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7화
무의 이름(10)
운호는 생각했다.
길어봐야 백여 초. 물론 그것도 어디까지나 대제사장의 선택이 지금과 같을 때의 이야기다. 만약 저자의 손발이 아주 조금이라도 어지러워진다면, 그 선택이 잘못된다면 훨씬 손쉽게 끝을 낼 수 있다.
-콰과과과광!!!
그리 멀지 않은 곳.
마인들의 싸움이 한층 더 심화됐다.
“초조한가?”
이준형의 얼굴로, 이준형의 목소리로. 그자가 말을 걸어왔다.
“글쎄, 초조한 쪽은 네 놈 쪽이겠지.”
운호의 검이 자하기공의 기막을 뚫고 그의 살점을 스쳤다. 단단하게 뭉친 자하진기의 힘이 벌어진 살을 오므리고 흐르는 핏물을 막아낸다.
“저기 너의 인연들이 가득하구나. 그 짧은 인생 동안 어찌나 많은 인연을 만들었는지. 하긴 생각해보니 그러니 괜찮겠구나.”
“무슨 개소리냐.”
“어차피 그 짧은 인생 동안 만들어낸 인연들. 얼마든지 다시 만들면 그만 아니겠더냐. 저기 저 인간들이 모조리 죽어 나자빠진다고 해도 말이다.”
-쾅!!
“이런 이런, 손목에 힘이 서푼 더 실렸구나. 이래서야 내 멱을 따는 시간이 더 길어질 뿐일 텐데?”
쉴새 없이 떠듦에도 불구하고 동작에 파탄은 보이지 않는다.
-서걱
하지만 파탄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 손해를 보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자하기공 칠단공과 운호의 경지 사이에는 매우 커다란 벽이 존재했다. 또한, 기교로 그것을 극복하기에는 상대가 좋지 못했다. 최근 오백 년을 통틀어 그가 경험해본 상대 가운데 기교적으로 가장 완성된 상대는 천중일검 목운평이었다. 그리고 지금, 백운호는 거의 목운평에 버금가는 기교를 보여주고 있다. 지금 백운호가 보여주는 수준은 기교에 한정한다면 목운평이 마지막 싸움을 시작하던 당시의 수준에 필적했다.
운호의 시야가 전체를 훑었다. 아주 짧은 시간. 순간적으로 전장의 상황이 머릿속에 얼추 가늠된다.
빌어먹을.
이 작자의 말이 틀리지 않다.
-쾅!!!
이준형의 얼굴에서 코피가 후드득 쏟아져 내린다. 공격은 막아냈지만, 그 충격량은 다 해소하지 못했다는 증거다.
“그래, 저 비루한 노인네가 너의 사부로구나.”
그가 환하게 미소 짓는다. 반듯해보이는 준수한 얼굴. 본래 이준형이 짓던 미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새하얀 이빨이 피로 물들어서일까? 아니면 그 미소를 짓는 이의 영혼이 다르기 때문일까? 그 미소는 실로 사악했다.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
늙은 뱁새가 황새를 쫓는다.
한걸음에 성큼성큼 멀어지는 황새의 걸음을 그 짧은 다리로 따라 해본다.
하지만 미시적 손해가 거시적 효율로 변하는 기적은 따라한다고 따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무려 십 년.
그래, 십 년이다.
전성기의 무인이 이제는 완연하게 늙어버리기까지 그 긴 세월 동안 거기에 집중, 아니 집착했다. 납매의 엄정한 합리성을 넘어 비효율과 비합리가 사실은 더 큰 효율과 합리가 되는 기적과도 같은 단계를 꿈꿨다.
하지만 그것은 그와 같은 범재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영역이었으니, 늙은 무인의 손에 남은 것은 그저 아무 의미 없는 주름뿐이었다.
아득하게 먼 곳으로 성큼성큼 나아가던 황새는 이제 그가 이해조차 할 수 없는 검을 그려냈다. 한정된 시간과 공간을 넘어 유한한 인간의 상상조차 넘어서 버린 무한의 일검.
바로 다음 단계조차 따라할 수 없었던 늙은 뱁새는 감히 그것을 흉내 냈다.
-꽈득
만약 뱁새가 황새를 쫓는다면 어찌 될까?
우리는 모두 그 답을 알고 있다.
마인의 대도가 공야찬의 오른손 약지와 소지를 잘라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뭉개버렸다.
늙은 도사가 비명을 내질렀다.
어린 제자는 그보다 더 거대한 비명을 내질렀다.
우습게도 그 비명이 늙은 도사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아마 이와 비슷했던 순간.
그의 사부 역시 이와 같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대체 사부는 무슨 힘이 있어 그렇게까지 자신을 지켜줬던 것일까?
마인의 대도가 그의 손가락을 짓이기는 바로 그 순간 죽을 힘을 다해 마인의 배를 걷어찼다.
고작 서너 걸음.
한번 크게 숨을 쉬면 사라질 그 짧은 시간의 여유 동안 늙은 도사는 장포를 –부욱 찢어 검에 자신의 손을 대충 묶었다. 검은 장포에 핏물이 축축하게 물들어간다.
운호는 그 모든 광경을 보았다.
“어떠냐.”
그 질문에 대하여 운호가 검으로 답을 했다. 이준형의 얼굴을 한 그의 팔뚝에 큼지막한 검상이 새겨졌다.
“저기 저 아이는 또 어떠하냐. 종화라고 했던가? 너의 인연 가운데 하나로구나. 어쩌면 네 삶의 수많은 갈림길 가운데는 저 아이와 맺어져 평탄한 삶을 살아가는 갈래도 있었을 터. 지금 그 가능성이 이렇게 저무는구나.”
-서걱
마인의 날카로운 검극이 종화를 스쳤다.
아무렇지 않았다. 어차피 검상 따위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이것 역시 그와 크게 다르지 않은 하나의 검상일 뿐이다.
앙다문 이를 따라 핏물이 흘러내린다.
그간의 수많은 경험을 통해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상처는 아무리 좋은 연고를 발라도 아주 진한 흔적을 남길만한 상처다.
방년 이십오세.
젊은 처녀의 얼굴에 되돌릴 수 없는 깊은 검상이 새겨졌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는 승리에 대한 의지를 꺼트리지 않았다.
그리고 운호는 그 모든 광경도 보았다.
-쾅!!!
운호의 왼발이 그 아랫배를 걷어찼다.
검격을 막아내기 위해 양손에 집중된 자하기공의 빈틈. 물러난 그의 입에서 멀건 침이 질질 흘러내렸다.
“그래, 이것도 좋겠지. 그릇된 천리가 만들어낸 꼭두각시가 그저 천리를 따라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는 장면 역시 그럴싸하지 않은가.”
오십 초.
어쩌면 그 미만.
운호가 그 헛소리에 답하지 않았다.
“왜? 설마 아니라고 생각하는가? 어린 아미타의 화신이여. 진정 모르겠느냐? 마이트레야는 이곳을 구원하지 않는다. 나의 스승 샤캬족의 성자 싯다르타 고타마가 말했다. 돌아올 다음 겁년에 마이트레야가 인세를 구원하리라고. 그래, 그분께서는 그리 말했다. 그가 구할 곳은 인세라고. 하지만 모르겠느냐? 이곳은 인세가 아니다. 어찌 이 세상이 인세인가. 고개를 돌려보면 온통 날뛰는 것은 수라와 나찰뿐이거늘. 이곳이 어찌 인세가 될 수 있겠는가.”
그 장황한 헛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서걱
한 자루의 검이 허무하게 바닥을 구른다.
그 검에는 얼기설기 묶여진 손가락 두 개가 부족한 늙은 뱁새의 오른손이 감겨있다.
오른손을 잃어버린 늙은이가 바닥을 구르는 검을 낚아채 익숙하지 않은 왼손으로 그것을 움켜쥔다.
운호는 그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의 근원이 또 다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떠들어댔다.
“스승님이 말씀하셨다. 미래불이 인세를 구원할 것이며, 그 이름은 마이트레야라고. 분명 그 말씀을 하실 때 스승님의 눈은 나를 향하고 있었다. 그래, 세상의 모든 이치를 알고 있던 스승님께서는 이미 이 모든 것을 꿰뚫고 있으셨던 것이 분명하다. 투시타에 머무르는 마이트레야가 다가올 새로운 겁년에 인세로 현현하여 인세를 구원한다면, 이 수라계를 구원하는 것은 나 티샤 마이트레야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헛소리의 연속.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저 마교의 대제사장은 자신이 떠드는 이 이야기를 진실로 믿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런 눈으로 나를 바라보지 말아라. 이 역겨운 수라계의 천리가 만들어낸 나의 대적자. 천리의 꼭두각시이니 네가 나의 반대편에 서 있는 이상 네가 행하는 일이 무엇인지는 알아야 하는 의무가 있다. 보아라, 그 그릇된 천리가 너에게 무엇을 선물하는지를!!”
마인의 검날이 얇게 종화의 오른팔 피부를 저미고 지나갔다.
팔꿈치에서 시작된 기다란 검상. 팔목 부분이야 옷으로 가려진다지만 손등은 옷으로 가릴 수도 없는 부위다. 안 그래도 흉측한 외모가 한층 더 흉측해지겠구나.
종화가 마음을 다잡았다.
검사에게 외모가 대체 무슨 상관인가. 이것 역시 그저 색(色)을 탐하고자하는 거짓된 마음의 흔들림일 뿐이다.
또한 거기서 멀지 않은 곳.
-푸욱
날카로운 창극이 부드러운 허벅지를 깊숙하게 파헤쳤다.
난전을 거듭하던 과정에서 얻은 어쩔 수 없는 상처였다. 예상했지만, 이것이 가장 적은 피해였으니까.
실제로 이 허벅지의 상처를 대신하여 무려 지급 마인 하나의 목이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강아현이 크게 뒤로 물러나 머리를 묶고 있던 끈을 풀러 자신의 오른쪽 허벅지를 강하게 꽉 조였다. 혈맥을 건드린 탓인지 기공만으로 지혈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허벅지를 묶은 천이 순식간에 피로 붉게 물들었다.
“아현아!!”
그녀의 아비가 무언가 보자기 하나를 던졌다.
지혈제다.
참······. 어떤 의미에서 대단하다. 평소에도 대체 얼마나 많은 약들을 품고 다니시는 걸까. 끈을 풀고 보자기 안의 가루를 대충 뿌렸다. 여전히 피가 울컥울컥 솟구쳤지만 그래도 이전보다 한결 낫다.
피로 물든 천으로 다시 한번 허벅지를 꽉 조였다.
전장의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았다. 아니 매우 좋지 않았다. 쉴 시간 따윈 없다. 시야가 닿는 곳. 자신의 합류가 가장 효율적일 싸움터로 향했다.
-깡!!!
묵직한 마인의 검격을 막아냈다. 그녀의 도움을 마치 예상했다는 것처럼 종화가 마인의 어깨를 향해 검을 내뻗는다.
“여기 지혈제.”
피투성이.
홀로 천마 하나를 감당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아니, 오히려 이만큼이나 버틴 것이 대단하다. 그녀가 강아현이 내민 지혈제를 사양하지 않았다. 거칠게 주머니를 찢어 온몸에 대충 뿌려댄다.
그리고 운호는 그 모든 장면을 지켜보았다.
스스로를 티샤 마이트레야라고 말한 그자가 이준형의 얼굴로 웃었다.
“아미타여. 아직 어린 아미타여. 흔들리는구나. 그래, 당연한 일이다. 천리는 그대를 나의 대적자로 선정했지만, 어찌 인간이 그저 천리의 도구일 수 있겠는가. 가거라. 가서 너의 인연들을 구하거라.”
“사기꾼이라 그런지 목숨 구걸도 아주 참신하게 하는구나.”
“구걸? 글쎄. 너는 내가 그런 것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느냐? 나는 세상을 구원할 유일한 구원자. 이 그릇된 세계가 존재하는 한 나 역시 불멸이다.”
운호의 검이 화산을 그렸다.
그렇게 그려낸 웅장한 화산의 봉우리가 팔을 뻗어 산맥을 일으킨다. 불멸의 구원자를 말하는 그는 감히 그 일 검을 받아내지 못했다.
연거푸 물러나는 그자의 옆구리에 선명한 자상이 새겨졌다. 분홍빛의 내장이 갈라진 옆구리 밖으로 슬쩍 모습을 드러냈다. 자신만만하게 웃던 이준형의 얼굴에 고통이 드리운다. 서둘러 자신의 내장을 밀어넣고 옆구리를 자하기공의 힘으로 움켜쥔다. 그리고 정확히 그만큼 그가 사역하는 보랏빛의 기운이 줄어들었다.
“너의 사부가 죽는다. 사제가 죽고, 동문이 죽는다. 네 생의 반려가 될 가능성이 있던 여인이, 그리고 또 다른 여인이 죽는다. 그 모든 죽음의 끝에 네가 얻는 것은 그저 약간의 유예일 뿐이다. 그릇된 천리의 꼭두각시여. 너는 정녕 그것을 원하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