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화
다시 화산으로(15)
화산의 정기가 흐트러지고 있었다.
땅을 타고 오르는 강맹한 기운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맑은 정기가. 그리고 그 기운들을 받아 약동하는 모든 생명의 기운들까지도.
천지간에 기운을 이토록 억압할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천마(天魔)뿐이다. 그렇기에 이 현상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화산에 천마가 출현했다.
하지만 대체 어떻게!!
물론 마교의 간악한 종자들이 사람들의 눈을 속이고 중원을 활보하는 기술을 얻었다는 사실 정도는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당시와는 상황 자체가 다르다. 기본적으로 광서 대장군부의 감시망이 몇 배는 철저해졌고, 구파와 칠대세가, 그리고 개방을 중심으로 한 무림맹이 거기에 힘을 보태고 있다. 무엇보다 이곳은 화산이다. 그리고 청무진인은 화산의 수호신이나 다름없다. 적어도 화산 인근 삼백리. 청무진인 자신의 눈을 피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확신했었다.
“설마······.”
도저히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이 일어났다.
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확신할 수 있었다. 지금 이 일에는 상식을 벗어나는 존재가 함께하고 있다고.
-으드득
“대제사장······.”
우화등선하던 파검이 이십 년을 이야기했다고 했던가? 신선은 모든 수행자들이 목표로 하는 경지다. 그렇기에 맹신했다. 인간이 인간을 초월한 초월자의 말을 의심해서 얻을 것이 뭐가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렇기에 잊고 있었다. 상대는 그 초월자조차도 어떻게 하지 못했던 불가해의 괴물이라는 것을.
“청허야!!!”
“사형, 갑자기 왜 그렇게 뛰어 오시는 겁니까?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겁니까?”
“마교다!!”
“네? 마교라니? 그게 무슨······.”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었’다.
하지만 청무진인이 ‘마교’라는 말을 내뱉는 그 순간, 청허의 기감에 천지를 뒤흔드는 막대한 마기의 흐름이 명확하게 다가왔다.
“맙소사!! 이게 무슨!!”
청허 역시 평생을 화산에 기대 살아온 무인으로 초절정의 경지에 이른 무인이다. 하지만 그런 그조차도 화산에 일어난 변고를 제대로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사형!! 화산이 비명을 지르고 있습니다. 천마!! 그것도 한둘이 아닙니다. 당장 내려가서 아이들에게 경고를 해야합니다. 마교의 버러지 같은 놈들이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어서 내려 가자꾸나.”
“헌데 사형, 이게 대체······. 아무리 천마라고 해도 어찌 전 중원의 눈을 속이고······.”
“대제사장이다.”
“네? 하지만!!”
청무진인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한가하게 이야기를 나눌 때가 아니다. 다행히 아직 거리가 조금 있긴 하다만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그럼 운대봉에서 엉덩이 부비고 있는 놈들은 제가 끌고 내려가도록 하겠습니다. 사형께서는 곧바로 본산에 내려가시지요.”
“그래.”
***
삼십 남짓한 인원.
하나하나의 무공이 어찌나 고절한지 그 많은 인원이 지나간 길에 발자국 하나 남지 않았다. 심지어 그 가운데는 네 명의 사람이 매고 있는 커다란 사인교가 하나 있었는데도 말이다.
그 커다란 사인교 안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과연, 개도 자기 집에선 더 크게 짓는다고 하더니. 권신. 제법이로구나. 아비치, 이미 발각됐다. 이제 눈치 보지 말고 속도를 높이도록 해라.”
“네!!”
무리의 선두. 아비치라 불린 인물이 자신의 기운을 폭발시켰다.
천마라고 했다. 그 끓어오르는 마기가 하늘과 땅의 기운마저 굴복시킬 만큼 압도적인 경지에 이른 마인을 이르는 말이다.
그리고 그 기준에 따르자면 아비치라는 인물은 분명 천마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힘을 지녔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거대한 사인교를 매고 있는 네 명의 괴인들. 그들 역시 아비치라 불린 인물의 뒤를 따라 자신들의 기운을 폭발시켰다.
놀랍게도 그 기운 하나하나가 앞서 아비치라는 인물의 그것에 뒤지지 않는다.
서른 남짓한 인원 가운데 천마의 경지에 이른 마인만 무려 다섯. 그렇다고 나머지 마인들 역시 만만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폭발시킨 묵직한 마기가 화산의 정기를 내리누른다. 일반적인 기준에 따르자면 그들 하나하나가 지급에 다다른 마인들이다.
그들의 기운을 가려주는.
하지만 동시에 그들의 기운을 억제하던 기선단의
마치 화산이 알아서 스스로 굴복하는 것 같았다.
그들이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주변 경관이 쭉쭉 밀려난다. 삼백장의 거리. 그리고 돌덩이로 가득한 화산의 험악한 지형. 하지만 폭발적인 마기를 내뿜는 그들 앞에 그 거리는 너무나도 짧았다.
그리고 같은 시각.
마인들이 마기를 내뿜는 그 순간, 현무와 벽운. 그리고 운호의 시선이 동시에 같은 곳으로 향했다.
“이게 무슨?”
“무슨 일이더냐. 아니, 잠깐만. 이건?”
그리고 한 박자 늦게 조왕 주고수가 그것을 감지했다.
“서평왕부에서도 이번 행사에 참여하기로 한 것이더냐? 확실히, 듣기로는 운호 네가 서평왕과 인연이 있다고 듣긴 했다만. 그들은 지금 분명 청해성을 수습하는데 정신이 없을 터인데······. 게다가 굳이 이렇게 과하게 올 필요가······.”
“서평왕부가 아니라 마교입니다.”
“마교?”
순간 주고수가 눈을 크게 떴다.
터무니 없는 마기를 느꼈음에도 감히 중원의 한복판에 마교가 나타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탓이다.
“어떻게? 분명 광서에서 철저하게 막고 있을 터인데? 게다가 지난번 일 이후로 황실에서도 충분한 지원을 보냈을 터. 대체 어떻게?”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말씀하신 것처럼 서평왕부라면 굳이 이렇게 말 없이 찾아올 이유가 없지요. 게다가 이만한 기운이라면 서평왕 전하께서 직접 오셨다고 해도 믿을만한 크기입니다. 마교입니다.”
현무가 가장 먼저 몸을 날렸다.
“벽운, 종남의 무인들을 수습해서 자소전으로 와 주게. 나는 바로 장문인께 말씀을 드려야겠네. 운호야!!”
“저는 홍매당의 인원들을 자소전 쪽으로 대피시키겠습니다.”
“그래!!”
화산이 대체 언제 외세의 위협을 경험한 적이 있었던가.
송태조 조광윤에게 면세의 특권을 얻어낸 진단노조(陳摶老祖) 진희이 선생이 화산파 스물세개 도관을 통합하여 현재의 화산파를 만든 이후, 단 한 번도 없던 일이었다.
그렇기에 그 소식은 조만간 있을 은퇴식을 준비하던 화산의 장로들에게는 그야말로 아닌 밤중에 날벼락과도 같았다.
-으드득.
“감히 화산을!!”
지금 이 자리에 모여있는 초절정 고수의 숫자만 하더라도 무려 여섯. 게다가 화산은 절정 고수의 숫자로 따졌을 때 강호 최대를 자랑한다. 어지간한 구대문파 두 개를 합친 것보다 많을 지경이다.
“하지만 조심해야합니다. 마교의 대제사장은 이상한 능력을 사용합니다.”
“알고 있다.”
절정 이하의 모든 고수들을 모두 봉쇄하는 터무니 없는 마음의 그물.
그것이야말로 무한 혈사 당시, 고작 여덟의 인원으로 천 명에 다다르는 정파의 고수들을 농락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다.
“하지만 그러한 이능을 사용하는 것에는 명백한 대가가 따를 터. 실제로 그 자가 위기에 몰렸을 때, 그 이능이 풀렸다는 증언들이 많다.”
“그 자리에는 천무십칠성 가운데 무려 여섯이. 그리고 청우 사숙님과 청공 사숙님이 계셨었죠.”
“지금 본문에 모인 초절정 고수의 숫자도 여섯이다. 게다가 이곳은 화산이야.”
“계란은 본디 한 바구니에 담지 않는 법입니다. 게다가 이제 막 삼대 제자로 들어온 아이들은 싸움에 별 도움도 되지 않을 터. 차라리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키는 것이 현명할 겁니다.”
“그래서, 그 아이들 통솔은 누가 하고?”
“그거야 장로들 가운데 누군가가······.”
“어허!! 모두가 똘똘 뭉쳐서 적들을 상대해도 모자랄 판국에 아이들을 데리고 피난을 가겠다고?”
“아니, 제가 가겠다는 것이 아니라!!”
장로들의 갑론을박이 길어졌다. 그리고 그 길어지는 갑론을박이 생산적이기보다는 비난에 가까워지려는 순간.
-쾅!!
화산 장문인 굉허진인 경원탁이 손바닥으로 탁자를 두들겨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모았다.
“피난은 없습니다.”
“장문인, 하지만!!”
“물론 이제 막 제대로 된 무공에 입문한 삼대 제자 아이들이 별반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은 옳습니다. 안전한 곳? 뭐 좋은 이야기지요. 하지만 대체 그 안전한 곳이 어디란 말입니까. 천하에 화산의 무인들에게 화산보다 안전한 곳이 어딨냐 이 말입니다.”
이 자리에 모인 장로들 가운데 늙고 병들어 무공을 잃어가는 장문인보다 약한 이는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아무도 감히 장문인의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단순히 그의 뒤에 청무와 청허의 위광이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일시간의 두려움, 혹은 진정으로 후대를 생각하는 마음이 피난을 이야기 했을지언정 그들 역시 화산에서 나지는 않았을지 몰라도 평생을 화산에서 자란 화산의 무인이었다.
“장문인의 말씀이 옳습니다.”
“일단 삼대 제자 아이들을 전각으로 옮기도록 하겠습니다.”
“절정의 고수를 묶어두는 기괴한 수법을 사용한다고는 하지만, 바꿔 말하자면 그들 역시 절정의 고수 정도 되면 부담이 된다는 뜻일 겁니다. 검진의 조를 짜두도록 하겠습니다.”
“이거 오래간만의 실전이라 몸이 똑바로 움직일지 모르겠군요.”
전성기의 끝자락.
혹은 이미 늙어 무공이 쇠퇴하고 있는 화산의 일대 제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모든 준비가 끝나기 전. 그들이 생각한 것보다 조금 빠르게.
마교의 무리들이 들이닥쳤다.
-쾅!!!
오백 년.
송태조 조광윤이 직접 하사했다고 전해지는 화산 본산의 산문이 일수에 박살 났다.
불길한 마기로 일렁거리는 서른 명의 마인들.
그 가운데 거대한 사인교가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왔다.
“이 더러운 마인놈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외당주 굉명이 분기탱천하여 소리쳤다.
-쉿.-
아직 사인교의 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저 그 사이로 흘러나온 작은 음성이 흘러나왔을 뿐이다.
그래, 분명 아주 작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이상하게 그 음성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 아니 이 자리를 넘어 저 멀리 전각에 숨어있는 아직 어린 제자들의 귓속까지 명확하게 파고들었다.
-아이들아. 실로 오래간만이로구나.-
“이 노옴!! 이건 또 무슨 사술이더냐.”
-쯧쯧, 참으로 안타깝다. 모든 것이 그대로인 것 같지만 모든 것이 변해버렸구나. 이제 고작 백 년도 지나지 않았거늘 어찌하여 너희는 나를 알아보지 못한단 말이더냐.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 코를 흘리던 아이들이 저리 훌륭히 자라났으니 나는 그것으로 만족한다.-
사인교의 문이 서서히 올라갔다.
흑색의 비단옷.
무한 혈사 당시 마교의 대제사장이라던 인물이 입었던 바로 그 옷 그대로다.
운호의 등에 매여있던 파검이 스스로 날아 운호의 오른손에 들어왔다.
-저 녀석 지금 허세를 부리고 있다.
그의 말처럼 사인교에서 내리는 대제사장의 몸은 어딘가 온전해보이지 않았다. 뿌옇다. 마치 연기 사이에 선 것처럼. 하지만 그것과는 명백해 달랐다. 대제사장의 몸이 세상의 경계에서 흔들렸다.
사인교의 문이 올라갔다.
가슴을 넘어 목으로 그리고 다시 턱까지. 무한 혈사. 그 당시 그곳에서 쓰고 있던 고통의 가면이 보이지 않았다.
마치 신선처럼 허옇게 샌 수염. 하지만 주름 하나 보이지 않는 팽팽한 얼굴. 운호는 어째서인지 저 얼굴이 조금 낯익다고 느꼈다.
청무진인이 주춤 한 걸음을 물러섰다.
청허진인이 크게 놀라 침을 꿀꺽 삼켰다.
“장오야, 이곽아. 참으로 오래간만이로구나.”
“사······, 사부?”
그 순간 기억이 났다.
그것은 아주 오래전. 그가 이준형과 장광의 청소를 도맡아 했던 그 시절 너무나도 자주 보던 얼굴이었다.
만리우보(萬里牛步) 백운진인 공양소.
화산파의 황금기를 끌어냈던 화산파 최후의 천하제일인이 그들 앞에 섰다.
조사당에 걸려있는 그 얼굴 그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