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화
다시 화산으로(11)
물론 몽원경의 그 괴물은 피륙이 갈라지고 뼈가 바스러졌음에도 끝끝내 운호의 가슴팍에 더 커다란 구멍을 만들어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무려 바즈라파니를 자처하는 인물이다. 부처를 호위하고 불법을 수호하는 자. 중원의 말로 하자면 금강역사(金剛力士)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력의 상징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활불은 스스로 그것을 자처할만한 실력을 지니고 있기도 했다.
하지만 주고수는 활불과 달랐다.
-쾅!!!
단 일 합!!
주고수를 무너트리기에는 그 일 합이면 충분했다.
문제는 그 위력이 충분을 넘어서버렸다는 점이었다. 충돌의 순간 닥쳐온 그 어마어마한 충격량이 주고수의 몸을 뒤흔들었다.
주고수의 손이 이상한 각도로 꺾이고 그가 쥐고 있던 황룡검이 날아갔다.
하지만 아직도 운호의 검은 멈추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그리고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존재했다.
운호가 처음 파검을 활성화해봤던 보광현에 비해 이곳의 기운은 지나치게 맑고 정순했으며 운호 자신에게 딱 들어맞았다는 점이 첫 번째.
주고수가 들고 있던 황룡검을 보고 파검이 지나치게 흥을 냈다는 점이 두 번째.
그리고 그 모든 요소에도 불구하고 최악의 경우를 방지할 안전책의 존재를 믿고, 운호 스스로가 자신이 펼쳐낼 수 있는 최대한의 위력을 펼쳐 보였다는 점이 세 번째였다.
충돌의 순간.
현무는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그리고 청허는 인지했지만 늦었다.
하지만 청무 진인은 달랐다. 그는 가장 적절한 순간에 그 거대한 힘의 충돌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그 움직임을 제대로 인지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시간은 절대적인가.
어떻게 보면 어처구니없는 질문이다. 시간이 모두에게 공평하게 흐른다는 것은 당연한 상식 아니던가. 하지만 때때로 상식이라는 이름 아래 당연시되던 것은 공리가 아닌 그저 의레 그렇게 생각하던 착각에 불과함이 밝혀지기도 한다.
파검의 그것과 흡사한 현상이 청무의 몸에서 일어났다.
단 한 번의 호흡에 화산의 어마어마한 정기가 한순간 그의 몸으로 빨려 들어갔다. 흡사하다고는 했지만, 그 범위와 현상은 그야말로 천양지차. 파검의 그것이 졸졸 흐르는 시냇물이라면 청무 진인의 그것은 장강과도 같았고, 파검의 그것이 웅덩이라면 청무진인의 그것은 동정호, 아니 저 넓은 대해와도 같았다.
터무니 없는 기운의 집적.
인간의 몸으로 이토록 거대한 기운을 어찌 끌어모을 수 있단 말이던가. 이 정도면 가히 반선이라 칭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기운의 한계는 삼갑자다.
물론 그것은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고, 심지어 자하기공 구단공을 완성한 청무진인은 그 한계라는 수치를 미약하게나마 넘어섰다.
하지만 지금 그의 몸에 머무는 기운의 크기는 고작 그 정도가 아니었다. 방법은 간단했다. 물론 그 간단한 방법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이가 천하에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따져보자면 지금 그에게 모인 이 막대한 대자연의 기운은 그의 것이 아니었다. 그가 소유하지도 않았다. 그저 그가 가진 삼갑자의 단단한 기운이 핵이 되어 그 막대한 기운을 휘두를 뿐이다.
그리하여
시간은 절대적인가?
이 순간 청무진인은 그 당연한 상식에 질문을 던질 자격을 득했다. 고작 한 인간의 몸에 모여든 그 어마어마한 양의 자연지기가 그것을 가능케 했다.
청무 진인의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이것이 초절정의 경지에 오른 그의 의념인가를 따져본다면 그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아직 인간이 이해하지 못한 대우주의 법칙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그것을 이론적으로 이해하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것은 저기 홍매당에서 약이나 만들고있는 강진 같은 녀석들이 해야 할 일이다. 무인은 그저 그것을 활용할 뿐이다.
성큼성큼 걸었다.
그리고 날아가는 황룡검을 회수하여 얌전히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 어마어마한 힘의 충돌에도 불구하고 휘어지기는커녕, 이 하나 나가지 않은 것이 과연 신검이라는 이름에 어울린다.
팔이 부러진 주고수가 보였다. 눈을 까뒤집은 것이 혼절한 것이 분명했다. 저만한 고수가 고작 팔이 부러진 통증 정도에 혼절한 것은 아닐 테고 아마도 충돌의 순간 전해진 충격이 상상 이상이었겠지.
운호의 검이 보인다.
이 세상으로 들어왔을 때, 천하는 마치 멈춘 것처럼 고요하다. 하늘을 나는 새들도, 떨어지는 물방울도 심지어 천지간에 가득한 공기까지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호의 검은 움직이고 있었다. 시간과 시간의 간극을 꿰뚫고. 마치 본래 이곳과 저곳에 동시에 존재해야 한다는 것처럼.
본래는 그저 주고수를 빼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저것을 보고 있자니 무인의 호승심이라는 것이 불끈 솟구친다. 참으로 재밌지 않은가? 인생의 사분지 일밖에 되지 않는 어린 사손에게 호승심이라는 것을 느끼다니.
하지만 마음이 간다면 몸도 따르는 것이 마땅할 터.
움직임을 재촉했다.
그저 움직일 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터무니없는 양의 진기가 소진된다. 기운의 양이 줄어들면 줄어들수록 홀로 떨어져 있던 시간의 흐름이 모두에게 공평하게 흘러가는 그곳으로 향해간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기운의 크기는 여전히 막대하다. 수십 년을 고련하여 이제 그 동작 자체와 일치된 무공을 펼쳐냈다.
자운장(紫雲掌)
화산의 수많은 무공 가운데 가장 단순하며 진기를 쏟아 내기에 가장 효율적인 무공이다.
“허어!!”
그리고 이 순간 청무가 또 한 번 감탄할만한 일이 벌어졌다.
마치 동시에 두 장소에 존재하겠다는 목표를 가진 것처럼, 터무니 없는 속도로 움직이던 운호의 검이 청무진인의 자운장에 반응한 것이다.
운호 역시 그와 같은 시간을 공유하는 것일까?
아니, 아니다.
이 세계는 의념도 아니고, 초월도 아니다. 그저 인간의 몸으로 화산이라는 대자연을 담아낸 그에게 허락된 자연스러운 권능일 뿐이다.
그렇다면 운호의 이것은 무엇인가?
청무진인은 굳이 그 질문을 쫓지 않았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그는 그저 익히고 싸우는 사람이지, 질문에 대한 답을 쫓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니 그저 이것을 초절정고수의 마음, 혹은 의념 정도로 생각하자.
청무진인의 손이 연거푸 움직였다.
그리고 그 움직임에 따라서 막대한 기운이 뭉텅이로 깎여나갔다.
한 번, 두 번, 세 번.
이어지는 공방 속에서 그렇게 인간의 몸에 모인 대자연의 힘이 칠 할가량 소진됐을 때, 그리하여 그의 시간이 보편적인 그것에 한없이 가까워졌을 때.
마침내 파검을 통하여 기운을 빨아들인 운호의 시간이 끝났다.
-쿠과과과과광!!!
일순간 뇌성음과 같은 거대한 굉음이 몰아쳤다.
그것은 시간의 너머, 멈춰진 공기 속에서 그것을 가르며 달렸던 후폭풍이었다. 그와 동시에 운호의 몸이 크게 튕겨져 나갔고, 허공에 멈춰 서서히 떨어지던 주고수가 뒤늦게 달려온 청허의 품에 안겼으며 현무가 한 박자 늦게 그들에게 달려온 현무가 바닥에 떨어지는 운호를 받아들었다. 반쯤 의식을 잃은 와중에도 손에서 검이 떨어지지 않았다.
“사형!!”
“괜찮다. 큰일은 없을 것이다. 내 방에 속옥고 남겨둔 것이 조금 있으니 팔을 맞추고 발라두면 금방 나을 게다. 그보다 운호의 성취가 생각보다 아주 훌륭하구나.”
“문시진인, 문시진인······.”
현무가 차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화산의 조사인 문시진인만을 연달아 되뇌었다. 청무 진인과 자신의 차이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하기공의 팔단공과 구단공이다. 그것도 팔단공의 초입과 완성된 구단공의 차이다. 강호에서는 그것을 같은 초절정이라 부르지만, 그 차이는 이제 막 절정에 올라선 애송이와 초절정을 눈앞에 둔 완성된 절정 이상이다. 하지만 운호가 저 정도일 것은 감히 상상하지 못했다.
운호와 청무 사이에 있었던 그 싸움을 제대로 다 살피지도 못했다. 그 역시 자하진공 팔단공에 올라 초절정의 경지에 이르렀지만, 만약 현무 자신이 운호의 자리에 있었더라면? 과연 저만큼 버텨낼 수 있었을까?
‘그럴 리가······.’
기껏해야 두 합? 운이 좋다면 네 합까지.
이것이야말로 그의 사제인 현종자 공야찬이 그토록 바라던 모습인가? 비록 스스로는 실패했으나 그 제자만큼은 자신이 바라던 모습 그대로 키워낸 거구나.
현무가 쓰게 웃었다.
***
!?
공야찬이 한순간 갑자기 북쪽의 운대봉을 바라봤다.
“사부님 갑자기 왜?”
기쁨? 슬픔? 고통? 감탄?
그것은 뭐라 말하기 힘든 복잡 미묘한 표정이었다.
장호 자신이 처음 제자로 들어왔을 때, 공야찬은 지금과 비교되지 않을 만큼 무서운 사람이었다. 특히 그의 사형인 운호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 그 무서움은 배가 됐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나이를 먹어가면서, 흰 머리카락이 검은 머리카락보다 많아질 무렵부터는 운호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 지금과 비슷한 표정을 짓곤 했다.
그리고 그 흰머리마저 후두둑 빠지고 그 사이로 드문드문 두피가 보이기 시작하는 근래에 이르러서는 사형의 소식에 그 복잡한 표정보다는 뿌듯함과 자랑스러움을 표출하곤 했었다.
그렇기에 이것은 실로 오래간만에 보는 사부의 복잡한 표정이었다.
“운호가 운대봉에 올랐다고 했더냐?”
“네, 태사조님들을 뵙겠다고 올라갔습니다. 헌데 무슨 일이라도?”
“그렇다면 사조님께서 직접 운호에게 가르침을 주시려는 모양이로구나.”
그것은 실로 무시무시한 감각이었다. 비록 한순간이지만 마치 이 거대한 산맥 전체의 기운에 공백이 생긴 것 같았다.
자랑스러웠다.
고작 이십 대의 나이에 청무 태사조의 전력을 끌어낼 수 있다니. 그것은 그의 사부가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또한 사부의 말을 믿었던 공야찬 자신도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그래, 결국 옳은 것은 자신이었다.
화가 났다.
어찌하여 내가 아닌가. 어찌하여 하늘은 저 아이에게만 저러한 재능을 주었는가. 그리고 나는 왜 밖으로 나가겠다는 저 아이를 잡지 않았는가. 만약 저 아이만이 가진 무언가를 훔쳐낼 수 있었더라면 나도 벽을 넘을 수 있지 않았을까?
우스웠다.
이런 멍청한 생각이라니. 스스로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 않던가. 당시 공야찬 자신이 운호를 잡지도, 따라가지도 않았던 것은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내심 느끼고 있기 때문 아니었던가? 특별한 가르침 없이도 눈부시게 발전하는 저 아이야말로 오랜 검종의 가르침에서 누누이 말했던, 술로써 도를 이룰 재능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것은 자신과 같은 범인은 감히 따라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지 않았던가?
멍청한 둘째 제자가 보였다.
검을 휘두른다. 나쁘지 않다. 석년 자신과 비교해도 오히려 뛰어나다. 게다가 공야찬 자신과는 다르게 바로 옆에 검술에 대하여 친절하게 가르쳐줄 스승이 존재한다. 아마 이 녀석은 자신보다 더 강해질 것이다.
하지만······.
구름으로 가려진 저 높은 운대봉.
저 까마득한 봉우리에서 신선과도 같은 위용을 뽐내는 그들과 같아질 수 있을까?
공야찬은 생각했다.
어쩌면 화산에 필요한 것은 검종의 무공이 아닌 오직 기종의 무공이라고 이야기했던 누군가는 기종의 무공을 익혔던 조사가 아닐지도 몰랐다.
어쩌면 검종의 무공이 후대에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던 것은, 오태산의 혈사가 아닌······.
“나와 같은 인간들 때문이었을지도······.”
“네? 사부님. 지금 뭐라고?”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