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화
무의 이름(5)
권신 청무진인.
그는 구십 년에 가까운 삶이 통째로 부정당했다. 그것을 충격을 어찌 필설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모든 의욕이 사그라들었고 그저 이대로 사라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쯧 멍청한 늙은이 같으니. 방문 좌도라 매도당했던 어린아이도 저리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데 명색의 어른이라는 작자가 그토록 쉽게 포기를 한다고? 예끼 이 사람아. 대체 그 나이 먹도록 뭘 보고 듣고 배운 겐가. 아, 맞다. 그러고 보니 생각이라는 걸 한 적 없이 그냥 시키는 것만 했더랬지? 그러니 본 것도 없고 들은 것도 없고 배운 것도 없겠군. 쯧, 하여간 그러니 진즉에 종남에 보냈더라면 저리 안쓰럽게 홀로 싸우고 있진 않았을 터인데.-
그런 그의 귓가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렸다.
“자명?”
-잘 생각해보게. 방문의 좌도가 무엇이고, 대도의 무문이 무엇인지. 아무리 평생 생각이라는 걸 안 하고 살아왔다지만 그렇다고 생각 좀 해야할 순간이 되자마자 그렇게 주저 앉아서야 쓰겠는가. 뭐가 됐건 자네는 내 호적수 아닌가.
검선과 권신. 그들은 종남과 화산이라는 바로 지척에 있는 대문파에서 각자 문파를 대표하는 고수로 자라났었다.
천무십칠성의 일원으로 함께 묶이기는 했지만, 검선은 죽는 그 순간까지도 권신의 이름을 넘어서지 못했다. 종남의 이름이 화산을 넘어서지 못했던 것처럼.
하지만 적어도 마지막 만남.
현무가 벽운에게 패배하던 그 순간만큼은 조금 달랐었다. 어쩌면 그때가 청무 진인이 주어진 길을 그저 묵묵히 걷기만 하는 것에 약간의 의문을 품었던 최초의 순간이 아니었을까? 물론 청무 진인은 검선처럼 사문에 내려오는 무공을 대신하여 새로운 뭔가를 만들어낼 결심까지는 결코 할 수 없었다.
-그거야 당연한 일이지. 나야 이등이었고, 자네는 일등이었으니까. 잘 가고 있는 사람이 자기 길에 의문을 품을 이유가 뭐가 있었겠나.
평생 걸어 온 길이 틀린 길이었다.
이 길은 꽉 막힌 길이었고, 돌아가기에 그가 걸어온 거리는 너무 멀었다.
-그래서? 그래서 그냥 그 자리에 주저 앉겠다고? 예끼 이 사람아. 농담이 지나치지 않는가. 내가 평생을 걸고 싸워온 것은 천하제일의 대문파 화산이었고, 그런 대문파 화산을 대표하는 고수였다네. 그러니 자네에게는 의무가 있어. 어서 일어나 그 의무를 다하시게. 그렇게 앉아서 넋을 놓고 있는 것은 여기에 올라와 내가 담근 신선주를 마시며 해도 늦지 않으니까.
“내가······. 그곳에 갈 수 있겠는가?”
-글쎄, 그거야 나도 모르지. 어디까지나 자네 하기 나름 아니겠는가. 하지만 적어도 지금 거기서 그렇게 넋을 잃고 있는다면 어떨지는 확실히 알겠구만. 그러니 어서 그 무거운 엉덩이로 뭉기적거리지 말고 퍼뜩 일어나게나. 나도 시간이 없으니까.
청무 진인이 눈을 떴다.
백일몽이라고 했던가?
한바탕 꿈을 꾸고 깨어났을 때 남은 것은 희미한 잔향인 법이다.
여전히 길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기에 권신 청무 진인은 하나밖에 남지 않은 왼손을 움켜쥐었다. 그것이 늙은 권사가 구십 평생을 살아온 방식이었다.
권신의 호흡에 따라 화산이 다시 한번 꿈틀됐다. 그리하여 권신 청무 진인이 지상이 허락한 법칙의 극한에 도달했다.
사람의 형상으로 일렁이는 별빛 앞에서 자색의 진기가 불을 내뿜었다.
-감히!! 네가 낄 자리가 아니다.
대제사장의 투명한 손이 그를 위협했다.
하지만 통하지 않았다.
빛의 속도를 초월한 그의 손은 원인 이전의 결과였다. 그러나 극한에 다다른 권신의 세계에는 시간조차 흐르지 않았고, 그렇기에 원인도 결과도 발생할 수 없었다.
-쾅!!!
그저 개념과 개념의 충돌.
한순간 권신의 힘이 뭉텅이로 깎여나갔다.
멈춰있던 권신의 시간이 다시금 빠르게 가속됐다. 물론 힘이 깎여 나간 것은 대제사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결과가 다르다. 대제사장의 몸이 더 크게 분해됐다. 세상과 경계 지점에 서 있던 그의 몸이 한 걸음 더 경계 너머로 움직인 셈이다.
세상의 모든 힘은 사용할수록 줄어들고 줄어든 만큼 느려지고 약해진다. 하지만 허(虛)는 달랐다. 줄어든 만큼 오히려 더 빨라지고 더 강해진다.
운호의 몸에 피분수가 솟구쳤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쓰러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 사이 권신이 또 한 번 크게 호흡했다. 그리고 그 호흡을 따라 화산의 정기가 요동쳤다.
권신이 직감했다.
이대로는 안된다.
우리는 시간을 끌수록 약해지고, 상대는 더 강해진다. 물론 끝은 있다. 일정 이상의 시간을 버텨낸다면 적은 자멸할 것이다. 하지만 그 이전에 적이 원하는 것을 이룰 가능성은 훨씬 더 크다.
그때, 그의 시선에 다섯 천마와 스물 다섯의 지마가 들어왔다.
워낙에 터무니 없는 싸움이었기에 상대적으로 초라해보였지만 실로 무시무시한 전력이다. 강호의 그 어떤 문파도 단독으로는 저들과 자웅을 결하기 어렵다.
허면 그 대단한 전력은 지금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하늘과 땅을 잇는 거대한 용화수가 꿈틀거렸다. 그리고 꿈틀거림을 따라 검붉은색의 찐득한 마기가 번들거렸다.
그래, 생각은 여기까지다.
물론 검선이 이 꼴을 본다면 생각을 안 해서 그렇게 당해놓고 또 생각하기를 포기하는 것인가. 라며 일갈을 할 것 같았지만 그게 뭐 어떻단 말인가. 때론 생각하며 움직이지 않는 것보다 일단 움직이고 보는 것이 나은 것을.
권신이 잘 굴러가지 않는 머리를 굴리는 대신, 마음먹은 대로 움직이는 몸을 움직였다.
가장 먼저 노린 것은 돌출된 지급 마인의 머리통.
-감히!!
대제사장이 움직였다.
아니, 움직였었다.
그리고 운호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다.
권신은 생각을 포기했다. 그리고 운호는 정확히 그 반대였다.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아득한 천상은 여전히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조금만 방심하면 그대로 육체라는 틀을 벗고 저 천상으로 날아가 버릴 것만 같은 아찔한 감각 속에서 운호는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권신이 어째서 포기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앉은 자리에서 세상의 모든 인과를 읽어내는 것은 정말로 저 세상의 너머. 전지의 세계로 가야지만 가능한 일이었으니까.
그렇기에 그저 추측한다. 권신은 무언가를 알아냈고 그것은 저 늙은 무인이 모든 것을 포기하게 할 만큼 충격적인 일이었다.
‘혹시 백운 진인이 정말로 마교의 대제사장과 동일 인물이었다는 건가?’
아마 어느 순간 대제사장은 백운 진인의 몸을 차지했을 것이다. 만약 그 시점이 생각보다 훨씬 더 과거였다면? 청무 태사조님이 기억하는 백운 진인과 마교의 대제사장이 동일 인물이라면? 그렇다면 지금 대제사장이 어째서 화산에 나타났는지, 그리고 그가 무엇을 노리는지도 이해된다.
청무 태사조님의 몸.
아마 마교의 대제사장이 예비해둔 몸은 청무 태사조의 몸이 아니었을까?
제한된 단서에서 시작한 운호의 추측은 시작은 틀렸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 결과는 정답에 가까웠다.
청무 진인이 마교의 마인들을 향해 달려갔다.
대제사장의 몸이 움직였다.
그리고 운호가 선택했다.
-퍼버버버벅!!
-서걱
거대한 타격음과 날카로운 절삭음이 동시에 울려 퍼졌다.
대제사장은 청무의 시도를 완벽하게 막아냈다.
청무는 처음부터 마인들을 향해 돌진한 적이 없던 것처럼 제 자리에서 그대로 저 먼 곳으로 튕겨나갔다. 그 와중에 생명에는 지장을 보이지 않는 것이 과연 운호가 추측한 그대로다.
그리고 동시에 운호의 검극이 지급 마인의 목을 갈랐다. 본래는 더 많은 마인의 목을 가르려 했지만 성공한 것은 고작 하나. 마인의 목을 날리는 순간, 대제사장의 속도가 한층 더 빨라진 탓이다.
일렁거리는 대제사장의 몸뚱이가 운호의 검을 가로막았다.
-이······놈이 감히?-
그 속도는 지금 운호가 감당 가능한 인과의 역전 범위를 훨씬 넘어있는 것이었다.
사실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당장 현재의 운호만 하더라도 저 천상으로 끌려갈 것 같은 상황이다. 헌데 그보다 더 거대한 힘을 휘두르는 이자가 이토록 오랜 시간 인세에 남아있다고?
하지만 그 덕분에 운호는 지금 마인들의 역할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이 녀석들 말뚝이로구나.”
그랬다. 이 마인들은 대제사장이 저 먼 천상의 인력을 버텨내기 위하여 지상에 박아둔 일종의 닻이자 말뚝이었다.
대제사장이 답하지 않았다.
그저 그 하얀 손을 세차게 휘둘렀다. 아직 여유는 있다. 눈앞에 걸리적거리는 이것을 치우고 권신의 몸을 손에 넣으면 모든 것은 해결된다.
그리고 그 순간.
또 하나.
마인의 목에 새빨간 선이 그어졌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잘 모르겠다만 이 더러운 마인놈들을 죽여 없애는 것이 저 괴물을 상대할 방법이다. 뭐 그런 소리인가 보구나.”
하얗게 빛나는 신검.
천하에 베지 못하는 것이 없다는 무형의 검강을 휘두르는 조왕 주고수였다.
예상하지 못한 현재.
그렇기에 대제사장의 손은 그 예상하지 못한 현재의 사건이 일어나기 전을 유영했다.
그리고 그것은 치명적인 실수가 됐다.
-쾅!!!
“젠장, 완벽한 기습이었는데. 이걸 막아내다니. 이 괴물이 그 대제사장인가 뭔가 하는 놈이냐?”
-커억!!-
처음이었다.
대제사장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운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일렁거리는 별빛 사이. 주고수의 무형 검강이 대제사장의 투명해진 하얀 손을 파고들었다.
-주팔!! 이 저주받을 종자가!!-
이것은 대제사장도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아니, 이 자리의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하늘이 열렸다. 상서로운 빛이 쏟아진다. 별빛으로 화한 대제사장의 몸이 천상의 꽃이 되어 흩날리고 그윽한 향기가 사방에 진동했다.
다급한 그의 시선이 주변을 살폈다.
권신 청무 진인의 마음은 여전히 단단했다. 안배는 훌륭했지만, 저 돌연변이와 같은 변종은 그것을 이겨냈다. 가장 좋은 몸뚱이지만 다시 시도할 시간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차선책을 살폈다.
만족스러운 몸은 아니었다. 심지어 지금 사용하는 몸보다도 못하다. 그런 주제에 제법 열심히 저항하는 것이 부작용도 걱정이 된다. 하지만 그래도 당장에 천상에 끌려가게 생긴 판국에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응? 대체 어떻게?’
마침내 그가 그렇게 결심을 내리려는 찰나.
저 뒤편.
미약하기 짝이 없는 기운의 한 가운데 또 하나. 그의 피륙을 섭취한 이가 보였다. 아직 자하 기공의 오단공도 성취하지 못한 미약한 녀석이다.
하지만······.
마침내 별빛이 사그라들었다.
활짝 열린 천상의 문이 소리소문없이 사라졌다.
하지만 그 결과는 파검의 우화등선과는 사뭇 달랐다.
-털썩
늙어 추레한 노인의 몸뚱이가 쓰러졌다.
그 얼굴은 바로 전 초월적인 힘을 휘두르던 마교의 대제사장과 같았다.
운호 역시 자신을 채우던 초월적인 감각이 사그라듬을 느꼈다.
지금 운호가 보여준 경지는 온전하게 본인이 개척한 결과라기보다는 어디까지나 우연이라고 봄이 옳았다. 공두베도 예상하지 못했던 파검의 기능. 그리고 그것을 활용할만한 운호의 역량이 겹쳐진 결과다.
‘하지만······’
그럼에도 운호는 자신을 향해 손짓하던 저 천상이 머지않았음을 느꼈다.
“뭐야? 설마 이렇게 끝난건가? 이렇게 싱겁게?”
조왕 주고수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그리고 동시에 저 마교의 대주교와 지상을 연결하던 끈들이 눈을 떴다.
“그럴 리가요······.”
화산의 제자들은 무슨 일인지 여전히 눈을 뜨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