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화
무의 이름(11)
“사기꾼. 두 번이나 같은 방식이라니. 사람이 발전이라는 걸 할 줄 알아야지. 첫 번째 목숨 구걸은 그래도 참신하기라도 했는데. 이번에는 그마저도 없구나.”
“여유로운 척하지 말아라. 네 손아귀의 떨림, 땀의 향취, 미미한 심장의 박동, 눈동자의 크기. 모든 것이 네 마음의 상태를 알려준다.”
거짓말이다.
운호는 이미 경지에 이르러 불수의근까지도 온전하게 자신의 의지 아래 두고 있다. 그것은 실로 공고하여 이제 설사 저 검왕 남궁벽이 펼치는 제왕검형이라고 해도 감히 그의 신체 기능을 침범할 수 없을 정도다.
하지만 그럼에도 저 사기꾼의 말이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귓가에 비명이 들려온다.
화산의 삼대 제자 하나가 또 죽었다. 그리 친하게 지내던 녀석은 아니다. 하지만 무려 3년을 함께 수학했으며 바로 며칠 전에도 인사를 나눈 사이다.
하지만 외면했다.
지금 눈앞에 이준형의 탈을 뒤집어쓴 이 작자야말로 이 모든 사태의 근원이다. 이 작자를 처리하는 것이 앞으로 있을 이 모든 불행을 원천적으로 차단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참으로 어리석다. 모든 것을 걸고 불멸에 도전하는 유한이라니. 마치 타오르는 불에 뛰어드는 부나방과 같구나.”
“불멸? 그래, 그러고 보니 그와 비슷한 말을 하는 녀석이 하나 있었지. 쓸데없이 덩치만 커다란 괴물이었는데. 그 녀석이 어찌 됐더라?”
잠깐의 흔들림. 대제사장의 손이 조금 어지러워졌다.
덕분에 앞으로 삼십초식은 더 손을 나눠야 할 것 같던 것이 이십육초로 줄어 들었다. 하나는 이천년을 살아온 괴물. 하나는 오백년을 내려온 괴물이다. 서로 안면이 없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겠지.
“참으로 안타깝다. 그 역시 세상이 잘못됐음을 알고 그것을 고치려 했던 아이였다. 하지만 그 방도로 어설프게 나를 흉내 내려 했던 그 순간부터 그런 결과는 필연이었으리라. 아미타의 화신이여. 부디 그를 긍휼히 여겨다오.”
“역시 미친 놈들끼리는 통하는 것이 있었다 뭐 그런 이야기로구나.”
“미쳤다라······. 글쎄, 과연 누가 미친 것 같으냐. 나를 따르던 아이였으며, 오랜 친구였고, 종국에는 영원을 함께 걷던 적수의 사망에 슬퍼하는 나이더냐, 아니면 자신의 평생에 걸친 인연들이 모조리 죽어가는 순간에도 오직 하늘이 내린 천명에 집착하는 너이더냐.”
운호가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
종화는 사문의 동년배들이 어떤 실력을 지니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사실 이 나이에 절정이라는 것 자체가 매우 특별하다. 적어도 종남에서 종화와 같은 배분의 제자 가운데 절정의 경지에 이른 이는 종화 자신을 제외하곤 전무했다.
그렇기에 강아현의 성취가 대단하다고 생각은 했다. 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물론 과거 화산에서 머무르던 시절 강아현은 자신에 필적하는 재능과 실력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지나온 세월이 다르고 익힌 무공이 다르다. 마음에 드는 남자와 시시덕거리며 보낸 시간과 저 깊은 산중에서 홀로 자신과 싸우며 보내온 시간의 무게가 같을 수는 없다.
-쾅!!
강아현의 일검이 천마를 위협했다.
옥녀진결이라고 했던가?
격발형 내가기공으로 일순간에 매우 커다란 힘을 사역하는 무공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하지만 강아현이 보여주는 경지는 단순히 그런 말로 설명할 수 있는 수준 이상이었다.
옥녀진결 사단공에서 이어지는 자운검의 아현식.
그 일검의 파괴력은 태을의 일검에 버금갔다. 그렇기에 그 일검은 고작 절정의 무인이 천마에게 진정으로 ‘위협’이 될 수 있을 만큼 강력했다.
일순간의 휘청임.
그 사이로 종화가 검을 찔러넣었다.
가능할까?
그래, 어쩌면.
이전까지 종화의 싸움이 천마의 공격을 그저 버텨내는 것이었다면 강아현의 합류 이후 이 싸움은 적어도 싸움이라는 말이 성립될만한 단계로 올라왔다.
조금만, 조금만 더!!
몸을 보호하기 위한 기운까지 모조리 공격을 위해 밀어 넣었다.
얼굴에 난 상처가 다시 벌어졌다. 미약한 진기의 힘으로 지혈돼있던 상처들이 핏물을 흘려보낸다.
종화의 눈에 강아현의 말간 얼굴이 보였다.
실로 아름답다. 세상의 남자라면 백이면 백. 천이면 천 모두 사랑에 빠질만한 미모다. 그래, 이것이 순리다. 벌과 나비는 향기로운 꽃에게 날아드는 법이다. 하지만 그것이 꽃의 승리일까? 아니, 아니다. 천년을 사는 설삼은 눈 속에서 홀로 꽃을 피운다. 강아현이 아름다운 꽃이라면 종화 자신은 그 설삼과도 같다. 홀로 묵묵히 그리하여 언젠가.
-쾅!!!
마인의 검이 흐트러졌다.
이제 곧이다.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종화가 이를 악물었다. 그를 돕는 강아현의 검 역시 한층 더 사납게 변했다.
깨달음이 멀지 않게 느껴졌다. 종이짝과 같은 그 경계 지점만 찢어발길 수 있다면 지금 여기서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강아현을 넘어 저기서 검을 휘두르는 운호의 옆에 설 수 있겠지. 그리고 그것은 남녀간의 은애가 아닌 그저 검을 수행하는 수행자간의 절차탁마일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종화와 검을 맞댄 마인이 환히 미소 지었다.
“그래, 희망이 보였느냐?”
천마는 어찌하여 천마인가.
하늘의 기운이 흉폭한 마기에 고개를 숙인다.
화산여립(華山如立)이라 했다. 화산은 중원의 오악 가운데 가장 꼿꼿하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대체 무슨 일인지 강성한 화산의 정기는 감히 그 기운에 저항하지 않았다.
한순간 폭증한 마기가 그녀들을 옭아맸다.
진기의 흐름이 느려지고, 동작이 제약된다.
가깝게 느껴지던 경지가 아득하게 멀어진다.
-꽈드득!!
채찍처럼 날아온 마인의 왼발이 늑골 두 대를 박살 냈다.
종화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그와 동시에 휘두른 일 검에 강아현이 입에서 피를 내뿜으며 튕겨난다.
“쥐새끼처럼 도망만 치던 계집이 그저 약간의 수세를 보여줬다고 좋다고 달려들다니. 하여간 이래서 어린 계집이란.”
마인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종화가 생각했다.
자신이 멍청했다고.
대체 무슨 상상을 한 것인가.
운호와 나란히 검을 휘두르고 싶다고? 그것이 그저 검의 길을 걸어가는 수행자간의 절차탁마일 것이라고?
이런 순간조차 색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다니.
이래서야 이런 결과가 나오는 것이 너무 당연하지 않았는가.
정양자 종리권이 순양자 여동빈에게 화룡의 법을 전할 때 그는 무려 열 가지 시험으로 순양자를 시험했다고 한다.
하지만 순양자가 말하기를 그의 마음은 그것이 시험이라 인지하지 못하였으니 마(魔)란 그저 도(道)를 걸어가는 과정에서 스스로가 어디까지 걸어왔는지를 반추하는 시금석이라 했다.
그렇다면 종화 자신은 대체 어디까지 걸어온 것인가.
팔 년 전 칼로 머리카락을 베어내고 종남산에 들어가던 시절과 여기서 부러진 갈비뼈를 붙잡고 있는 지금. 나는 어찌하여 같은 것을 바라보며 번민하고 있는가.
종화가 사납게 날아드는 마인의 검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리고 같은 시간.
잘려 나간 오른팔을 대신하여 왼팔로 검을 쥔 공야찬이 바닥을 굴렀다. 쏟아진 핏방울, 줄줄 흘러내린 땀. 그리고 거기에 엉킨 더러운 흙먼지. 그 꼴이 참으로 비루했다.
황새를 쫓아가던 뱁새는 결국 가랑이가 찢어지는 법이다.
그리고 하늘의 선택을 받은 천재의 검을 쫓았던 범재는 결국 오른손이 잘린 채 바닥을 구른다.
마인의 대도를 피해 바닥을 구르다 일어난 그의 시야에 운호의 모습이 들어왔다.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검이 이준형을 압박했다.
준형이 저 아이는 대체 어떻게 갑자기 저런 실력을 얻은 것이며, 운호는 대체 왜 저 아이와 싸우고 있는 것일까?
아주 오래전에도 저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
물론 그때의 싸움은 지금에 비하자면 애들 장난에 불과했다. 하지만 당시 공야찬은 그 싸움을 보고 운호에게 ‘질투’를 했었다. 이 얼마나 추한 어른인가. 고작 열세 살짜리. 그것도 자기 제자의 재능에 질투라니.
죽음이 가깝게 느껴졌다.
바로 반걸음 뒤.
목덜미에 느껴지는 이 섬뜩한 감각이 어쩌면 바로 죽음일지도 모르겠다.
수많은 이야기에서 죽음을 앞에 둔 인간은 마침내 자신의 욕망을 내려놓고 초탈한 모습으로 세상을 떠나곤 한다. 특히나 이렇게 제자의 목숨을 구하기 위한 희생적인 죽음을 앞두곤 더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초월적인 기교로 검을 휘두르는 운호를 바라보는 공야찬의 눈에 담긴 감정은 그런 초탈한 감정이 아니었다. 그보다 조금 더 찐득하고 조금 더 부정적이며 그렇기에 매우 인간적이었다.
가랑이가 찢어진 뱁새는 더 이상 뛸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저 성큼성큼 멀어지는 황새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지만은 않았다.
뱁새는 자신의 다리가 황새와 다름을 몰라서 그를 따라 뛴 것일까? 아니, 아니다. 알고 있다. 그 누구 보다 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뱁새는 달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찢어진 가랑이의 뱁새는 다시 검을 쥐었다. 그리고 성큼성큼 멀어져가는 황새를 향하여 그 팔을 내뻗었다.
그것은 운호가 보여주는 그 불가사의한 검과는 거리가 멀었다.
운호의 검이 무한을 노래했다면, 그가 휘두르는 검은 그저 늙어 사그라드는 노인이 생존을 위하여 외치는 단말마 비명성이었다.
뱁새가 성큼성큼 걸어가는 황새를 쫒아갈 수 있는 방법을 아는가?
가랑이가 찢어져 더 이상 달리지 못하게 된 뱁새가 그 팔을 내뻗었을 때, 뱁새는 마침내 그 방법을 깨달았다. 그 몸집만큼이나 비루한 날개가 펄럭였다.
알 수 있었다. 만약 저 우아한 황새가 커다란 날개를 펼친다면 순식간에 사라질 것이라는 것을. 어쩌면 지금 운호가 저기서 펼치고 있는 이해할 수 없는 검리는 날개를 펴고 순식간에 살아진 황새가 남긴 흔적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두 날개를 펴지 않은 채 성큼성큼 걸어가는 황새라면. 뱁새의 이 짧고 앙증맞은 날개짓으로도 충분히 따라갈 수 있지 않을까?
생의 마지막 순간.
공야찬이 자신의 인생을 검으로 노래했다. 가까이서 본 그것은 지금 그의 몸처럼 더럽고 추악했으며 또한 비루했다.
그리고 그 뒤편에 부러진 다리로 주저 앉은 장호가 그것을 바라봤다.
이미 터져버린 눈물로 뿌연 그의 시야에 보이는 사부의 그 마지막 검술은 실로 아름다웠으니 그것은 그의 사형인 운호가 보여주는 초월적인 화산의 검술과는 달랐으되, 그 또한 화산이었다.
-까드득!!!
마침내 오래된 화산의 검이 부러졌다.
아직 덜 여문 화산의 검을 위협하던 사나운 대도와 함께.
생의 마지막 순간. 인간의 검을 휘두른 공야찬의 얼굴에 떠오른 감정은 만족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보다 먼 곳을 날아가는 자를 시기하는 질투심이었으며, 원하는 것을 끝내 얻지 못한 불만족이었고 이제 막 단초를 얻었음에도 그것을 제대로 익히지 못한다는 아쉬움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운호가 생생하게 기억하는 공야찬의 얼굴 그 자체였다.
그 얼굴을 가슴에 새기며 저 마교의 대제사장에게 운호가 답했다.
“아니, 이것은 하늘이 내린 천명이 아니다. 이것은 너와 나의 오랜 악연이며 그저 내가 앞으로 나가는 데 필요한 과정이다. 그러니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사기꾼아. 여기가 바로 네 사기의 종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