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화
다시 화산으로(14)
돌이켜보면 참으로 복잡한 시절이었다. 이준형은 그 시절 자신이 가졌던 마음이 무엇이었는지 지금도 콕 찝어 정의내릴 수 없었다.
강아현은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 이상으로 그녀가 가진 배경이, 그 당당함이 부러웠다. 다른 아이들 앞에서 고고한 척하고, 은근히 남을 깔아뭉갰던 것은 그렇게라도 스스로를 높이고 싶은 멍청한 마음이었는지도 모른다.
또한, 백운호는 특이했다. 순간순간 녀석이 보여주는 천재성은 그를 초라하게 만들었다. 많은 어른들이 그가 타고난 광양지체야말로 천하제일의 재능이라 칭찬했지만, 그럼에도 그는 운호가 보여주는 그 천재성이 이상할 정도로 신경쓰였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장광 그 녀석이 운호를 깔아뭉갤 때마다 그러지 말라고 짐짓 말하기는 했지만 내심 그 상황을 즐겼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이준형 자신은 나쁜 놈이었다.
그를 바라보는 운호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 시선에 담긴 감정 역시 느껴졌다. 부정적인가? 아니다. 그 시선에는 조금의 악감정도 섞여 있지 않았다. 그저 약간의 반가움.
이준형은 바로 그 순간 깨달았다.
아, 나는 여전히 나쁜 놈이로구나.
우습게도 화가 났다.
알고 있다. 만약 화를 내야 한다면, 만약 나쁜 감정이 남아있다면 그것은 운호 쪽이어야 한다고.
물론 그의 팔은 거의 불구가 될 뻔 했고, 지금도 이전만큼 완전한 상태는 아니다. 그의 작은 할아버지는 고작 친선 비무에서 그렇게 커다란 상처를 입히는 게 어딨냐며 노발대발하셨지만 글쎄······.
이준형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날의 그 비무는 고작 그렇고 그런 친선 비무가 아니었다. 그는 그런 결과를 각오했고, 그것은 그와 함께 그곳에 섰던 백운호 마찬가지였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참으로 괴로웠다.
차라리 여전히 자신을 보는 시선에 증오가, 아니면 분노가, 그것도 아니라면 승리의 만족감이 섞여 있기를 바랬다는 그 저열한 마음이. 운호가 자신에 대한 감정을 모두 털었다는 것에 이토록 화가 난다는 사실이.
“문시진인. 참으로 오래간만이군.”
“그러게. 참 오래간만이네. 준형이 넌 이제 도사 다 된 것 같다?”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운호에게 다가가 인사를 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기에 오히려 더 그 대단함이 실감 난다. 그의 사부 역시 초절정의 경지였지만 이와는 달랐다. 단순한 성향의 차이일까? 아니면 반박귀진이라는 이야기로만 전해 들은 경지일까?
별 영양가 없는 이야기들이 오고 갔다.
그리고 운호는 그 와중에 진심으로 이준형의 성취를 축하했다. 그 순수한 축하가 또 한 번 이준형의 마음을 자극했다.
잘 알고 있다. 이것이 악의가 없는 축하라는 것도. 그리고 이것을 배배꼬인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스스로의 옹졸함이라는 것도.
역시 한 번 악당은 어쩔 수 없는 악당이라는 것일까?
이준형이 고개를 저었다.
그래, 그저 아직 수행이 부족한 탓이다. 자하기공은 마음의 공부다. 이겨내야 하는 것은 외부의 적이 아닌 자신의 마음속에 사는 마귀다.
‘문시진인, 문시진인.’
이준형의 생각처럼 운호는 진심으로 그의 성취를 반가워하고 있었다.
이십대 중반에 절정의 경지라니.
보통 재능 넘치는 고수가 절정에 오르는 나이는 서른 전후. 그렇게 절정에 오른 고수가 초절정에 오르는 것은 쉰에서 예순 전후다. 일반적으로 마흔을 넘어 절정에 오르거나, 예순이 넘어까지 초절정에 오르지 못하는 인물이 초절정의 경지에 다다르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물론 화산의 자하기공은 그 특성상 그 기간이 조금 더 길어져서 십 년 가까운 유예가 더 생기기는 했지만, 반대급부로 그 성취를 이른 나이에 이룩하는 경우는 보기 드물었다.
파검의 장담 대로라면 운호에게 주어진 시간은 앞으로 십이 년이 채 남지 않았다.
서른 일곱.
그 나이에 초절정에 오르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근래에 운호를 제외하고 가장 이른 나이에 초절정에 올랐던 이는 제국의 창업 군주인 홍무제 주원장으로 서른다섯의 나이에 초절정에 올랐다. 수많은 기연과 실전, 그리고 본인의 재능이 겹쳐진 결과였다.
하지만 홍무제 주원장이 무공에 입문한 것은 열다섯이었고 그가 절정의 경지를 이룩한 것은 스물일곱의 나이였다고 한다. 강아현도 그렇고 여기 이준형도 그렇고 무공에 입문한 나이는 서너 살 무렵이었으며 두 사람 모두 이십 대 초반에 절정의 경지를 이룩했다.
그렇다면 어쩌면······.
저 멀리 현무자와 조왕 주고수, 벽운 도사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곁에 종화가 서 있었다.
“저것이 소검후······. 과연.”
이준형이 종화를 바라보며 감탄했다. 강아현 역시 입 밖으로 말을 내뱉지는 않았지만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지금으로부터 약 십 년 전.
화산에서 한 달가량 함께 무공을 연마하던 당시 종화와 강아현은 그야말로 난형난제라고 할만한 성취를 보여줬었다.
그리고 십 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강아현은 일반적인 상식을 뛰어넘는 성취를 이룩했다. 거기에는 그녀 스스로의 노력도 있었지만 쉽게 찾아올 수 없는 기연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또래 가운데 운호와 같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한다면 자신을 따를만한 이는 없으리라 내심 자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준형에 이어 오늘만 벌써 두 명.
아니, 아니다. 고작 그 정도 수준이 아니다. 이준형의 경지는 아무리 봐도 자신 보다 높지 않다. 하지만 종화는 조금 달랐다.
대장군부에서 처음 운호와 재회했을 때 느꼈던 수준?
초절정이라는 단계를 한걸음 앞두고 있는 듯한 그런 감각이다. 물론 그 한걸음이 누군가에게는 평생을 투자해도 넘어설 수 없는 한 걸음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지금 옥녀봉에 있는 그녀의 어머니 능라나찰 소여향보다도 오히려 더 경지가 높아 보인다.
일대일로 싸운다면 이 할 미만.
지금 옆에 서 있는 이준형과 함께 덤빈다고 해도 팔 할 정도?
벽운도사에게 뭐라 이야기를 들은 종화가 성큼성큼 그들에게 다가왔다. 종남의 무공은 본래 순양으로 그 도사들의 성정 역시 호쾌하며 기골이 크고 장대하기로 유명하다. 종화는 태을의 무공을 익혔기에 그 덩치는 다른 종남의 도사들에 비할바가 아니었으나, 그 걸어오는 걸음걸이만큼은 다른 종남의 도사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강해졌구나. 백운호.”
“종화 너도.”
오래간만이라는 인사 대신, 대뜸 무공 이야기부터 꺼내는 것이 과연 종화답다. 운호가 웃으며 종화에게 다가갔다.
그녀가 자신에게 연심을 품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솔직히 걱정했었다. 누군가를 짝사랑하는 것은 힘든 일이지만 그것에 부응할 수 없는 것 역시 쉬운 일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어제의 만남으로 알 수 있었다. 팔 년은 긴 세월이고 종화는 자신에 대한 마음을 다 정리했다. 그렇기에 오히려 기꺼웠다.
아니, 기꺼움을 넘어 든든했다.
준형이나 아현이는 미지수다. 하지만 운호가 생각할 때 종화라면 가능하다. 앞으로 십이 년. 별다른 일만 없다면 충분히 경지를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종화가 고개를 돌려 아현이를 바라봤다.
“너 치고는 제법이네. 최소한 놀지는 않은 것 같은데?”
“글쎄, 나랑 검을 맞대고도 제법이라는 말을 할 수 있을지 궁금하네.”
“길고 짧은 걸 굳이 대봐야 아는 건 아니지. 너와 나 정도 차이라면 말이야.”
아, 그러고보니 화산에 머물던 한 달.
당시에도 종화와 아현이의 사이는 그리 좋지 않았다. 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두 사람 모두 자신에게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보니 단지 그 문제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하긴, 두 사람 모두 여인이지만 동시에 무인이다. 같은 또래에 비등비등한 무인에게 경쟁심을 불태우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래서 두 사람 혼인은 언제야?”
종화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운호도 강아현도 모두 말문이 턱 막혔다.
물론 두 사람 모두 그 시기가 화산의 일대 제자들이 은퇴하고, 그들이 도호를 받은 이후일것이라 예상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이렇게 직접적으로 대놓고 묻는 이는 종화가 처음이었던 탓이다.
“놀라기는 뭘 놀라고 그래. 강호에 그걸 예상 못하는 사람이 어딨다고. 여기 이 도사도 다 예상하고 있던 것 같구만.”
“문시진인······.”
이준형이 조용히 도호를 되뇌었다.
“어르신들 은퇴식 끝나고 바로면 그것까지 참가했다가 돌아가려고. 수련하느라 바쁘기는 한데, 그래도 너희 혼인식은 참가해야지.”
“그게······, 그러니까······.”
“뭐야? 설마 아직 구체적인 날도 안 잡은 거야? 강호를 그렇게 단둘이 떠돌아놓고?”
곤란해하는 운호에게 종화가 눈을 크게 뜨고 되물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현이 두 사람 사이에 살짝 끼어들었다.
“사조님들 은퇴식 끝나면 거의 바로 날짜를 잡을 예정이야.”
“역시 그렇구나.”
종화가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로 수더분하게 웃었다.
“그나저나 우리 이렇게 오래간만에 만났는데 검 좀 맞대봐야지. 오늘 저녁에 거기로 찾아가도 괜찮지?”
“아니. 거긴 좀.”
“뭐야? 설마 고작 종남의 말학이 강호에 위명이 자자한 신검과 어찌 감히 검을 맞댈 생각이냐. 뭐 그런 거야?”
종화의 이야기에 운호가 손사래를 쳤다.
“그게 무슨 비약이야. 그게 아니라, 이제 거긴 내 사제가 주로 수련을 하고 있어서. 그리고 지금 우리 무위면 거긴 너무 좁잖아.”
“저녁에 우리 홍매당 4연무장으로 와. 거기라면 우리가 검을 섞기에 충분할 테니까. 물론 운호 너는 적당히 힘 조절 좀 하고.”
“우리? 우리라니? 아현이 너랑 나? 글쎄, 내가 생각할 때 여기서 우리는 나랑 운호를 묶는 게 옳은 것 같은데. 넌 딱 여기 이 도사님과 비슷할 것 같고.”
“뭐라고!?”
“문시진인······. 운호야 아무래도 오늘 저녁 그 일정, 나도 합류해야 할 것 같구나.”
강아현과 이준형 두 사람이 동시에 발끈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정말로 십 년 전. 옥녀봉 아래 그 모옥에서 매일같이 검을 맞대던 날들이 떠올랐다.
별 다른 걱정없이 그저 검을 휘두르던, 이제는 돌아올 수 없는 그 시절.
저 멀리서 조왕 주고수가 큰 소리로 운호를 불러댔다.
당장 벽운 도사를 데리고 한적한 곳으로 가서 검을 휘두르고 싶은데, 아무래도 그게 잘 안 풀리는 모양이다.
무한의 혈사로 정말 많은 고수들이 크게 다치거나 사망했다. 천무십칠성 가운데서만 다섯이 죽었으며 걸왕은 그 무공의 태반을 잃어버렸다.
하지만 그 이후 고작 팔 년.
젊은 무인들은 자라났고, 재능 넘치던 중견 고수들은 초절정의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래, 이것이 바로 중원의 가장 큰 힘이며 포달랍궁의 활불, 마교의 대제사장, 달단의 살리답. 그리고 그 외 수많은 적들이 아직도 승리하지 못한 이유다.
넓은 땅. 그리고 보다 많은 사람.
운호는 생각했다.
어쩌면 정말 남궁강의 말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고. 아니, 설혹 그것이 아니더라도 앞으로 십이 년이면 적어도 무한에 모였던 그 전력 이상의 힘으로 마교를 몰아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그리고 그 순간.
운대봉에 기거하던 권신이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니, 대체 어떻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