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화
무의 이름(12)
“사부의 죽음이 네가 앞으로 나아가는데 필요한 과정이라니 실로 비정하구나. 하긴, 수라계의 아미타이니 그 또한 어울리는 모습이겠지.”
“사부는 나의 사부이기 이전에 무인이었다. 어찌 너 따위가 나와 사부의 관계를 속단할까.”
“그렇다면 저 여아들은 어떠하냐? 저 여아들 또한 너의 여인이기 이전에 무인이더냐?”
운호는 초월자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삼라만상의 모든 것을 꿰뚫을 수 없었으며 모든 것을 제어할 수도 없었다. 물론 몇 각 전까지만 하더라도 초월자에 가깝기는 했다. 그에게 주어진 정보는 적어도 화산파 전체를 아울렀고 거기에 그의 순간적인 분석이 더해졌을 때 그는 제한적이나마 전지(全知)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제는 더이상 전지하지 않았다. 그에게 주어진 정보는 몇 각 전의 것이었으며 그나마 그것도 이제는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희미하다. 그렇기에 운호는 그저 주어진 정보로 최선을 다해 판단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 그 최선에서 운호는 사부의 생존을 예측했다.
대제사장에게는 사부가 무인이라 말했지만, 그는 사부가 무공에 목숨을 건 무인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안위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보신주의자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그는 사부가 마지막 순간 도망갈 것이라 생각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충분히 그럴 기회가 있었다. 게다가 설사 그가 도망을 갔다고 해도 그의 사제인 장호가 죽을 확률은 매우 낮았다.
하지만 사제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무공에 대한 열망이었을까? 사부는 그의 예상을 넘어선 선택을 했다. 목숨을 바쳤고 그가 죽는 순간까지 넘어설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벽의 너머로 팔을 뻗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의 사제를 무사히 살려냈다.
운호는 생각했다.
과연 지금 저 싸움에서 종화와 아현이가 죽을 확률은 몇 할인가. 그리고 지금 여기서 내가 이 자의 목숨을 끊을 확률은 또 몇 할인가. 수많은 숫자들이 운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그 숫자들 사이로 사부의 마지막 얼굴이 스쳤다. 과연 사부가 경지에 오를 확률은 얼마였을까? 그 재능이, 그 성정이, 그 환경이. 과연 그 확률은 대체 얼마였을까?
종화가 죽는 상상이 머리를 스쳤다. 아현이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머리의 일부를 차지했다. 그로 인해 서푼의 힘이 덜 실렸다. 순식간에 다섯 초식 정도 손해를 봤다.
이준형의 얼굴을 한 그가 웃는다.
“진정으로 지금 여기서 그저 나를 제거하는 것으로 모든 일이 해결된다고 생각하느냐? 아니, 그 이전에 네가 과연 나를 제거할 수는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이냐? 십만의 마인이 나를 따른다. 대월국은 사실상 나의 것이나 다름없으며 광서의 대장군부는 그저 종이로 만든 문짝과도 같다.”
“허튼 소리!!”
“진정으로 내가 어째서 고작 서른 명의 마인만 데리고 왔다고 여기는 것이냐. 이것은 그저 선발대에 불과하다. 이제 곧 십만의 마인들이 중원을 덮칠 것이다. 내 스승 샤카무니의 가르침을 거짓되게 왜곡하여 퍼트리는 이들을 응징할 것이고 잘못된 믿음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구원할 것이다. 그저 자신의 욕망만을 위하여 천하의 억조창생을 고통에 밀어 넣은 주팔의 후예들을 처단할 것이며 그리하여 마침내 이 수라계를 진정한 인간의 세상으로 바꿀 것이다.”
운호의 심장이 한차례 크게 뛰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이준형의 얼굴을 한 저 사기꾼의 말이 거짓이라는 것을 인지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의 이성은 저 사기꾼의 말 가운데 진실이 섞여 있을 가능성과 만약 그 가능성이 현실에서 벌어졌을 때 생겨날 여파까지 모조리 계산하기 시작했다.
무한 혈사 당시 마교의 대제사장은 고작 일곱의 마인을 데리고 나타났다. 그렇기에 오늘 고작 서른의 마인들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것을 그리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광서대장군부의 눈을 피할 수 있는 소수정예였겠거니, 혹은 마기를 감추고 움직일 수 있는 최대한의 인원이 이 정도였겠거니.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만약 그것이 아니라면?
운호의 검이 대제사장의 어깨 살점을 한 움큼 베어냈다.
지금 저기서 기세를 내뿜는 마인들 가운데 무한 혈사 당시 얼굴을 보였던 마인은 하나도 없었다. 당장 무한에서 살아 돌아갔던 마인의 숫자는 최소한 둘에 많게는 서넛. 운호가 가장 크게 복수심을 불태우는 편마 역시 보이지 않는다.
“포기해라. 그리고 가서 네가 사랑하는 이들의 목숨이라도 구해 달아나라. 꼬리 내린 개가 된들 어떠하겠느냐. 마지막 순간까지 싸움을 거듭하는 수라가 아니라, 포기할 줄 알고, 수긍할 줄 아는 인간이 되어라.”
운호가 크게 호흡했다.
머릿속에 쉴새 없이 수많은 가능성이 오고 간다. 하지만 동시에 그 가능성이란 어디까지나 가능성에 불가하다는 것을 보여준 공야찬의 얼굴 역시 선명하다.
“나는 믿는다.”
“응?”
“이 자리에서 종화는 미망을 떨쳐낸다. 인간의 머리는 부작위를 인지할 수 없다는 것을 그녀 역시 깨닫게 될 것이다.”
“천만에. 그녀 역시 그 가득한 미망 속에서 죽어갈 것이다. 네 사부가 마지막까지 그저 욕망하며 길거리 개처럼 죽어 나간 것처럼.”
솔직히 운호는 그의 사부인 공야찬을 그리 애정하지 않았다. 사실 사부와 그의 관계는 일반적인 사제의 관계라기보다는 쌍무적 계약관계에 더 가까웠다. 욕망으로 번들거리던 그 눈동자가 떠올랐다. 질투와 분노로 이글거리던 그 목소리도 떠올랐다. 동시에 마인의 위협 앞에 버선발로 달려 나와 자신을 구하던 그 찬란했던 검기가, 깜깜하여 아무런 미래가 보이지 않던 시절 자신을 구원했던 그 제안이 떠올랐다.
그저 욕망하며 길거리의 개처럼 죽어 나갔다고?
싸움만을 거듭하는 수라가 아니라 포기할 줄 알고 수긍할 줄 아는 인간이 되라고?
“오래 산 괴물아. 너는 정녕 인간을 모르는구나.”
운호가 그를 진정으로 측은하게 바라봤다.
그리하여 그 눈빛은 검보다 사납게 대주교의 마음을 갈랐다.
그리고 같은 시간.
마인의 검이 종화를 향해 날아들었다. 운호는 분명 사부의 죽음을 예측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종화의 죽음 역시 마찬가지였던 것일까?
그럴 리가.
보통 사춘기 소녀의 마음이란 참으로 복잡하여 봄날의 바람과 같지만, 때론 이루지 못한 마음이 단단하게 굳어 암석처럼 남기도 한다. 종화의 경우는 후자였다. 그녀는 지금도 운호를 마음에 품고 있었다.
허면 그녀가 성취를 얻지 못한 것이 그녀의 생각처럼 운호를 마음에 품고 있기 때문이었을까? 물론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가 지금 자신의 성취가 부족함을 자책하는 것 자체가 어이없는 일이었다.
사실 지금 그녀가 지금 이만한 성취를 얻은 것 자체가 그녀의 터무니 없는 재능을 증명한다고 볼 수 있다. 운호의 경우는 여러 가지 기연과 각종 운명들이 그를 이 경지로 떠밀었다. 하지만 종화는 달랐다. 그녀는 그저 태을의 법을 전수 받았고, 약 십 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그것을 홀로 수련했을 뿐이다.
운호가 전지에 가까운 권능으로 살폈을 때 종화야말로 수천 년 전 있었던 불세존(佛世尊) 실달다(悉達多)나 태상노군(太上老君)의 진신이라 숭상받는 대성조(大聖祖) 이이(李耳)와 같은 인물에 필적하는 재능을 타고 난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운호는 그녀를 공야찬과는 다른 의미로 걱정하지 않았다. 만약 진정으로 천명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녀의 천명이 다할 곳은 이곳이 아니었다.
종남의 법은 순양을 강조한다. 타오르는 양기야말로 모든 힘의 근원이라고 보았기에 종남의 무공은 동자공을 근간으로 하며 동정이 깨지는 순간 그 무공의 성취는 정지되고 심지어 빠른 속도로 퇴보한다. 그런만큼 당연히 종남은 오랜 시간 이성 간의 교제가 엄격하게 금지된 금녀의 구역이었다.
그런 환경에서 자라난 종화가 이성 간의 교제를 금기시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이론적으로야 태을이 순양과 다름을 알았지만 그럼에도 오랜 기간 보고 자라온 문화라는 것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순간.
종화는 마침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머리를 썩둑 자르고 종남에 틀어박혀 그토록 오랜 시간 무공만을 수련했음에도 여전히 그녀의 마음에는 저 사내아이가 살아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순양자 여동빈이 말했다.
마음이 그것을 시험이라 생각하지 않았으니 그것은 그저 삶의 궤적이었을 뿐이라고.
경계에 서 있던 종화의 검이 움직였다.
그리하여 태을의 이치가 그녀와 천마 사이에 선명한 경계를 그려냈다. 천지간에 강성한 기운조차 그 의지 아래 지배한다는 천마가 연거푸 다섯 걸음을 물러났다.
“알았다.”
중요한 것은 색에 빠지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사람이 짝을 그리워하는 것은 순리이며 순수함을 위하여 그것을 참아내는 것 역시 순리이다. 잘못된 것은 순리를 부끄러워하며 번민하던 마음. 주변의 많은 경우에 자신을 억지로 맞추려 하는 인위. 그리하여 시험이 아닌 것조차 시험이라 여겼기에 도를 걸어가는 과정에 스스로 세워버린 거대한 마(魔)의 장벽이었다.
“어······, 어떻게!!”
대제사장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졌다.
백운호까지는 어찌어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아미타의 화신으로 이 세상, 거짓된 천리가 정한 그의 대적자였으니까. 하지만 저 계집은 대체 무엇인가.
“인간이다.”
“개소리!!”
운호가 답하지 않았다.
납매에서 시작된 검이 매농으로 확장됐다. 자운의 기교가 그것을 보충하였다. 광음의 법이 그것을 옮겨주었고 난풍이 그것을 확장하였으며 마침내 무형이 그 모든 것을 품었다.
그리하여 단단하게 뭉처있던 꽃봉오리가 그 꽃잎을 펼쳤고 웅장하게 솟아있던 산봉오리가 그 팔을 뻗었다.
화산의 검이었다.
그 앞에서 대제사장이 두려워하지 않았다.
“또 이 검이더냐!!”
그는 이미 알고 있는 검식이었다. 그것도 더 완벽하고 더 무서운 것을 알고 있었다. 운호가 펼쳤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보다 훨씬 오래전의 일이었다.
그 시대 천리가 정했던 그의 대적자.
화산파의 검술을 집대성했던 천재 천중일검 목운평.
그가 펼쳤던 산악은 더 엄중했으며 더 가팔랐다.
물론 지금 대제사장의 몸 역시 그 당시에는 감히 비할 바가 아니다. 하지만 이미 한 번 경험했던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은 다르다.
보라색의 서기가 뭉클뭉클 피어올랐다.
몸에는 익숙하지 않지만, 영혼에는 깊숙하게 새겨진 무학의 이치에 따라 몸을 움직인다. 지난 수십 합의 겨룸을 통해 미세한 오차는 이미 조정을 끝냈다.
가장 깔끔한 지르기.
그것은 청무진인이 무의식적으로 펼쳐내던 그 일권과 똑같았다.
-콰과과과광!!!
힘과 힘이 충돌하는 바로 그 순간.
대제사장은 무언가 이상한 것을 발견해냈다.
그저 미숙하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그저 아직 그 단계에 오르지 못했기에 그 엄정함이 부족했으며 그 선이 저토록 유약하다 생각했다.
무릇 화산은 여립하니 그저 가파르고 억센 산이었으니까.
하지만 달랐다.
천중일검 목운평의 화산검은 저 고고하게 서 있는 화산 그 자체였다.
그리고 분명 운호는 천중일검 목운평이 남긴 화산의 팔대검술을 하나씩 익혀냈다. 하지만 그가 익힌 검술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남해 보타암의 신니는 운호에게 반야를 선물했다.
납매, 매농, 자운, 광음, 난풍, 무형.
그리고 일곱 번째 반야.
운호가 그려낸 화산은 그저 여립(如立)하지 않았다.
저 남해 보타암의 세파 속에서도 마지막 자비를 잃지 않으려던 한 비구니의 마음이 그 엄정하고 가파른 화산에 섞여 들어갔다.
그것은 천중일검 목운평과는 다른 신검 백운호만의 화산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