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화
무의 이름(7)
마침내 ‘그’가 눈을 떴다.
참으로 상쾌한 기분이었다.
“정말 간신히 최소치를 맞춘 몸이라니. 하지만 뭐 그래도 덕분에 천상과 아주 멀어진 느낌이니 과히 나쁘지 않구나. 하지만 그래도 이 몸으로는 퍽이나 난감할터이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이 몸의 재질은 나쁘지 않았다. 아니, 나쁘지 않은 것을 넘어 최상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기에 대한 반응성만 따지자면 역대 최고 수준이었다. 마치 최초 자신의 몸이 그러했던 것처럼.
한 번의 호흡에 충만한 기운이 몰려든다.
아마 이런 몸이라면 적어도 마흔, 빠르면 삼십 대 중반에도 경지에 들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조차 늦다.
수백의 여과기가 화산의 기운을 가공했다. 그렇게 가공된 기운의 성질은 실로 편안하다. 어마어마한 기운이 몰려온다. 아무리 그 체질이 특수하다고 해도 보통의 경우라면 몸이 펑 하고 터져 나갈 만큼 막대한 기운이다. 하지만 그 압도적인 통제력이 그것을 제어한다.
-우드득, 우드드득
환골탈태라고 했던가?
그것은 저잣거리에 이야기하기 좋아하는 이들이 말로나 떠드는 현상이다. 인간의 몸은 본래 항상 변화한다. 몸을 구성하는 거의 모든 요소들이 사멸하고 다시 생성된다. 그것은 매우 정상적인 순환이다. 또한, 절세의 영약을 섭취했다고 해도 그것을 소화하는 것은 한순간이 아니다. 그렇기에 무공을 조금이라도 아는 이들은 그 환골탈태라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라 확신했다. 혹은 아주 먼 옜날 운호가 처음 자소단을 먹고 성장했던 것처럼, 그렇게 몇 달에 걸쳐 변화하는 과정 자체를 환골탈태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이준형의 몸에서 그 불가능한 일이 이뤄졌다.
뼈가 뒤틀리고 거죽이 벗겨진다. 인간의 몸이 그 자리에서 순식간에 재구성되는 터무니 없는 이적이 벌어진다.
순식간에 3촌 가량 더 커졌다.
팔과 다리 역시 그만큼 더 길어졌고 본래도 넓고 두꺼웠던 경맥이 이제는 광활하고 튼튼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확장, 강화됐다.
무엇보다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은 그의 왼쪽 상반신이었다.
열세 살.
운호와의 대련으로 그의 팔은 한 번 박살이 났다. 신의라는 표현이 적절한 의원과 최고의 약제들. 그리고 부단한 재활로 일상생활은 물론이거니와 무공을 사용하는데도 지장이 없을 만큼 회복했지만, 그럼에도 그 팔은 온전하지 못했다. 자세히 재보면 오른팔에 비해 두 푼 정도 짧았는데 그 길이도 길이였지만 근력 역시 부족했고, 유연성 역시 떨어졌었다.
-퉤
이준형이 입으로 탁기를 뱉어냈다. 압축된 검은빛의 오물이 한 평 가량의 대지를 순식간에 검게 물들였다.
하지만 아직이었다. 뱉어내야 할 탁기는 고작 이 정도가 아니다. 본래라면 땀의 형태로 찐득하게 배출돼야 할 탁기들이었다. 하지만 이 짓거리만 벌써 여덟 번째다. 그동안 요령이 생기지 않았다면 그쪽이 오히려 바보겠지.
그리고 바로 그 순간이었다.
-쾅!!!
별빛에 휘감긴 파검이 그를 덮쳐왔다.
“운호야!! 이게 갑자기 무슨 짓이야.”
대답은 없었다.
한 치의 주저함도 없는 검격이 그의 몸을 덮쳐온다.
“백운호!! 대체 무슨 오해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대화로 해결하자.”
이준형의 얼굴과 이준형의 목소리로.
“설마······, 설마 마교의 대제사장에게 몸을 뺏기기라도 한 거야? 백운호!!”
한 번의 호흡에 수백 명이 만들어내는 진기가 몰려들었다. 일각, 일각. 이준형의 몸에 막대한 진기가 쌓여간다. 보통의 사람이 수일을 고련해야 할 진기가 고작 한 번의 호흡에 축적된다.
터무니없다.
저기서 싸움을 이어가는,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싸움에서 보호받는 화산파 아직 어린 제자들의 귀에 그 목소리가 들렸다.
자하기공을 선택하지 않은 제자들이다. 그 목적이 무엇이든 그 결정의 과정에 백운호가 강호에서 보여준 압도적인 활약이 포함되지 않은 이들은 없다. 하지만 동시에 저기서 저렇게 외치는 이는 그들이 직접 본 사형들 가운데 가장 듬직했으며 가장 정의로웠던 사형이다.
이준형이 피를 토하는 목소리로 외쳤다.
“운호야!! 정신 차려라!! 넌 자랑스러운 화산의 제자다. 화산의 새로운 신검이다!! 그리고 나 이준형의 목표다!! 넌 그깟 마교의 악적 따위 얼마든지 이겨낼 수 있다!! 운호야!!!!”
자색의 기운이 유형화되기 시작했다.
자하기공 사단공과 오단공을 넘어 육단공. 초절정을 코앞에 둔 경지다. 하지만 지금 이준형이 보여주는 무위는 그런 경지조차 넘어있었다.
검종지보라 불리는 운호의 재능은 전투 시 순간순간의 모든 정보를 받아들이고 분석하여 최적의 경로를 찾아 낸다. 그리고 그것은 운호가 한 번에 처리할 수 있는 정보의 양이 늘어날수록 더 정교해져서 하수를 상대로 싸울 때의 운호는 거의 전지(全知)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렇기에 지금 이준형, 아니 마교의 대제사장이 보여주는 무공은 운호의 당황을 끌어내기에 충분했다.
대체 어떻게!!
마교의 대제사장이 선택한 것이 이준형의 몸이라는 것을 알아챈 직후 운호의 선택은 간단했다. 그가 무슨 이상한 짓을 저지르기 전에 끝내버린다.
일찍이 내공의 한계와 육체의 한계에 얽매여봤기에 알 수 있었다. 아무리 드높은 정신적 경지를 개척했다고 해도 인간의 육신을 입고 있는 이상 그 한계를 넘어설 수는 없다. 이준형의 경지는 이제 막 절정에 접어든 수준에 불과했다. 지금 운호와는 절대 넘어 설 수 없는 막대한 격차가 존재하는 셈이다.
“운호야!!”
하지만 그럼에도 단번에 저 자를 끝장낼 수 없었다. 최단시간에 대제사장의 목을 베어버릴 길을 선택했지만, 번번이 그 길이 좌초된다.
한 가지 이유는 알 수 있었다.
현재 저자가 가진 힘의 총량은 운호에게 크게 못 미치지만 한 번에 뽑아내는 힘은 크게 뒤지지 않는다. 그것은 광양지체라는 이준형의 체질과 무한에 가깝게 공급되고 있는 자하기공의 막대한 진기 덕분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운호는 이준형에 비해 형편없이 부족하던 시절에도 그를 완벽히 압도했던 적이 있다. 아니, 지금까지 운호는 자신보다 더 빠르고 더 강력한 힘을 휘두르는 상대로 꾸준히 승리해왔다. 그리고 그 반대의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아미타의 어린 화신이여. 당황스러운가?’
이준형이 속삭였다.
운호가 답하지 않았다. 그저 그의 감각이 소리치는 가장 완벽한 검로로 검을 내리그었다. 그것은 어쩌면 지금 순간 가장 완벽에 가까운 일검이었다.
그리고 그 앞에서 이준형이 크게 호흡했다.
그의 단단하고 드넓은 경맥을 따라 육단공에 이른 자하기공의 진기가 일순간에 발산됐다. 저 별빛에 비하자면 참으로 투박하기 짝이 없었다. 별빛을 흉내낸 가짜 강기. 자하신공이 만들어낸 그 가짜가 파괴됐고, 또 파괴됐고, 또 파괴됐다. 하지만 그 파괴의 연속은 가장 완벽에 가까운 그 일검을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흘려내는 길이기도 했다. 마치 운호 자신이 지금 반대의 위치였다면 택했음 직한 방식 그대로였다.
대제사장이 뒤로 크게 튕겨 나갔다.
“운호야!!”
실로 절절한 외침.
하지만 그 외침 사이로 아주 작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세상천지에 전지의 능(能)을 깨우친 이가 어디 너뿐인 줄 알았더냐.’
시간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다.
참으로 아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하다. 마지막 한 번의 호흡에는 도구들의 사정을 봐줄 필요도 없었으니까.
수백의 여과기들이 몸을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그들은 단순히 호흡을 통해 화산의 기운을 모으는 것을 넘어 오랜 시간 수련해온 자신의 진기까지 찐득하게 녹여냈다. 물론 허공을 격하고 이뤄지는 그 작업의 효율은 실로 터무니 없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 숫자가, 그 양이 그 터무니 없는 비효율을 대신했다.
한순간 어마어마한 기운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그 어마어마한 기운이 이준형에게 몰려간다. 어찌나 막대한 기운인지 그의 근처에 모여든 기운은 그 자체로 찐득하게 자줏빛으로 유형화되기 시작했다.
자줏빛 서기가 그의 주위를 감돈다.
폭발적으로 늘어난 양이 마침내 또 한 번 질적인 변화를 일으켰다. 튼튼하기 짝이 없던 이준형의 경맥이 찢어지고 다시 아문다. 인간에게 허락된 힘의 영역 너머. 저 아득한 초월을 향한 첫걸음.
자하기공이 그 역할을 또 한 번 충실하게 해냈다. 오직 기운의 집적만으로 그 모든 과정을 가장 흡사하게 재현했다. 그리하여 분류하기를 초절정. 이준형의 탈을 뒤집어쓴 마교의 대제사장이 초절정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 순간.
그에게 자하기공의 진기를 공급하던 기백 명의 여과기들이 동시다발적으로 깨어났다.
-커헉!!
텅 빈 기해혈. 단순히 진기가 모두 소진된 것이 아니었다. 그들 가운데 태반이 진기의 반영구적인 손상을 입었다.
아직 젊고 강건한 이들은 차라리 괜찮았다.
하지만 자하기공의 힘으로 젊음을 유지하던 이들. 혹은 자하기공의 힘으로도 돌이킬 수 없을만큼 노화가 시작됐던 이들의 상태는 실로 심각했다.
-털썩.
마치 주화입마에 든 것처럼.
몇몇 인물들이 그 자리에 털썩 쓰러졌다. 약해진 뼈와 물렁해진 근육. 운이 좋은 이들은 그저 뼈마디가 부러지는 것 정도로 끝났다. 하지만 운이 좋지 못한 이들은 뼈마디가 부러지는 것 정도로 그치지 않았다.
“자······, 장문 사형!!”
그리고 불행하게도 화산파의 장문인은 그 가운데 운이 좋지 못한 이에 속했다. 육단공에 이르른 자하기공에도 불구하고 이미 몸의 중심인 척추가 무너지기 시작했던 장문인이다.
진기의 손상에 이어진 낙상.
그것은 일흔이 넘은 병약한 노인이 견뎌내기엔 너무 가혹한 일이었다. 그야말로 아닌 밤중의 홍두깨와 같은 사망.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오십대에서 육십대 초반의 정정한 모습을 자랑하던 장로들의 얼굴에 검버섯이 피어났다. 근육은 탄력을 잃었고 뼈는 그 나이에 어울리는 강도로 돌아갔다.
“사부님!!”
현무가 장문인의 시신을 붙잡았다.
천지와 하나가 된 것 같았던 감각은 사라졌고 텅 빈 기해혈의 기운은 차오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적어도 몇 달은 족히 요양해야 할 것 같은 심각한 내상.
“굉허야!!”
청허진인이 자신의 제자를 향해 나는 듯 달려왔다.
지금 눈을 뜬 이들 가운데 가장 두터운 내공을 지니고 있던 그였지만, 그 역시 기해혈의 진기 가운데 팔 할 가까운 양이 소진된 상태였다.
불민한 사부 때문에 참으로 고생이 많았던 제자였다. 그래도 무사히 자신의 임무를 끝내고 이제는 조금 편안하게 남은 생을 보내리라 생각했다.
굉허진인 경원탁.
고작 열 살의 나이에 또랑또랑한 눈으로 자신을 따르던 모습이 눈에 선했다.
“탁아······. 원탁아······. 어찌 네가 이 사부보다 먼저 간단 말이더냐. 어찌!!”
축 늘어진 늙은 장문인의 시체 앞에서 청허진인이 오열했다.
마인과 싸움을 이어나가던 화산파 무인들 역시 작금의 사태에 술렁였다.
그리고 그 사이.
-쾅!!!
운호의 검극이 대제사장의 가슴을 후려쳤다.
전지의 능이라고?
참으로 우스운 이야기였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