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화
무의 이름(4)
“그러니까 동등한 조건에서 검을 휘두르면 절대 질 것 같진 않다. 뭐 그런 이야기인가?”
“제일 자신 있는 게 초식 싸움이라는 말이 어떻게 그렇게 비약이 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뭐 얼추 비슷한 느낌이긴 합니다.”
공두베가 운호에게 자신의 강점을 물었을 때, 운호는 주저 없이 수 싸움을 이야기했다.
“맙소사······.”
그리고 공두베가 직접 운호의 그것을 확인했을 때, 그는 감탄을 넘어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단순히 수싸움에 능하다는 말 정도로 넘어갈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동등한 조건에서 검을 휘두르면 절대 질 것 같지 않다? 공두베 나름대로 과장을 해서 말했던 그 농담이 과장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고작 그 정도로 이야기하는 것은 과소평가에 가깝다.
검종지보
터무니없는 재능이었다. 아니, 아니다. 공두베 자신의 금속을 다루는 재능이 재능이라기 보다는 이능에 가까운 것처럼 이 운호란 아이 역시 검을 다루는 것에 있어서 재능이 아닌 이능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냥 침착하게 잘 보고 예측하는 거죠.”
운호는 그것에 대하여 일견 무성의해 보이기까지 한 설명을 내놓았다. 하지만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것은 공두베 자신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불길에 타오르는 금속을 보고 있자면 언제가 가장 말랑한 순간인지를 그냥 알 수 있고 금속을 두들기던 망치의 감각에서 얼마나 더 두들기면 가장 좋은 경도와 탄성을 지니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노련한 대장장이가 수많은 경험을 통해 아는 것과는 다르다. 사람이 태어나 숨을 쉬는 것처럼, 새가 하늘을 나는 것처럼. 물고기가 물을 헤엄치는 것처럼. 그냥 그렇게 알 수 있다. 어떻게 그것을 필설로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
-대체 어떻게!?
흩어져가는 별빛이 일렁였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지상에 얽매인 인간이 대체 어떻게!! 청무 진인은 지상의 법칙이 허락한 가장 거대한 권능을 휘둘렀다. 가장 빠른 속도를 영으로 돌리는 힘이라니. 대제사장 본인도 감히 예상하지 못했던 힘이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고작 일격을 막아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빛보다 빠르고, 그렇기에 시간조차 초월한, 그렇기에 인과 너머에 존재하는 힘이란 바로 그런 것이었으니까.
“글쎄······, 그냥?”
우연? 아니, 불가능하다. 행위 이전에 이미 결정된 일을 대체 어떻게 우연으로 막아낸단 말인가. 그의 시선이 운호가 쥐고 있는 저 칠흑과도 같은 검을 바라봤다. 의지를 가진 신검이라. 희귀하지만 처음 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느낌이 묘했다. 무엇보다 그 검에 담긴 백의 기질이 최근 그에게 가장 깊숙한 인상을 새겨넣은 인간의 백과 참으로 닮았다.
-파검?
운호가 검을 휘둘렀다.
아니, 휘둘렀었다. 그리고 그것보다 아주 조금 과거에 대제사장이 그 공격을 막아냈었다. 아니, 운호가 검을 휘둘렀던 과거는 없었다. 그는 검을 찔러넣었었다. 대제사장 역시 그것을 막아내지 않았다. 그저 그것보다 한 박자 먼저 운호의 머리통을 후려갈겼다.
-퍼억
수박이 깨지는 것처럼 운호의 머리통이 깨져나갔다.
아니, 아니다. 운호는 그 공격을 허용하지 않았다. 실로 절묘한 철판교의 수법으로 그것을 피하고 파검을 날려 대제사장의 오른팔을 잘라냈다.
그렇게 두 사람 사이의 인과가 얽히고, 시간의 순서가 엉망으로 변했다.
-대체 어떻게!!!
대제사장은 도저히 이 현상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외침을 따라 그의 몸을 구성하는 별빛들이 더 많이 흩어졌다. 허란 본디 비울수록 더 빠르고 더 강해지는 법. 그의 몸이 빛의 속도를 넘어선 곳에서 한층 더 빨라졌다.
여과되지 않은, 여과될 수 없는 기운이 파검을 휩쓸고 지나갔다. 공두베의 손을 거친 결과 이제는 검에 완벽하게 안착한 파검의 백(魄)이 비명을 내질렀다. 하지만 그 비명만큼 운호가 손에 쥔 파검은 더 진한 검은 빛을 내뿜었다. 그리고 이것은 이 검을 재조립한 공두베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그가 판단한 운호의 재능은 압도적인 정보의 습득과 실시간으로 이뤄지는 분석이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공두베 자신의 이능과 비슷하다. 차이가 있다면 운호는 싸움, 공두베 자신은 제련의 과정이라는 차이 정도다.
“변수가 여간 많은 것이 아니겠군.”
물론 금속의 제련 역시 많은 변수를 품고 있지만, 전투에 비할 만큼은 아니다.
그렇기에 그가 판단했을 때 운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더 빠른 발이나, 더 강한 팔, 더 튼튼한 검 같은 것이 아니었다.
두 번째 머리.
상황을 파악하고 결정을 내리는 머리야 말로 운호의 핵심이었다. 하지만 어찌 사람의 머리가 둘이 될 수 있단 말인가. 공두베는 본래 정답의 기능에서 그 단초를 얻었다.
정답은 본래 신이 거하던 검이었다.
‘정답’이라는 이름은 신의 선택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니, 인간을 넘어선 이해를 갖고있던 신의 선택은 인간의 기준에서 언제나 ‘정답’에 가까웠다.
그렇기에 과거 정답에 신이 머물던 시절. 이 검이 필요로 했던 것은 그저 검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는 튼튼한 몸의 인간이었으니 사실상 머리는 검이고, 검을 쥔 인간은 그저 수족이나 다름없었다.
파검의 의지와 기억이 동결됐다.
그저 남은 것은 연산의 기능뿐. 그것을 대신하여 운호의 사고가 그만큼 확장됐다.
더 많은 것을 더 멀리 보고 더 빠르게 판단을 내렸다.
물론 지금 이 상황은 공두베의 예상을 아득히 넘어가는 일이었다. 사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세상에 누가 있어 이런 것을 예상할 수 있었을까? 다만 그 예상을 넘어갔다는 것이 부정적인 의미는 아니었다.
인간의 두뇌는 지상의 이치를 벗어나는 것을 이해는커녕 인지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미묘하게 지상의 이치와 괴리된 신검 ‘파검’은 그것이 가능했다. 그는 게걸스럽게 흩날리는 백운진인의 ‘정보’를 받아들였다. 물론 그 가운데 그가 ‘이해’ 가능한 것은 만분지 일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이미 한차례 지상을 슬쩍 벗어났던 운호의 영혼이 그 정보를 ‘이해’하고 움직였으니까.
그리고 동시에 운호의 깊숙한 곳. 이제는 완연한 산맥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몽원경 내부 역시 그와 비슷하지만, 그보다는 조금 비극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건?”
유사 이래 가장 완벽한 육체.
감히 인간의 몸으로 금강역사를 논하는 그의 몸뚱이로 파편화된 허(虛)가 파고들었다.
허는 세상을 구성하는 음양(陰陽)에 속하지 않는다. 부재(不在)란 본디 존재(存在)하지 않음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니 부재 역시 크게는 음양의 이치에 속한다. 존재가 있기에 부재가 있고, 부재가 있기이 존재가 있다.
하지만 허는 다르다. 그것은 비어 있음의 존재다. 허(虛)라는 정보가 활불의 존재 자체를 조금씩 지우기 시작했다. 단순한 삭제가 아닌 본래 존재하지 않았던 그것으로.
“으어어······. 안 돼!! 안 돼!!!!!!!”
활불의 비명이 몽원경을 울렸다.
무려 오백 년을 쌓인 백이 허로 승화됐다. 그 과정에서 생기는 막대한 힘은 몽원경을 넘어 현실에서 검을 휘두르는 운호에게 전달됐다. 물론 그 과정에서 손실되는 힘의 크기는 막대했다.
-서걱!!
7초 전 운호의 몸이 대각선을 갈라졌다.
그리고 8초 전 운호가 그것을 아슬아슬하게 피해냈다. 대각선으로 갈라진 운호의 몸이 취소되고 그의 가슴팍에 기다란 자상이 남았다.
운호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방금의 상처 때문일까?
아니, 아니었다. 물론 핏물이 주르륵 흘러내리는 육체의 상처는 쓰라리다. 하지만 진정으로 그를 괴롭게 하는 것은 그에게 지금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존재한다는 점이었다.
천상의 지혜가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동시에 운호의 검이 그윽한 향기를 내뿜었다.
-우우웅
동시에 마교 대제사장의 몸이 크게 일렁였다.
어느새 그의 몸은 한층 더 투명하고 한층 더 가벼워졌다.
-아.직.이.다!!!
시간은 아직 흐르지 않았다.
청무 진인은 이제 막 백운 진인의 정체를 깨닫고 절망했다. 마교의 마인들은 피를 흘렸고 자하기공을 익힌 화산의 무인들은 여전히 화산의 기운을 뽑아내 대제사장에게 전달하고 있었다.
아득한 천상.
속세를 벗어난 그곳에서 운호를 불렀다.
색향성미촉(色香聲味觸)
희노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慾)
오욕과 칠정.
그래, 천상의 지혜 앞에서 인간의 육체를 뒤집어쓰고 있기에 경험해야 하는 이 모든 것들은 얼마나 하찮은가.
운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렇지 않다. 어찌 그것이 하찮은가. 울고 웃고 화내고 즐거워하고 욕망하고 미워하며 마침내 사랑하는 그 모든 것들이 어찌 하찮단 말인가.
하지만······.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천상을 뿌리친 채, 영원히 인세를 걷는 괴물이 보였다.
어쩌면 운호가 경험하는 그 모든 고통의 근원이다. 아니, 운호만이 아니다. 대체 얼마나 많은 이들이 저자에게 삶을 파괴당했던가.
운호의 검이 내뿜는 향기가 한층 더 그윽해졌다.
그것은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 천상의 향기였다. 하지만 운호는 그것이 어쩐지 꽃향기를 닮았다 생각했다. 이 꽃 한 송이 피지 않는 돌산과는 어울리지 않는 향기.
하지만 그게 어떻단 말인가. 꽃나무 하나 없는 이 돌산의 이름 역시 화산(華山)인 것을.
“우리 할아버지야 그래도 살만큼 살고 하늘이랑 바람났다지만, 요즘 백공자 하는 거 보면 당장 내일이라도 할아버지 따라갈 것 같아. 얼굴은 쾡한게 눈만 번쩍번쩍 거리고. 물론 저 하늘로 가는 것도 좋지만, 이 땅에도 좋은 게 참 많잖아?”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익숙했다. 하지만 확실치는 않았다.
환상일까?
아니, 운호는 지금 자신이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지 않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어쩌면 이건 현실일지도 모르겠다. 과거에 일어난 일인지, 어쩌면 미래에 일어날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 이대로 저 하늘이 운호를 데려가지 않기를. 부디 운호가 하늘과 바람나지 않기를.’
이번에는 누구의 목소리인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어찌 모를까? 그의 인생에서 가장 긴 시간을 함께 한 여성이거늘.
“아현아.”
떠나고 싶지 않았다.
저 하늘에서 손짓하는 모든 이들에게 미안하지만 아직은 조금 더 이 지상을 거닐고 싶었다. 하지만 불가항력이다.
지금 저 괴물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이것이 유일했으니까.
운호가 결심했다.
-아아아아아
이해할 수 없는 천상의 노랫소리가 울려 퍼졌다.
운호의 몸이 지상의 개념으로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가벼워졌다. 발아래로 하늘에 닿은 용화수를 내려다봤다.
운호가 검을 들었다.
그것은 하늘과 땅과 인간을 가르는 검이었다.
“젠장, 이 멍청한 놈 같으니. 아현이가 말하지 않았더냐. 하늘과 바람 필 생각하지 말라고.”
“허허, 어릴 때는 안 그랬던 것 같은데. 너무 쉽게 포기하는 버릇이 생겨 버렸구나. 네가 그러지 않았더냐. 거인의 어깨에 서기보다는 거인이 되겠노라고. 빈도가 보기에 지금 너는 그저 높은 곳에 발을 디딘 것만으로 만족하는 것 같구나.”
누군지 모를 이의 희미한 외침.
그리고 너무나도 선명한 한 노인의 목소리.
“검선 어르신?”
“하긴, 아이는 어른을 보고 배우는 법이지. 어른이 먼저 포기를 했으니 어찌 아이를 탓하겠느냐. 아이야. 잠시 손만 좀 빌려주거라. 내 저 멍청한 늙은이에게 직접 말 해야겠구나. 내 선경에서 좋은 신선주 빗어놓고 기다리고 있으니 그리 주저앉아서 넋두리하지 말고 얼른 올라오라고 말이다.”
“네?”
시간은 여전히 흐르지 않았다.
현실 역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대제사장의 일렁이는 윤곽은 그대로였고 운호의 몸에 난 상처들 역시 그대로였다.
달라진 것은 오직 하나.
오른팔이 부서진 권신이 왼주먹을 움켜쥐었다는 점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