 기운, 온 세상을 구성하였으나, 역설적이게도 이제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그 기운이 종화의 검을 따라 뿜어져 나왔다. 그리하여 그것은 인세와 유리된 경계선이 되었으니, 그것이 종화의 검이 만들어낸 태을의 경계점이었다.
청무 진인은 지금 편마가 펼쳐낸 무공을 이해했다.
그 역시 그와 같은 무공을 펼쳐낸 적이 있었으니 그것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리고 판단했다. 지금 상태에서 저것을 막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하지만 동시에 지금 그와 비슷한 무공으로 저것을 막아냈던 이를 떠올릴 수 있었다. 운호였다.
운호는 저것을 어찌 막아냈던가.
천상에 닿은 깨달음이었을까? 허면 그 깨달음이란 대체 무엇인가. 마인의 수괴가 안배한 무공을 익혀 그의 몸뚱아리가 되도록 자라난 자신은 절대 닿을 수 없는 무엇일까?
다가오는 공격 앞에서 고민은 길 수 없었다. 그는 그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행했다. 가진 바 내공을 다하여 일권에 펼쳐내는 무식한 방법이었다.
그리고 운호는 바라봤다.
하염없이 빛의 속도에 가까운 그 공격들이 펼쳐지는 것을.
인간이 인지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시간의 단위 속에서 동시에 존재하는 그 공격조차도 운호의 인지 속에서는 그저 연속적으로 펼쳐지는 공격이었으니 운호의 몸은 그저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빗물을 피해내는 것처럼 가볍게 움직여 그 공격들을 피해냈다.
아니, 오히려 그 공격들을 뚫고 성큼성큼 편마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 앞에서 산지바라 불리운 마인이 검을 휘둘렀다. 시간의 극한에서 그렇게 운호와 그가 검을 나누었다. 운호의 정신이 점점 높은 곳을 향하여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의 몸은 깃털과 같이 가벼웠으니, 그것이 가능한 것은 그의 정신이 이미 지상의 단위로는 존재할 수 없는 허수로 나아갔기에 오히려 육신의 무게를 감해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쾅!!!
종화가 코와 입에서 피를 토하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청무 진인의 몸이 마치 강가에서 물수제비를 뜬 것과 같이 바닥을 통통통 튕기며 뒤로 튕겨 나갔다.
산지바라는 마인이 검을 잃었다.
편마의 사지 말단이 검은 가루로 분해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운호가 처음 그 자리에서 다시 검을 치켜들었다.
거듭되는 싸움 속에서 그의 시야는 점점 더 확장됐다. 본래도 완벽하던 그의 검술은 그 완벽을 넘어선 지점까지 다다르고 있었다.
분명 그의 두 눈은 정면을 향하고 있었으나 그의 시야는 마치 저 높은 천상에서 신들이 아등바등하는 개미와 같은 인간들을 바라보는 것처럼 확장되고 있었다.
우측으로 사 수유(須臾)만 더.
아니지, 거기서는 일 순식(瞬息) 밑으로 갔어야지.
방금은 그럴싸했어. 하지만 오 탄지(彈指)만 높았다면 완전한 검리에 더 가까웠을 터인데.
종화가 핏물이 가득한 코를 –킁 하고 뱉어냈다.
숨을 쉬기 어려워서도 피비린내가 지독해서도 아니었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 의심스러워서다.
‘꽃 향기?’
핏물로 가득한 코를 뚫고 지극히 향기로운 내음이 느껴졌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후각을 넘어선 무언가에 직접적으로 작용하는 향기일지도 몰랐다.
운호의 몸이 가벼웠다.
한없이 한없이.
그리고 아직 이준형을 등에 업은 병조량은 그의 드넓은 시야를 벗어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