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화
무의 이름(2)
-쾅!!!
뒤로 몇 걸음 물러난 운호가 얼얼한 자신의 손을 몇 차례 쥐락펴락했다.
“정신은 좀 드셨습니까?”
천연덕스러운 운호의 인사에 청무진인이 옷과 피부가 찢어져 핏물이 흐르는 자신의 오른팔을 내려다봤다.
“잠을 깨우는 방법치고는 조금 과격했구나.”
“죄송합니다.”
“아니다, 뭐 어쩔 수 없었겠지. 꿈이 제법 달콤하기는 했거든.”
“그래서 깨어나기 싫으셨습니까?”
“그럴 리가. 꿈이 좋다고 하루 종일 잠만 잘 수는 없는 법이지. 게다가 재밌기로는 여기도 만만치 않게 재밌을 것 같구나. 그리고······.”
청무가 잠시 생각을 가다듬었다.
“일전에 네가 활불의 그것이 환생이 아니라고 했었지? 그저 기억을 덮어 씌우는 것이라고.”
“네.”
“어쩌면 방금 전 내가 경험했던 그것. 네가 말했던 활불의 그 환생이라는 것과 비슷한 형태인지도 모르겠다.”
청무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운호가 말했던 활불의 환생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갓 태어난 아이에게 수백 년의 기억을 덮어씌운다면 그것은 그 아이인가, 아니면 수백 년의 기억을 이어가는 환생자인가.
물론 그것은 어디까지나 아직 자아가 성립되지 않은 아이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하물며 이것은 기억도 아니다. 그저 저 백운진인, 아니 저 대제사장의 감정과 기억일 뿐이다.
“하지만!!”
“그래, 물론 고작 저걸로 끝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뭔가 더 있겠지.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점은······.”
백운진인.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한 사조의 얼굴이 보였다. 청무진인 자신은 이렇게 늙었거늘 어릴 적 봤던 얼굴과 너무 똑같았다. 그 얼굴이 조금 전 운호에 이어 청무진인이 그의 술수에서 벗어난 것에 뭔가 탈이 났는지 잔뜩 일그러졌다.
그럼에도 섣불리 덤벼들기 어려운 막대한 기운이 느껴진다. 그리고 그 막대한 기운 가운데 한 가닥. 자하기공의 진한 흔적이 엿보였다.
단순히 몸을 차지했다고 그 사람의 무공을 그대로 가질 수 있을까? 천만에, 무공의 운용은, 특히 상승무공의 운용은 매우 고난도의 섬세한 작업이다. 단순히 그만한 진기를 가지고 있다고 그것을 그대로 운용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실제로 사고로 기억을 잃어버린 고수가 무공을 함께 잃어버렸다든지, 치매에 걸린 고수가 주화입마에 걸리는 이야기는 전혀 없는 이야기가 아니다.
“아무래도 저 육체는 내 사부님의 그것이 맞는 것 같구나. 그리고 어쩌면 대제사장은······. 사부님의 기억도 함께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네? 그게 무슨?”
운호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청무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다. 내상이 있는 듯한데, 일단 숨이나 좀 고르고 있거라.”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얼마든지 싸울 수 있습니다.”
“굳이 그렇게 무리할 필요는 없다”
“네? 하지만?”
청무 진인이 한 걸음을 걸어 나갔다.
“허허, 이거 아무래도 내가 조금 얕보인 모양이로구나. 운호야 너는 대체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냐.”
“아니, 그것이 아니오라······.”
청무 진인의 마음이 세상을 바라봤다.
억눌린 화산의 정기와, 검붉은 빛깔의 진득한 마기. 그리고 하늘과 땅을 잇는 거대한 나무가 보였다. 그야말로 인세를 초월한 신화적인 광경이었다.
그 압도적인 광경 앞에서 그는 나지막하게 감탄했다.
“실로 훌륭한 광경이로다. 과연 듣던 대로다. 어쩌면 무한이었다면······.”
좀 어려웠을지도 모르겠다는 말을 뒤로 삼켰다. 의식한 것이 아니다. 그저 그런 패배주의적인 마음보다 저 강대한 힘과 맞부딪힐 미래가 늙은 도사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었을 뿐이다.
무신은, 파검은, 걸왕은, 그리고 그의 사제들은.
무한에서 이토록 놀라운 상대와 합을 겨뤘다는 것인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권신 청무진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언제나 그렇듯 주먹을 불끈 쥐었다.
고작 그 동작 한 번에 막대한 기운이 용오름 친다.
“하지만 운호야 잘 보거라. 이 늙은 도사의 이름은 청무. 감히 자신하건대 화산 무학의 정점이다. 화산의 무학은 천하제일. 그렇기에 화산 무학의 정점은 천하최강이니. 내가 오늘 그것을 증명해주마.”
청무 진인이 한 걸음을 내디뎠다.
다섯 천마의 기운이 붙잡고 있던 천기가 요동을 쳤고, 스물다섯 지마가 억누르던 지맥이 꿈틀댔다.
구척에 달하는 거대한 거구가 쏜살처럼 날아들었다. 그리고 물흐르듯 자연스럽게 통나무처럼 두꺼운 다리가 대제사장의 머리를 후려쳤다.
-쿠구구구구구궁!!!
청무 진인의 발과 대제사장의 머리까지 거리는 불과 머리카락 한 올. 하지만 닿지 않았다. 청무 진인의 발이 멈춰선 것이 아니었다. 그저 그 머리카락 한 올의 거리가 무한에 가깝게 확장됐을 뿐이다.
종종 민간의 설화 등을 보면 신선들이 축지(縮地)의 도술을 부리곤 한다. 지금 마교의 대제사장이 보여준 것은 정확히 그 반대였다.
“사특한 술수!!”
“장간(長間)의 고절한 수법을 고작 사술 취급이라니. 장오 너도 참으로 보는 눈이 없구나.”
“감히!!! 고작해야 마교의 주구 주제에 사조님을 흉내 내지 마라!!”
방문의 좌도다.
과거 청무진인은 검종을 좌도라 이야기 한 적이 있었다. 당시 그가 운호의 말에 설득된 것은 검종 역시 무공이기 때문이었다. 평생동안 무공에 모든 것을 받쳐온 노인에게는 방문과 무문의 경계가 결국 무공일 수밖에 없다. 그래, 이 완고한 늙은 무인에게 좌도란 무(武)가 아닌 모든 것이다.
그의 두 주먹에 화산이 담겼다. 고작 피륙으로 만들어진 인간의 두 주먹에 그 거대한 산악의 무게가 담겼다는 뜻이다.
-콰과과과과과과과광!!!!
두 다리로 대지를 단단히 밟고 서서 양 주먹을 허리춤에 가져간다. 타점은 명치 높이. 내지르고 잡아 당기고 다시 내지른다.
사실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절대 보여줄 수 없는 자세였다. 방어를 도외시 한. 말 그대로 허점 투성이의 자세다. 하지만 상대가 대놓고 뚫어볼 수 있으면 뚫어보라 시위를 하는 판국이다.
가장 많이 내질렀던 주먹질 그대로.
일격 일격이 운호가 펼치는 극한의 광음검과 흡사했다. 시간을 가장 미세한 단위로 나눈 것보다 더 짧은 시간에 주먹이 오고 갔으니, 나눌 수 있는 가장 미세한 단위의 시간으로 봤을 때 그 주먹은 동시에 수십 개가 존재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그저 어린 사손의 재롱을 보는 것처럼 인자하게 그것을 바라봤다.
개념이 다르다. 애당초 여기에는 물리적인 힘으로는 넘을 수 없는 한계라는 것이 존재한다. 그것은 지상의 법칙에 얽매인 인간과 그것을 초월한 신인의 차이다.
하지만 수십 번의 주먹질이 지나가고, 그것이 수십 번이 아닌 수백 번의 중첩이 됐을 때, 대제사장의 입가에 맺혀있던 미소가 딱딱하게 굳어지기 시작했다.
장간(長間)의 술법이라고 했던가? 그것은 분명 전설상에 신선들이나 보일 법한 조화였다. 하지만 그게 어떻단 말이던가. 이것은 무려 구십 년 평생 주먹을 휘둘러온 무인의 두 주먹이다.
잡아당긴 주먹이 동시에 뻗어나온다. 한치의 오차도 없는 그 자리 그대로. 시간과 시간의 경계지점에 그렇게 화산의 무게가 담긴 권신의 주먹이 쌓여간다.
그리하여 아득하게 멀어진 공간.
한계를 넘어선 질량이.
그것을 무너트린다.
거기까지 걸린 시간은 촌각.
대제사장의 얼굴에 웃음이 사라졌다. 마치 어린 아이가 계란으로 바위를 깨려는 모습을 비웃으며 지켜보던 이가 사실 아이가 던지던 것이 계란이 아닌 계란의 형상을 한 쇠구슬임을 뒤늦게 깨달은 것 같은 얼굴로 황급히 양손을 들어 올리려는 찰나
-뻐어억!!!
청무진인의 오른손이 그보다 한 박자 빨랐다.
정확히 명치. 마치 공간을 꿰뚫는 것처럼 화산의 무게가 담긴 일권이 대제사장의 명치를 꿰뚫었다.
대제사장의 등 뒤에 세워져 있던 거대한 사인교가 박살이 났다. 마치 강물 위를 튕기는 물수제비처럼 –퉁퉁퉁 크게 튕겨 나갔다.
지마급 마인들의 코에서 핏물이 흘러내렸다.
화산의 기운은 여전히 평소와 같지 않았다.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끌어오던 화산의 정기가 크게 억눌린 상태 그대로다. 하지만 그게 뭐 어떻단 말인가.
“이것 봐라?”
청무진인이 그들을 바라보며 흉폭하게 웃었다.
마치 장전된 화살처럼 그 오른쪽 다리가 벼락처럼 튀어나갔다. 노리는 곳은 마인의 머리통. 크게 튕겨 나갔던 대제사장이 눈을 빛냈다.
-쾅!!!
어느새 날아온 대제사장의 발길질이 청무진인을 밀어냈다.
“잘 컸구나.”
호흡을 고르던 운호가 크게 놀랐다.
청무진인의 그것은 너무 빨랐을지언정 그래도 빠름의 범주에 속했다. 하지만 지금 대제사장의 그것은 달랐다.
무한 혈사 당시.
오직 파검만이 감당 가능했던 그 이적. 마치 시간의 틈새를 홀로 걷는 것 같았던 그 움직임이 또 다시 펼쳐졌다.
하지만 운호가 놀란 지점은 대제사장의 움직임이 아니었다.
밀려난 청무진인의 오른팔 상박에 발자국 자국이 선명했다.
막아낸 것이다.
그것도 별다른 피해 없이.
청무진인이 자신의 오른팔을 붕붕 돌렸다.
“이제야 좀 제대로 해볼 마음이 생긴 모양이구나.”
“사조에게 무례하기는.”
“어디 족보에도 없는 이상한 방식으로 화산의 기운을 훔쳐다 쓰는 도둑놈 주제에 사조는 무슨.”
“족보에도 없는 이상한 방식은 장오 네 쪽이겠지. 너무 오래 풀어놓아서인가? 아주 묘한 방식으로 자하기공을 틀었구나. 이건 돌연변이라고 해야겠지? 분명 자하기공의 완성은 내가 이미 보여주고 떠났을 터인데.”
“완성? 이 가짜 놈아. 그게 무슨 개 풀 뜯어 먹는 소리냐. 백운 사조님 스스로도 아직 한참 멀었다고 이야기하셨거늘.”
“오호라, 내가 그리 말했었단 말이지. 이것 참······.”
그가 뭐라 떠들건 말건 그사이 준비를 끝낸 청무진인이 크게 호흡했다.
그 호흡은 며칠 전. 운대봉에서 그가 사용했던 그것과 같았다. 직경 삼백 리. 화산의 정기가 한사람에게 쏟아진다.
-우우우우웅
마기로 억눌린 대기가 요동을 친다.
지급의 마인들이 코피를 넘어 토혈을 시작했고, 천 급의 마인들 역시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청허, 현무, 벽운, 조왕까지.
박제된 것처럼 멈춰있던 네 명의 초절정 고수들이 몸을 꿈틀거렸다.
이것이야말로 자하기공의 구단공이다. 그것도 십단공의 완성을 눈앞에 둔.
청무진인이 지상에 거하는 신선과 같은 자태로 대제사장을 향해 달려들었다.
한계를 넘어선 질량이 공간을 붕괴시킨다. 그렇게 붕괴된 공간이 시간을 잡아끌었고 그 자리에서 멀쩡한 것은 오직 청무진인 본인뿐이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 기껍다.”
그 앞에 선 대제사장의 마음이 움직였다.
그리고 하늘에 닿은 용화수가 꿈틑 댔다. 마치 거대한 도끼에 상한 것 같은 상처가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대제사장의 몸이 희미하게 녹아내렸다.
빛의 소용돌이가 그의 몸을 타고 퍼져나갔다. 그 빛의 소용돌이를 타고 그윽한 향기가 흘러나왔다.
운호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히 알고 있었다.
당연했다. 어찌 잊을 수 있을까? 그 날의 충격적인 장면을.
“우화등선?”
하지만 대체 어째서!! 지금 여기서 저 마교의 악적이 어찌 저런 모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