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화
무의 이름(13)
목운평과 운호는 이성이 매우 발달했다는 점에서 그 기질이 참으로 흡사했다. 사실 술로써 도를 이룩한다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이 가능했던, 그리고 거의 직전까지 갈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그런 기질 때문일 수도 있다.
그렇기에 운호는 목운평이 집대성한 화산의 검식들을 이해하는 것이 크게 어렵지 않았다. 그 근간에 흐르는 논리의 흐름을 공감할 수 있었고, 그렇기에 누군가는 하나를 대성하는데 평생을 소비하는 검술들을 고작 십오년 사이에 여섯 개나 대성에 가깝게 성취했다.
하지만 반야검의 명현식은 조금 달랐다.
물론 그것 역시 지독할 정도로 오성을 필요로 하는 것은 똑같았다. 하지만 반야검 명현식의 근간에는 저 남해의 험악한 환경에서 일말의 자비를 궁구하던 명현신니의 자비가 깔려 있었다. 검이라는 날붙이로 살상이 아닌 제압을 꿈꾸다니. 그야말로 지독한 비효율이며 이율배반이다. 운호는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운호의 지독한 오성은 그 마음을 머리로 이해해다. 그렇기에 형과 식을 익혔고 그 오의까지도 일정 수준 이상으로 구현했다.
하지만 그것이 운호의 검술에 진정으로 녹아들었는가를 묻는다면 아니었다. 운호의 검은 화산의 검이라는 거대한 무언가로 승화되고 있었지만, 반야검만큼은 항상 겉돌고 있었다. 운호는 그것이 그저 증무진인 목운평이 재정립한 검술들은 하나의 규칙성을 갖고 형성된 검술이기에 어우러질 수 있고, 반야검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라 생각해왔다.
아니었다.
이 순간, 공야찬의 마지막 모습을 보면서 마침내 운호는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반야검이 말하는 것과 공야찬이 휘두른 저 마지막 일검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인간은 본디 그러하다는 것을 말이다.
현실의 화산은 꽃나무 하나 보이지 않는 홀로 선 돌산이었다. 하지만 운호가 펼쳐내는 화산에는 훈풍이 살랑였다. 그리고 훈풍을 따라 화산이 미소지었다. 그가 내뿜는 자색의 기운이 운호가 그리는 화산을 따라 어우러졌다. 검의 움직임에 따라 자색의 서기가 흩날리는 것이 마치 흐드러지게 핀 꽃잎과 같았다. 그리고 밖에서 보기에 그 광경은 사뭇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 내부, 특히 그 검식을 받아내는 대제사장의 입장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았으니, 조금씩 대제사장이 내뿜는 기운이 그의 통제를 벗어나 운호의 흐름을 따르기 시작했다.
대제사장이 소리 없는 비명성을 내질렀다.
이제는 입을 열 수도 없었다. 한톨의 기운조차 허투루 사용하는 순간이 바로 자신의 파멸이라는 것을 인지했다.
‘내가? 내가 정말 여기서 끝이라고?’
그가 걸어온 수천 년에 달하는 여정은 대체 무엇을 위해서였을까.
고작 자신이 안배해둔 양식장에서 이렇게 인생의 마지막을 맞이해야 한다고? 수천 년의 시간 속에서 쌓아 올린 무(武)를 펼쳐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저 우뚝 선 화산을 넘어설 수 없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천지가 요동쳤다.
운호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대제사장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진득한 마기가 몰려오고 있었다.
물론 저 사기꾼의 말처럼 십만의 마인과 같은 터무니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셋 이상. 천마라는 이름을 붙일만한 마인들이다.
가능할까?
저들이 몰려들기 전 대제사장의 목을 따는 것이?
생각은 짧았다. 그리고 행동은 생각과 동시에 이뤄졌다.
급박한 상황에서 내려온 한 줄기 동앗줄이었다.
그렇기에 대제사장이 생각한 것은 오직 그들이 도착할 때까지 버티는 일이었다.
목숨을 건지기 위해서라면 작은 피해 정도는 감수하겠다는 마음.
운호가 그것을 읽어냈다.
대제사장의 몸에 깊숙한 상처가 새겨졌다. 근육을 가르고 뼈에 닿는 상처들이었다. 몇 차례의 공방이 이어졌을 때, 그는 자신의 마음이 조급하여 시야가 좁아졌음을, 그리고 운호가 그것을 이용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운호의 검이 마침내 그의 목에 닿았다.
이제 파검과 대제사장의 목을 가로막은 것은 한겹 밖에 되지 않는 자색의 진기뿐.
그리고 그 순간.
그가 나타났다.
전신에 휘감긴 적흑의 마기가 이글이글 타올랐다. 화산의 기운이 그것을 배격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행동에 큰 제약을 받지 않았으니, 그야말로 천마라는 이름이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마인이었다.
“이 노옴!! 감히!! 존자의 몸에 날붙이를!!”
익숙했다.
기운도, 생김새도, 그가 들고 있는 저 무기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편마가 채찍을 휘둘렀다.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병기 가운데 최초로 소리의 속도를 초월한 병기가 소리를 넘어 시간과 공간을 가르며 날아들었다.
하지만 익숙했다.
물론 그 궤도는 생소했다. 하지만 그 속도는 지난 몇 년 동안 몽원경에서 수백 수천 번을 경험해본 속도였다. 몽원경의 활불이 내뻗던 일권일퇴 모두가 음속폭음의 공격들이었으니까.
그렇기에 계산이 섰다. 전혀 급할 이유가 없었다.
손목을 이용하여 세차게 검을 잡아당겼다.
까드득 하는 소음과 함께 대제사장의 목을 보호하는 자색의 서기가 불타올랐다. 그리고 그 자색의 서기 사이로 시뻘건 핏물이 솟구쳤다.
죽였나?
아니, 조금 얕다. 하지만 혈맥을 확실히 긁어냈다.
대제사장이 양손으로 자신의 목을 움켜쥐었다. 울컥울컥 샘솟는 붉은 핏물이 그 양손을 적신다.
편마가 절규했다.
“존자!!!”
그리고 그 절규보다 빠르게 편마의 채찍이 운호의 몸을 노렸다.
강력한 공격. 부운약표의 몸놀림만으로 벗어나기에는 어려웠다.
하지만 괜찮다. 아직 운호의 검을 감싼 자색의 기운은 아직 흩어지지 않았다. 한 번 휘두른 검에 수십 장의 꽃잎이 흩날렸다. 흩날리는 꽃잎들이 자욱한 마기를 조금도 버텨내지 못하고 깨져나갔다.
그로 인하여 충분했다. 고작 일촌 남짓한 틀어짐. 운호의 가슴팍 옷자락이 시커먼 마기에 찢겨나갔다. 하지만 그의 몸은 터럭 하나 상하지 않았다. 운호의 검이 편마 대신 대제사장을 노렸다.
모든 일의 원흉은 대제사장이었다. 하지만 운호의 마음이 더 향하는 곳은 오히려 편마 쪽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편마를 공격한다? 그럴 리가. 그거야말로 상대가 원하는 일이다. 저 광신도에게 마교의 대제사장은 자기 자신의 목숨보다 더 귀한 존재다.
늦었음을 직감한 편마가 자신의 몸을 날려 마교 대제사장의 몸을 향하는 검극을 막아냈다. 그에게 이성이 남아있었다면 아마 운호의 텅 빈 등을 다시 공격했겠지만, 믿음의 대상이 위험한 상황에서 그런 것이 남아있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다.
찐득한 마기가 운호의 검극을 붙잡았다.
하지만 운호가 불러온 별빛이, 그 별빛의 주변을 머무는 자색의 서기가 마기를 불사른다.
-푸욱
마인의 오른쪽 가슴을 관통했다. 운호의 손이 거기서 그치지 않고 손목을 돌려 횡으로 검을 가로지르려는 그 순간.
편마보다 몇 걸음 늦게 도착한 누군가가 운호의 등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위험하다.
운호가 편마의 몸을 관통한 검을 그대로 뽑아 몸을 돌렸다.
-쾅!!!
힘과 힘의 충돌. 운호를 옆으로 밀어낸 그가 편마와 대제사장의 앞에 섰다.
“할아버지!! 괜찮으십니까?”
마찬가지로 익숙한 얼굴이었다.
서장에서 만났던 바로 그 마인. 광비검 병조량이라고 했던가? 다음에 볼 때까지 목위의 것을 잘 지키라던 그 마인은 어느새 천마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무위를 갖추고 다시 나타났다.
“존자······, 존자께서!!”
“여긴 제가 막고 있겠습니다. 어서 처치를!!”
하지만 초절정이라 이름 붙인다 하여 모두 같은 경지가 아닌 것처럼, 천마라 이름 붙였다고 하여 모두 같은 경지일 수 없다. 기껏해야 이제 막 경지에 발을 디딘 수준. 감히 자신을 막아서겠다는 말에 운호가 전력을 다한 일 검으로 대답했다.
고작 네 놈이?
광비검 병조량이 감히 그 일 검을 감당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완성된 검강으로 빛나던 그의 검이 절반 가량 썩둑 잘려나간 채 뒤로 크게 튕겨나갔다. 그의 입에서 검붉은 핏물이 왈칵 쏟아진다.
“량아!!”
품속에서 무언가 단환을 꺼내 대제사장의 입에 밀어 넣고 찐득한 고약을 그의 목에 치덕치덕 바르던 편마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긴급한 상황을 눈치채고 무리해서 서둘러 달려온 탓일까? 화산의 정기가 그의 몸을 성큼성큼 파먹어가고 있었다. 게다가 상황은 시시각각 악화되고 있다. 설사 뒤늦게 마인들이 합류한다고 해도 가장 중요한 존자의 목숨이 날아간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래, 이곳이 나의 종착지였구나.”
뻥 뚫린 오른쪽 가슴에서 울컥울컥 샘솟던 핏물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쿨럭······. 하, 할아버지.”
“량아, 여긴 내가 막겠다. 너는 기회를 봐서 존자를 모시고 이 자리를 피해라.”
“하지만!!”
“우리는 존자만 살아 계시다면 언제든 훗날을 도모할 수 있다. 오직 존자만이 이 거짓된 세계를 구원하실 수 있으니. 그 대업에 내가 귀히 쓰인다는 것은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일 것이다.”
“안됩니다!! 차라리 제가!!”
“내열비당의 당주 광비검 병조량!! 이것은 교의 두 번째인 프라타파나의 명이다. 존자의 명이 경각에 달렸으니 너는 어서 존자를 모시고 타파나를 만나도록 하라.”
“며······, 명을 받듭니다.”
“누구 마음대로!!”
운호의 검이 별빛을 뿜어냈다.
이제 그 곁을 맴돌던 자색의 서기는 사라졌다. 하지만 여전히 운호의 검은 화산을 그리고 있었고, 편마는 처음 그 강렬했던 등장과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 약해보였다.
-쾅!!!
그리고 편마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얼마 남지 않은 생명이 불타올랐다. 생명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진원 진기가 검붉은 마기로 전환되어 그의 부서진 몸을 수복시켰다.
그 모습은 마치 팔년 전.
자신의 목숨으로 마교의 대제사장을 막아서던 청허, 청공 사형제를 닮아 있었다.
그리고 같은 시간.
대제사장의 위험을 감지한 것은 편마만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가까이에서 싸우던 다른 마인들이야 말로 그것을 더 똑똑히 느꼈다. 하지만 그들과 싸우던 이들 역시 자신의 상대가 이상해졌음을 느꼈고, 그 원인이 운호의 싸움에 있음을 감지했다.
청무와 싸우던 마인은 그의 일권에 목숨을 잃었다. 마인은 목숨을 잃는 와중에도 마지막 발악을 펼쳤지만 그 발악은 청무의 살거죽을 조금 뜯어내는데 그쳤다.
조왕 주고수와 싸우던 마인은 여전히 그의 검을 벗어나지 못했다. 오히려 그 다급함이 주고수에게 더 큰 이득을 선물했을 뿐이다.
벽운과 싸우던 마인은 동귀어진의 수로 허장성세를 펼쳐 그의 검을 벗어나려 했지만, 벽운의 가슴뼈만을 모조리 으스러트렸을 뿐. 결국 그의 검에 유명을 달리했다.
굉원을 비롯한 설매각의 무인들과 싸우던 마인은 대부분의 설매각 인원들을 죽이는데 성공했으나 뒤늦게 합류한 청허에게 발이 묶여 움직이지 못했다.
그리하여 유일하게 편마에게 합류한 것은 종화, 그리고 아현이와 싸우던 그 마인뿐. 강아현이 서둘러 그 마인을 쫓았다.
그리고 그 앞을 종화가 가로 막았다.
“아니, 너는 여기까지.”
“하지만!!”
종화가 고개를 저었다.
“목숨을 건다면 딱 한 번 정도는 발목을 잡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운호가 과연 네가 목숨을 거는 걸 지켜보고만 있을까? 한 번 더 말하지 않겠어. 너는 여기까지야.”
말을 끝낸 종화가 저 먼 곳을 향해 검을 던졌다. 마치 그녀의 사조가 그러했던 것처럼.
그리고 강아현은 알아볼 수 없었다.
종화가 던진 것이 그녀의 검이었는지 아니면 그녀 자신이었는지.
종화가 사라진 자리.
강아현이 이를 악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