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화
무의 이름(1)
“사조님?”
“맞아, 사조님이야.”
“대······, 대체 어떻게······.”
화산 제자들의 웅성거림이 커졌다.
“속지 말아라!! 사술이다.”
화산 장문인 굉허자가 제자들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사술? 사술이라. 참으로 재밌는 이야기로구나.”
대제사장의 시선이 청무와 청허에게 향했다. 어디 너희들이 한 번 이야기 해보라는 눈짓이었다. 그 눈짓에 청허와 청무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침묵했다.
저 목소리, 저 생김새.
어찌 잊을 수 있을까. 마치 아직 어렸던 운호가 하늘을 평지처럼 걸어왔던 청무진인과의 첫만남을 잊을 수 없는 것처럼, 아무리 긴 시간이 흘렀다고 해도 그들 역시 백운을 잊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백운 진인에게서 느껴지는 저 기도.
인간을 초월한 그들의 감각이 알려주고 있었다. 절대 사술 따위가 아니다. 그럴 수 없다.
그리고 그 침묵이 화산의 제자들을 동요시켰다.
“헛소리!!”
운호였다.
“마교의 대제사장은 타인의 몸을 훔쳐 기생합니다. 지금 저자는 조사님의 몸을 훔쳐간 도둑놈일 뿐 절대 백운 태사조님이 아닙니다.”
“허허, 아이야. 그건 또 무슨 소리더냐. 기생이라니.”
환신(換身).
이에 관하여 알고 있는 이들은 아직 많지 않았다. 하지만 바꿔 말하자면 그 사실을 알만한 이들은 모두 알고 있다는 뜻이다. 화산의 고위직. 무엇보다 청무와 청허 역시 그것을 알고 있었다.
다만 그들이 감히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한 것은 갑자기 등장한 대제사장이 백운진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당황 때문이었으며 또한, 그것을 입밖에 낸다는 것은 적어도 화산파 내에서는 우화등선을 했다고 주장하고 있는 백운진인이 마교의 대제사장에게 몸을 뺏겼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허허허.”
마교의 대제사장이, 화산의 위대한 조사인 백운진인이 너털웃음을 내뱉었다. 그 웃음을 따라 맑고 청아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주변을 둘러싼 극악한 마인들에게서 풍겨 나는 찐득한 마기의 한가운데서 홀로 그것조차 초월해버린 그 모습은 실로 비현실적이었다.
그가 말했다.
사인교 안에 있을 때와 같이.
작지만 또렷하게. 이곳 화산파에 존재하는 모두의 머릿속에 그 음성을 꽂아 넣는 것처럼.
-지금으로부터 약 팔십 년 전 빈도는 우화등선을 앞두고 있었다. 찬란한 별의 바다가 열렸고 빈도에게 남은 것은 그저 그곳으로 뛰어드는 것뿐이었다.-
이것은 대체 무엇일까?
단순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저 귓가에 속삭이는 전음도 아니었다.
인간의 언어는 실로 미약하다.
어찌나 미약한지 그 언어 자체로는 말하고자 하는 것의 1할도 채 전달할 수 없다. 문자는 대화보다 약하고, 대화 역시 떨어진 곳에서 그저 음성만을 전달하는 것과 얼굴을 보고, 그 풍부한 동작과 표정 속에서 진행되는 것은 전달력 자체가 다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지금 이 목소리가 전하는 것은 언어가 아니었다.
언어를 넘어선 무언가······.
그래, 굳이 표현하자면 마음이다.
모두가 완전히 똑같은 것을 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마교 대제사장의 목소리는 각자의 눈앞에 마치 그날의 일이 이랬다는 것처럼 생생한 광경을 재생시켰다.
운호의 눈앞으로 익숙한 별의 바다가 펼쳐졌다.
‘응?’
익숙하다고?
어째서?
하지만 의문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그의 눈앞을 스치는 장면이 변했다.
굶주린 사람들. 고통으로 울부짖는 인간들. 빈자들이 주린 배를 움켜쥐고 서로의 자식을 바꿔 잡아먹는 끔찍한 광경과 부자들이 쌓아둔 쌀들이 창고에서 썩어가는 광경이 지나갔다. 원말명초의 끔찍했던 재앙들과 사람들을 휩쓰는 전란의 화마.
고민과 갈등.
평생을 꿈꿔왔던 순간을 앞에 두고 느꼈던 백운진인의 그 마음이 생생하게 전해왔다.
그리고 한순간 머리가 맑아졌다.
-그 순간 마침내 빈도는 깨우쳤다. 이 세상은 잘못됐다는 것을. 모든 깨달은 자들은 저 별의 바다로 떠나고, 또 떠나고, 또 떠났으니. 남은 것은 결국 깨달음에서 멀어진 이들뿐이라는 것을.-
세상은 어찌하여 고통으로 넘쳐나는가.
답은 간단했다.
-이 세상이 그릇됐기 때문에.-
여과되지 않은 압도적인 정보의 홍수가 밀려 온다.
경지에 상관없이, 아니 경지가 높기에 더욱 더 거대하게. 높게 선 이는 멀리 볼 수 있고, 많이 아는 이는 더 많이 이해하는 법이었으니까.
-운호야!!-
아스라이 파검의 목소리가 운호의 마음을 때렸다.
운호가 이를 악물었다.
“개소리!! 그리하여 선택한 것이 마인이라는 말이던가? 그것은 그저 궤변일 뿐이다!!”
-궤변이 아니다!! 마인이 무엇인가. 가장 인간다운 것이다. 그것은 잘못된 관념과 그릇된 지식이 아닌 인간이 타고나는 순수한 본능의 발현이다. 사람은 본디 그렇게 태어났다.
“인간다움이 아니다!! 본디 그렇게 태어난 대로 살아가는 것이 어찌 인간다움이란 말인가!!”
-어린 도사야. 너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을 아느냐. 태상노군이 말씀하셨다. ‘함이 없이 마땅히 그러하다.’ 인간 역시 그러하여야 한다.-
도와 법은 마땅히 자연을 닮아야 하니(道法自然), 여기서 자연이란 무엇인가? 자연이랑 곧 무위다(無爲自然). 함이 없이 마땅히 그러한 것이 곧 자연이니. 도와 법은 함이 없이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
운호는 대제사장의 그 말에 답하지 못했다. 물론 대제사장의 그 말이 틀렸음은 잘 알고 있었다. 떠오르는 상념 역시 많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말할 수 없었다. 그 답답함이 운호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그 얼굴은 마치 그 날, 대제사장이 쓰고 있던 그 고통의 가면을 닮아 있었다.
대제사장이 건네주는 마음이 점점 더 커졌다.
고통과 고통과 고통.
석가모니불이 보리수 나무 아래서 깨달음을 얻은 지 벌써 이천년이 흘렀건만 어찌하여 사바세계는 이토록 고통만이 가득하단 말인가.
용화수 아래서 만인을 구원할 미륵불은 대체 언제 도래한다는 것인가.
아난다여 아난다여. 그대는 어찌하여 석가모니불이 겁(劫)의 시간 동안 사바세계에 머물기를 청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그렇기에, 그러하기에 이 세상이 지옥이라면, 내가 기꺼이 미륵이 되겠노라. 용화수 아래에서 억조창생을 구원하겠노라.
별의 바다가 꺼져간다.
신공의 힘에도 불구하고 사멸해가던 육신이 돌아온다.
지상을 걷는 신선. 석가모니불 이후 최초로 지상을 걷는 초월자.
내가 바로······.
“아니, 틀렸다. 말로 도를 논함은 진정한 도가 아니고, 말로 붙여 놓은 이름은 진정한 이름이 아니다(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
대제사장이 보여줬던 별의 바다.
그 가운데 어딘가에 머물던 별빛이 파검에게 내려앉았다.
“쯧, 하여간. 참으로 골치 아픈 놈들이로다.”
가만히 서있던 대제사장이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리고 그 순간 운호의 두 눈이 그것을 똑똑히 목격했다.
그곳에는 하늘과 땅을 잇는 거대한 용화수가 우뚝 서있었다. 마치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처럼 깊숙한 상처 위로 진득하고 불길한 검붉은 빛의 번뜩인다.
다섯 명의 천마와 스물다섯 명의 지마가 내뿜는 마기가 화산의 정기를 억눌렀다.
아니, 단순히 그것만이 아니다.
무슨 이유일까? 화산의 무인들 반절 가량이 그 거대한 용화수와 공명하고 있었다. 화산의 맑은 정기가 그들의 몸을 통해 여과되어 대제사장의 몸으로 조금씩 빨려 들어갔다.
-조시······ㅁ!!
파검이 소리쳤다.
-쾅!!!
하지만 늦었다.
파검이 운호에게 경고를 한 이후에 출발한 그 일격이, 파검의 소리가 운호에게 닿기 전 운호의 가슴팍에 도착했다.
인과의 역전?
시간의 왜곡?
세상의 섭리를 아득히 벗어난 일격이었다.
마교 대제사장의 몸은 여전히 그 사인교에 머물러 있었다.
“제법이로구나.”
시간과 시간의 틈새.
원인과 과정이 혼재된 그 사이에서 발출된 모든 것을 붕괴시키는 그 하얀 손을 어린 신검이 막아냈다.
“쿨럭······.”
운호의 입에서 붉은 핏방울이 후두둑 떨어졌다.
“영감님, 이런 괴물을 상대로 싸웠던 겁니까?”
-그래, 이제야 나를 좀 존경할 생각이 드는 게냐?
“이제라뇨. 존경이야 아주 예전부터 하고 있었습니다.”
방금 대제사장의 공격은 광음의 일검과 흡사했다.
달랐던 점은 완성도.
광음검이 마치 이곳과 저곳에 모두 존재하는 ‘것’과 같은 쾌속의 일검이라면, 저 일수는 정말로 이곳과 저곳에 동시에 실재하는 이치를 벗어난 일격이다.
하지만 대체 어떻게?
인간이 인간을 초월하여 자연의 섭리를 벗어났다면, 그가 향할 곳은 저 먼 천상이다. 그렇기에 지상을 밟고 선 인간은 지상의 섭리를 따라야 한다. 그것은 초절정의 고수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헌데······. 내가 상대했던 것보다 어째서인지 더 까다롭구나.
“두들겨 패서 당분간 꼼짝도 못하게 만들어두셨던 것 아닙니까?”
-글쎄다. 통 기억에 없는 일인지라. 그래도 약점이 영 없어 보이지는 않는 구나.
그것은 파검이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알 수 있었다.
저 파멸적인 위압감 덕분에 인지하기 쉽진 않았으나, 지금까지 마교의 대제사장이 보여준 동작은 오직 저 오른손을 드는 동작뿐이었다.
하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하지 못하는 것일까?
“영감님!!”
-우우웅
운호가 손에 쥐고 있던 파검이 크게 울부짖었다.
어마어마한 기운의 소용돌이가 파검을 중심으로 요동쳤다. 주변의 대기가 몰려든다. 혼탁하기 짝이 없는 마기 사이로 억눌려있던 화산의 정기가 꿈틀댔다.
검에 내려앉은 별빛이 진해졌다.
하지만 고작이다.
지금 마교의 대제사장이 다루는 힘의 총량은 인간의 범주에 넣을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대제사장이 미소지었다.
그것은 고작 그런 미약한 별빛이 지상과 천상을 연결하는 이 거대한 용화수를 뚫고 나에게 닿을 수 있겠느냐는 자신감으로 가득한 미소였다.
그리고 그 미소 앞에 운호가 선택을 했다.
한 걸음.
그리고 두 걸음.
운호가 검을 크게 휘둘렀다.
대제사장이 예측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그리고 그가 상상하지 못했던 목적지로.
-쾅!!!!
***
그는 스스로를 도사라고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도를 궁구하지 않았다. 그저 정해진 길을 따라 꾸준히 걷고 또 걸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곳에 발을 디뎠다.
몇몇 사람들은 그것을 일컬어 ‘도’를 얻었다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그는 한 번도 자신이 ‘도’를 얻었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그가 한 것은 그저 무공수련이었을 뿐이었으니까.
한계에 다다랐다.
그것도 진즉에.
사부님이 생전에 보여줬던 경지는 진즉에 넘어섰다.
하지만 다음이 보이지 않았다.
‘도’를 모르기 때문일까?
하지만 여전히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부단한 수련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눈앞에 사부가 경험했다는 별의 바다가 펼쳐졌다.
참으로 재밌는 경험이었다. 솔직히 말해 혹하기도 했다.
자신과 다르게 사부는 저런 것을 보았구나.
저것이 바로 궁극의 길인가?
-말로 도를 논함은 진정한 도가 아니고, 말로 붙여 놓은 이름은 진정한 이름이 아니다(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
하지만 그 순간, 그의 귀를 때리는 목소리가 있었다.
듣고보니 그 말도 뭔가 그럴싸했다.
허나 여전히 사부가 보여주는 깨달음은 너무 달콤했다. 오랜 시간 방황했음에도 찾지 못했던 길이 어쩌면 저것이 아닐까?
그는 도사가 아니었다.
진리의 탐구자도 아니었다.
그는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무공을 꾸준히 익힌 무인이었다.
그런 그에게 날카로운 무언가가 다가왔다.
그것은 그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무언가였다.
팔십 년.
그래, 무려 팔십 년이었다.
그것은 매일같이 반복한 동작이었다.
그렇기에 육체가 기억하는 그대로.
주먹을 쥐었고 불뚝 선 전완이 그것을 받아냈다.
그리고 반대쪽 팔을 정직하게 내뻗었다.
생각의 속도보다 빠르게.
-쾅!!!
권신 청무 진인.
운호의 일 검이 미혹에 빠져있던 무인을 일깨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