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화
무의 이름(9)
이천 년.
실로 터무니없이 긴 세월이다.
가장 오래된 역사서라고 볼 수 있는 서경이 쓰여진 시기가 아직 이천년이 채 되지 않았다. 현재 화산의 기틀을 만들어낸 진희이 선생이 오백년 전 사람이고 화산이 시조로 모시는 관윤자 윤희가 함곡관에서 태상노군의 화신인 법을 전수 받은 것조차 아직 이천년이 채 되지 않았다. 심지어 도가의 시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태상노군의 진신(眞身). 노자조차도 고작 이천년 전 사람이었으니 그 시간이 얼마나 아득한 과거인지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리고 저 마교의 대제사장은 그 아득한 과거부터 현재까지 그 긴 시간을 살아왔다.
대체 얼마나 많은 적들을 상대했을 것이며 그 싸움을 통해 대체 얼마나 많은 경험을 축적했을까?
그의 손이 움직였다.
그리고 그것은 운호가 생각하는 가장 완벽한 대응과 일치했다. 재능을 이기는 세월의 힘이다. 아니, 이건 오히려 운호의 재능을 칭찬함이 옳다. 인간의 재능이 대체 얼마나 대단하기에 이천년의 축적이 만들어낸 판단력에 필적한단 말인가.
매농의 법에 따라 운호이 검이 움직였다.
그에 맞서는 자하기공의 보랏빛 진기가 허공을 가득 메웠다. 단순히 진기를 내뿜어대는 낭비가 아니었다. 그 진기의 배치가 만들어낸 엄밀한 규칙성은 실로 아름다워서 만약 운호 자신이 자하기공을 익혔다면 보여줄 움직임이라 해도 저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파검이 부드러운 호를 그렸다.
그 일 검에 담긴 가능성은 감히 무한을 논할만 했으니 그것이야말로 무형이라는 이름이 합당했다.
그리고 그 앞에서 그가 유한을 펼쳐냈다. 그것은 가장 공들여 쌓아 올린 유한의 집합이었다. 그 모든 동작 하나하나가 완성이라는 표현에 어울렸다. 하나의 초식을, 하나의 무공을 완성한다는 것은 얼마나 지난한 일이던가. 고작 십오 년의 시간 동안 무려 네 개의 검술을 대성하고 세 개의 검술을 그 직전까지 수련한 운호가 특별한 것이다. 아니, 그 특별한 재능에 헤아리기 힘든 시련들과 몽원경이라는 특별한 인연까지 겹쳐서야 간신히 그러한 경지에 이르렀다. 평탄한 삶을 살아가는 범부라면 평생동안 하나의 무공을 완성하지 못한다고 해도 결코 이상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물경 이천년.
필부의 삶은 육십이 채 되지 못한다. 그런 삶이 서른 번을 반복해도 도달할 수 없는 그 아득한 시간. ‘그’가 완성한 무공은 대체 몇이며 그 완성도는 대체 얼마만큼이던가.
자하기공의 기운은 불로의 공능을 제외한다면 평이하기 짝이 없었다. 점창처럼 사납지 않았고, 종남처럼 뜨겁지 않았으며, 곤륜처럼 표흘하지 않았고 무당처럼 흐르지 않았고 소림처럼 강맹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렇기에 어울렸다.
수십, 수백의 무공이 완전하게 펼쳐졌다. 손가락으로 찌르고 손바닥으로 후려쳤으며 손등으로 튕겨냈고 주먹으로 분쇄했다. 단순히 양손만이 아니었다. 그 날카로운 팔꿈치가, 긴 다리가, 단단한 이마가, 튼튼한 어깨가. 모두 완성된 무공을 펼쳐내는 도구가 됐다.
-쾅!!!!
무한의 검리가 유한의 완성을 뚫지 못했다.
지금 이준형이 보여주는 모습은 그야말로 선심후수. 기종이 추구하던 무학의 극의였다.
청허는 웃지 못했다.
정말로 청허의 말을 믿고 달려가던 현무는 갑작스럽게 벌어진 청허의 기습에 당황했으며 자신의 제자가 보여준 무학에 얼어붙었다.
-서걱
천하에 가르지 못할 것이 없는 무적의 검강이 천마의 어깨살을 한웅큼 도려냈다. 물론 그 댓가로 조왕 주고수 역시 가슴에 일격을 허용했지만 타격은 그리 크지 않았다.
-퉷
허나 피가 섞인 침을 뱉어내는 조왕의 표정은 그리 밝지 못했다.
“젠장, 상대를 잘못 골랐군. 아무리 봐도 저쪽이 주인공이고 이쪽이 조연 같단 말이지. 그러니 얼른 덤비거라. 이 찌끄래기야.”
“가련하구나.”
“갑자기 무슨 헛소리냐.”
“주팔의 손자. 할애비와 애비의 업보에 짓눌려 본능을 거세당해버린 종자야. 너는 너의 검강이 어찌하여 주팔의 그것도, 네 애비인 찬탈자의 그것에도 미치지 못하는지 아느냐? 궁금하다면 내 친히 알려······.”
-쾅!!!
“쯧, 하여간 꼭 칼로 안 되는 놈들이 입이 바쁘지. 남의 무공이 그리 빠삭한 놈이 자기 무공은 왜 그 모양인지 모르는 게냐? 뭐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는 것 같으니 본왕이 친히 알려주마. 그게 바로 종자의 한계라는 것이다. 이 더러운 마교의 종자 놈아.”
백열하는 검강이 마인의 허벅지를 갈랐다.
앞으로 길어봐야 백여 초.
조왕 주고수가 확실한 우위를 가져갔다.
마름이 없던 화산의 기운은 그에게 응하지 않았다. 평생을 수련해온 공부는 그저 누군가가 꾸며둔 음모의 일환일 뿐이었음이 드러났다.
하지만 그럼에도 노인은 묵묵하게 그저 평생을 해온 그대로 걸음을 밟고, 몸을 회전시켜, 주먹을 휘둘렀다.
-쾅!!!
포탄과도 같은 일격에 마인이 크게 밀려났다.
입을 열 여유조차 없었다. 존자의 몸으로 예비 돼 있던 이 돌연변이는 터무니없이 강했다. 아주 오랜 시간 잘못된 길을 걸어왔기에 그 영혼의 격. 그리고 그 깨달음은 법(法)과 도(道)에서 멀어도 한참 멀었다. 하지만 그 시간 동안 쌓아 올린 공은 정직했으니, 일견 단순무식해보이는 그 일격일격에 실린 힘은 감히 천지간의 기운을 스스로의 의지로 희롱한다는 천마조차도 감당하기 힘들만큼 막대했다.
그렇기에 그 싸움 역시 길어봐야 백여 초.
하지만 청무진인의 얼굴에는 여유가 아닌 다급함이 가득했다.
세 번째.
벽운은 자신의 무공이 눈앞의 이 천마에 미치지 못함을 알았다. 순양의 법으로는 열세를 면할 수 없었고, 태을의 법으로는 그저 우위를 점할 뿐 확실한 끝을 낼 수 없었다.
참으로 애석했다. 순양태을로 이 경지에 올랐지만, 차라리 태을검선과 같이 순양의 길만을 걸었더라면, 아니면 온전한 태을의 법을 얻을 수 있었더라면······.
순양과 태을 사이. 오랜 시간 내려온 종남의 법통과 새로운 기류 사이에서 두 가지를 모두 취했으나 어느 것도 얻지 못한 무인이 고군분투했다.
허나 길어봐야 백여 초.
마인의 반월도가 그의 옆구리를 스쳤다.
네 번째.
“현홍아!!”
마인의 발끝.
팔척의 장한이 칠공에 피를 토하며 크게 튕겨났다.
-으드득
굉원이 이를 갈았다.
마인이 휘두르는 저 한자루 창끝은 실로 매서웠다. 하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그의 양발과 그것을 휘두르는 저 악랄한 심계였다. 벌써 저자의 발끝에 목숨을 잃거나 이 싸움에 합류할 수 없게 된 제자만 넷이다.
“이 노옴!! 천마라는 작자가 요리조리 피하는 꼴이 참으로 쥐새끼같구나.”
“그러는 네 녀석은 화산의 도사라는 놈이 열 받아 길길이 날뛰는 꼴이 꼭 선불 맞은 맷돼지 같구나. 게다가 서른, 아니지. 이제 스물 여섯이로구나. 하여간 이렇게 잔뜩 몰려와서 단체로 덤벼드는 주제에 대체 뭐가 그리 당당하다고 이 노옴!! 거리는 게냐. 명색의 정파라는 작자들이 연수합격은 부끄럽다. 뭐 그런 것도 없는 것이냐?”
“흥!! 그건 어디까지나 정정당당한 무공을 익힌 무인끼리 겨룰 때나 하는 이야기다. 사악한 마인을 척결하는데 연수합격을 꺼릴 것은 또 무엇이냐.”
“아항, 그렇구나.”
-쾅!!
“또 당할 줄 알고!!”
“그러게. 마냥 무식한 맷돼지인줄 알았는데 그래도 학습능력이라는 것은 있는 맷돼지로구나.”
“이······, 이 놈이!!”
-푸욱!!
“쯧, 하여간. 네 사부라는 놈이 이리 흥분해서 날뛰니 제자라는 놈도 창날 무서운 줄 모르고 달려드는 것 아니냐. 게다가 저기 저 놈들은 아주 딱딱하게 굳은 것이 그냥 저 뒤로 도망가서 응원하는 게 차라리 나아 보이는데?”
설매각주 굉원을 비롯한 그 제자와 사손들까지. 날뛰는 마인이 그들의 목숨을 하나씩 끊어냈다.
‘젠장. 발에 차이는 것보다 차라리 창에 한 번 찔리는 쪽이 살아남을 확률이 더 높은 것 같은데?’
그리고 그 가운데 하나.
가장 커다란 덩치가 돋보이는 녀석은 죽지 않았다.
아직은.
그리고 마지막.
한계를 넘지 못한 무인이 한계 너머에 있는 무인의 검극을 받아넘겼다.
-쾅!!
쉽지 않았다.
단순한 일검일검의 교환이 뼈마디를 욱신거리게 했다. 강호의 소문에 따르자면 고작 열일곱의 나이에 운호는 단신으로 이러한 적과 싸웠고 승리했으며 결국 경지에 올랐다지?
아니, 아니다.
그 아이를 생각해선 안된다.
단순히 무공에 대한 질투가 아니었다.
종남에 전래하는 무공은 순양이다. 그 가르침에 따르자면 색에 혹하지 않고 순순한 양기를 배양하는 것만이 경지를 넘어설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공(功)이란 그와 같다. 색에 혹하지 않고 오직 공부에 집중해도 넘어서기 힘든 것이 경지다. 운호를 생각할 때마다 드는 그 복잡한 마음. 아마 그 마음의 흔들림이 없었더라면 종화 자신도 진즉에 경지를 넘어설 수 있지 않았을까?
스물다섯.
하지만 아직도 사춘기를 넘지 못한 처녀가 위태롭게 검을 휘둘렀다.
죽음이 아주 가까운 그곳에서.
***
“사부!!”
“움직이지 말아라!! 절대!!”
장당이 절규했다.
지급의 마인. 그것은 절망의 다른 이름이었다. 절정의 경지로 까마득하게 느껴지던 사부가 그의 대도를 막아내는 것에 급급했다.
납매의 현묘한 검술도 그 대도가 보여주는 막대한 파괴력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고작 일각의 시간이 지났을 뿐인데 어느새 그의 사부는 피투성이로 변해 있었다.
멍청이.
사부는 그에게 끼어들지 말고 그저 숨어있으라 명했다.
하지만 그렇게 피투성이가 되가는 사부를 보고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을까. 기회를 노렸다. 그리고 허점을 발견했다. 아니 허점을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과는 참혹했다.
마인이 아무렇지 않게 내지른 발길질에 다리뼈가 부러졌다.
함정이었다.
그리고 그로인해 사부는 더 힘들어졌다. 피하지도 못하는 그를 살리기 위해 사부는 더 많은 공격을 허용했다.
현종자 공야찬이 검을 휘둘렀다.
실로 절망적인 상대였다.
전성기의 기량을 유지했다면 조금 괜찮았을까? 그래, 어쩌면 그랬을지도. 아니, 아니다. 전성기의 그였다면 아마 지금 여기서 검을 휘두르고 있지도 않았겠지. 그에게는 꼭 이뤄야만하는 비원이 있었고, 그것은 제자의 목숨같은 것보다, 어쩌면 공야찬 자신의 목숨보다도 중요한 비원이었으니까.
저 멀리 운호가 검을 휘둘렀다.
이해할 수 없는 일 검이 그가 본 것 가운데 가장 완벽하게 움직이는 무공을 분쇄했다. 그것도 저토록 진한 보랏빛으로 물든 그것을.
바로 저것이었다.
아주 오래 전.
사부를 잃고, 손바닥이 찢어지고 또 찢어지도록 검을 휘두르던 자신이 상상하던 장면이.
-쾅!!!
엄지와 검지 사이.
호구가 찢어져 피가 흘러내렸다.
그래, 이게 다 업보다. 전성기의 강철보다 단단하던 호구라면 아마 삼십 합은 더 버텨냈을 것이다. 늙어 뼈마디가 쑤신다는 이유로 수련을 게을리한 탓이다.
아직 어린 제자는 자신의 실수를 자책하며 등 뒤에서 울고 있었다.
아주 오래전 자신처럼.
그리고 눈 깜빡 할 사이에 훌쩍 커버린 제자는 저기서 이상적인, 그렇기에 이해할 수 없는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공야찬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큭큭큭
“늙은이 피를 너무 많이 흘려 드디어 정신이 나간 건가?”
그때 사부가 어찌했더라?
피를 너무 흘려서일까? 아니면 너무 오래됐기 때문일까?
희미한 기억 속.
공야찬이 그저 검을 휘둘렀다. 마치 저 먼 곳에서 검을 휘두르는 자신의 제자처럼. 그리고 그 검은 마치 황새를 쫒아가는 뱁새를 닮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