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화
다시 화산으로(12)
본래라면 이틀은 족히 걸릴 거리를 하루 반나절만에 주파한 늙은 신하의 얼굴에는 피곤함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런 피곤함 따윈 그를 기다리던 광경에 비하자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 맙소사!! 왕야!!! 아니,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역시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제가 함께 했어야 했습니다!! 감히 누가 왕야의 존체에 이런 무도한 짓을!! 설마 화산의 도사들입니까? 감히 황제 폐하의 숙부이신 왕야께!! 이 무도한 무림의 왈패들이 백만금군의 무서움을 잊었나 본데. 안 되겠습니다. 내 이놈들을 당장 요절을 내고 오겠습니다!!”
“됐다. 무인끼리 싸우다 보면 조금 손속이 과해질 수도 있지. 뭐 그런 것 가지고 이리 호들갑이더냐.”
“하지만!!”
“내 분명 됐다고 하지 않았더냐. 최효 설마 나를 부끄럽게 만들 생각이더냐.”
늙은 신하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조왕의 부러진 팔목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알겠습니다. 허나 제가 입을 다문다고 해도 천하에는 황제폐하의 눈과 귀가 가득합니다. 그리고 황상께서는 전하의 그 팔을 본다면 절대 가만히 계시지 않으실 겁니다.”
“그야 그렇겠지.”
물론 그것은 황제가 특별히 조왕 주고수를 아끼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황족이다. 제국의 천하에서 가장 존귀한 일족이라는 뜻이다. 누군가에게는 황족에게 상처 주는 것을 좌시한다는 것 자체가 그들의 권위를, 그리고 그 위에 세워진 제국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행위가 된다.
“그러니까 팔이 좀 괜찮아 질 때까진 여기 더 머무는 걸로 해두자꾸나.”
“네? 하지만 전하!!”
“왕부야 어차피 내가 없다고 당장 문제가 생길 것도 없지 않더냐. 어차피 폐하께서 이리저리 다 살펴주고 계시니 말이다.”
“하오나······.”
“그보다 운호라는 어린 도사가 어디에 있는지나 알아보거라. 또 알아서 하겠다고 그 아이를 강제로 데리고 오거나 할 생각은 하지 말고. 내가 직접 찾아가볼 생각이니 그저 어디 있는지 알아만 오거라.”
***
“그래서 식은 언제 올릴 생각이냐,”
“네?”
“‘네?’는 무슨 ‘네?’더냐. 설마 과년한 처자와 몇 년을 단둘이 떠돌았는데 설마 그대로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굴 생각이더냐?”
“단둘이라니. 누가 들으면 정말 오해할 말씀을 하시는군요.”
장당과 왕효.
비록 지금 이 자리에는 없지만 그들 역시 청해성을 떠나 보광현까지는 항상 함께였다.
운호의 이야기에 공야찬이 코웃음을 쳤다.
“흥, 설마 그게 지금 변명이 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화산금정 강진.
능라나찰 소여향.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공야찬 자신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는 인물들이었다. 그런 이들의 무남독녀 외동딸이 자신의 제자와 무려 사년이 넘는 시간동안 강호를 떠돌았다.
물론 그 여행이 아무 성과가 없는 것은 아니었는지 강아현의 성취가 터무니없는 수준에 오르기는 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이 정도면 아현이 혼삿길은 완전히 막혔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사내라면 응당 책임을 져야지.”
물론 강아현의 미모나 재주 그리고 배경을 생각한다면 운호와 혼례를 올리지 않아도 추문이야 돌겠지만 혼삿길 자체가 완전히 막히지는 않을 것이다.
“길게 말하지 않겠다. 조만간 있을 큰 행사가 끝난 이후 곧바로 혼사를 치르도록 해라. 이제 혼사를 뒤로 미뤄봐야 추문만 더 커질 뿐이다. 무엇보다 너도 이제 일가를 이룰 나이다.”
“······.”
강아현과의 혼인.
생각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아무리 강호가 남녀 관계에 관대하다고 해도 과년한 남녀가 무려 4년을 함께 하는 경우는 절대 흔치 않다.
“제가 직접 아현이와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여자의 부모가 허락했고, 사부인 공야찬 자신이 주선했다.
무엇보다 두 사람이 그렇게 오래 함께한 것을 보니 서로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니다. 헌데 굳이 이야기를?
공야찬이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적어도 하지 않겠다는 소리를 하지는 않았으니 일단은 됐다.
“그래, 좋다. 알겠다.”
***
“그러면 도호 문제는 이제 이렇게 결정하겠네.”
“그러시지요.”
화산 굉자배의 은퇴가 결정됐다.
날짜는 앞으로 한 달 뒤.
그리고 전통에 따라 그들의 은퇴와 동시에 삼대 제자들에게 도호가 내려질 예정이었다. 그에 관하여 가장 첨예하게 이야기가 오간 부분은 무(武)의 이름이 누구에게 전해질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물론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애당초 이건 고민할 것도 없었다. 운호가 앞으로 천하제일인의 자리에 오를 것은 이견의 여지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아직 운호를 직접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점. 그리고 기종과 검종의 역사. 최근 이십대 중반의 젊은 나이에 절정에 오른 이준형의 존재. 무엇보다 굉자배에 무의 이름을 받았던 이가 누구였는지. 그리고 그가 어떻게 갔는지에 대한 기억이 그 당연한 부분에 이견을 만들었다.
하지만 얼마 전 운대봉에서 있었던 사건이 그런 토론을 쏙 들어가게 만들었다.
이 자리에 있는 장로들 가운데 절정이 아닌 이는 없었다. 그들 모두가 화산 전체를 휩쓸었던 그 무시무시한 기운을 느꼈다. 그리고 사건의 내막은 현무의 입을 통해 들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조왕의 팔이 저 모양이 된 것이 운호의 짓이라 그 말이더냐? 청허 사숙과 현무 너는 모두 조왕에게 패배를 했고? 게다가 그 터무니 없던 기운의 움직임은 청무 사백이 운호를 막기 위한 움직임이었다고?”
“네.”
실로 터무니없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현무가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었고, 그가 잘못 본 것이라고 치부 하기에는 굉자배 가운데 그만한 성취와 안목을 지닌 이도 없었다.
“허허허······.”
그렇기에 그들이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저 헛웃음을 흘리는 것뿐이었다. 미래의 천하제일인이라는 평가는 수도 없이 들어왔다. 하지만 저 말대로라면 그 미래라는 것도 아득히 먼, 그러니까 그들이 모두 죽고, 현자배 아이들이 은퇴할 때 즈음이 아니라 그리 멀지 않은 몇 년 후가 될지도 모르는 수준 아닌가.
그 이후 감히 무의 이름을 다른 아이에게 내줘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 따위는 나올 수가 없었다.
성대한 행사가 준비됐다.
그리고 그에 어울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왔다.
구파의 명숙들.
칠대세가의 장로들.
화산의 속가들.
지난 수십 년 동안 화산의 굉자배와 친목을 나눠왔던 모든 이들이었다.
그들의 은퇴는 금분세수와는 그 성격이 조금 달랐다. 금분세수가 강호의 모든 은원을 씻고 강호의 일에 더 이상 아무런 상관을 하지 않겠다는 성격이라면, 그들의 은퇴는 그저 화산파의 전면에서 물러나겠다는 의미였다.
그렇기에 은퇴를 하는 이들의 행선지는 제각각이었다. 화산의 깊은 봉우리로 들어가는 이도 있었고, 속세의 본가로 내려가는 이도 있었다.
“작은할아버지. 이제는 본가로 돌아와서 편히 쉬시지요. 할아버지께서 사용하시던 방을 깨끗하게 치워놨습니다.”
“됐다. 이 나이에 가문에 돌아가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평생을 화산에서 살았으니 마지막도 화산에서 보내겠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는 운호에게도 너무나 반가운 얼굴도, 그리고 그다지 보고 싶지 않던 얼굴도. 그리고 오매불망 기다리던 얼굴까지 모두 존재했다.
***
“흐음, 참으로 신기하구나. 아니, 두베는 이런 공능도 부여할 수 있었으면서 황룡검은 고작 이런 수준으로 만들어냈단 말이더냐?”
“고작이라고 하기에 황룡검의 공능은 충분히 대단한 것 같은데요.”
운호의 시선이 힐끔 그의 허리에 걸린 황룡검으로 향했다.
오른팔에 붕대를 감은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대단하긴 대단하지. 하지만 아무래도 범용성이라는 부분에서 네 검 쪽이 훨씬 낫지 않더냐.”
“글쎄요. 제 검도 솔직히 저에게 딱 맞춰 조정된 검인지라 나중에 다른 사람이 들면 어떻게 될지는 모르는 일이죠.”
그날 이후 조왕 주고수는 운호에게 제법 자주 찾아왔다. 그는 태생적으로 타고난 거만함이 존재했지만, 동시에 무공에 관해서는 순수하다는 표현이 어울릴만큼의 열정 역시 존재했으며 또한, 생각보다 훨씬 소탈하기도 했다.
“솔직히 네가 그 검에 어울리지 않는 인간이었다면 회수할 생각이었다. 나도 신검이 갖고 싶었거든.”
“이미 신검을 하나 가지고 계시잖습니까.”
“이거?”
주고수가 자신의 허리에 걸린 황룡검을 툭툭 건드렸다.
“엄밀히 말하자면 황룡검은 내 검이 아니다. 황실의 검이지. 게다가 본래는 황실을 대표하는 고수가 평생 소유한다는 규칙이 있었는데, 아바마마가 이 검으로 내 사촌을 쫓아낸 이후 그 규칙도 바뀌었거든. 기본적으로는 황제가 보관을 하고, 필요할 때만 요청을 해서 사용할 수 있는 식으로 말이야.”
“그렇군요······. 헌데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궁금한 점? 말해보거라.”
“황룡검은 그 스스로가 검강을 일으키지 않습니까?”
“그래, 그렇지.”
“허면 경지에 이르지 못한 이가 검을 쥐어도 혹시 그게 가능한 겁니까?”
주고수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아니다. 황룡검의 검강은 어디까지나 공명을 기본으로 하거든. 내가 만들어낸 검강과 정확히 반대되는 심상의 검강을 일으킨다. 그 결과물로 투명한 무형의 검강이 만들어진다고는 하던데······. 뭐, 무슨 문제인지 아바마마도 나도 온전한 무형 검강은 발현이 안돼지만 말이다.”
“공 노야와는 대화를 나눠보셨습니까?”
“당연하지. 하지만 그 늙은이야 검이나 만질 줄 알지 알다시피 무공은 형편없지 않더냐. 황룡검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는 이야기만 반복할 뿐이었다.”
“그렇군요.”
“흐음······. 이거 제법 거물이 하나 찾아오는 모양이로구나.”
주고수가 경지를 넘어선 누군가를 느꼈다.
최근 화산의 거대한 행사를 앞두고 여러 고수가 찾아왔다. 하지만 그 가운데 경지를 넘어선 고수는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운호가 워낙에 초절정의 고수를 자주 만나고 다녀 흔해보이지만 경지를 넘어선 고수는 관과 무림. 그리고 숨어있는 은거 기인을 모두 합쳐도 백을 넘지 않는다.
그리고 운호 역시 주고수가 느낀 그 기운을 느꼈다.
익숙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익숙한 기운 두 가지가 적절하게 한 곳에 섞여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운호가 좋아하는 사람들이었다. 그 중 하나는 이제는 볼 수 없는 얼굴이었고, 또 하나는 십 년 가깝게 보지 못한 얼굴이었다.
“표정을 보니 누군지 짐작이 가는 모양이로구나.”
“네, 아무래도 제가 마중을 나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운호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같은 시간. 운호보다 한발 빠르게 그들에게 다가간 이가 있었다.
현무였다. 그가 자신의 오랜 친구인 벽운자에게 다가갔다.
“오랜만이로군.”
“십 년 만인가? 성취를 얻었다는 소식은 들었네. 축하하네.”
“글쎄, 축하는 오히려 내가 해야 할 것 같군.”
태을검선의 사망.
무한에서의 혈사.
이후로 팔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사실상의 봉문을 선택했던 종남이 실로 오래간만에 산문을 나섰다.
그리고 그 무리의 한복판.
운호의 오랜 친구가 한층 성숙해진 눈빛으로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