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화
다시 화산으로(10)
신검 정답이 파(波)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태어나기까지 3년이 조금 못 되는 시간. 그것은 누군가에게는 너무나도 짧은 시간이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매우 긴 시간이었다.
운호는 여전히 몽원경에 서식하는 괴물을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
하지만 근 천 번에 달하는 싸움 속에서 운호는 참으로 많은 것들을 알아냈으며 또한 깨우칠 수 있었다. 게다가 처음에는 완강히 대화를 거부하던 그 괴물도 끝없이 이어지는 싸움 속에서 결국 유일한 타인인 운호와의 대화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 역시 운호에게 실로 거대한 도움이 됐다.
몽원경의 괴물은 무려 오백 년 전 극한의 경지에 이른 인간이었으며 이후의 기나긴 시간 동안 퇴보와 발전을 거듭하며 그 경지의 높이가 더 높아지지는 못했을지언정 그 폭만큼은 더욱 두텁게 쌓아 올렸다.
운호의 일 검이 펼쳐졌다.
홀로 고고하게 우뚝 선 하나의 봉우리.
주고수가 휘두르는 백색의 검강이 공간을 삭제했다면, 그 봉우리는 그와 주고수 사이에 무한한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절묘하게 타오르는 백색의 검강을 제어했다.
닿을 듯 닿지 않는 공방이 이어졌다.
그 답답한 공방에 주고수가 콧김을 내뿜었다. 그의 취향은 청허진인과의 공방과 같은 호쾌한 힘의 격돌이었다. 이런 계집애 같은 짓거리는 딱 질색이다.
“마치 쥐새끼 같구나!!”
운호가 펼치는 것이 상승의 절학인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들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박살내는 법은 간단하다.
변(變)과 환(換)을 깨트리는 것은 언제나 더 강력한 강(强)일지니.
-우우웅!!
흡사 용의 울부짖음과 같은 검명이 터져나왔다.
동시에 백열 하던 주고수의 검강이 한층 더 크게 타오른다. 그 절대적인 파괴 앞에 과연 무엇이 버틸 수 있을까? 마치 거대한 봉우리처럼 운호가 켜켜이 쌓아 올린 검의 장막이 바스러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운호의 눈은 여전히 침착했다.
허세일까? 아니면 본래 성정이 그러한 것일까?
주고수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본래 강검은 그러해야 한다. 오직 뒤를 돌아보지 않는 공격만이 모든 것을 파괴할 수 있는 법이니까.
파검이 마침내 자신의 차례라고 소리쳤다.
당연했다. 그가 기억하는 운호의 검은 딱 여기까지였다.
운호는 절정 고수 시절, 이 일검의 편린만으로 초절정이던 단증의 사자후를 막아냈으며, 초절정에 올라서는 활불의 공격들을 완벽하게 차단해냈었다. 그렇기에 이 검술이야말로 운호가 펼쳐낼 수 있는 최고의 방어식이며 그 무공의 정수라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운호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이다.
꽃봉오리와도 같은 거대한 봉우리가 허물어졌다.
주고수는 그것이 자신의 공격이 운호의 방어를 허물어트리고 있는 것이라 믿었다.
운호의 검이 뻗어나갔다.
마치 홀로 고고하게 서 있던 하나의 봉우리가 산맥이 되는 것처럼.
마치 꼭 다물어있던 꽃봉오리가 피어나는 것처럼.
파검이 그것을 기억해냈다.
활불을 상대로 펼쳐냈던 바로 그 일 검이다. 오직 그 순간 펼쳐냈을 뿐, 단 한번도 재현하지 못했던 그 검을 지금 운호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펼쳐내고 있었다.
운호가 해석한 진정한 광음.
심즉동(心卽動)을 넘어선 심즉동(心則動).
마치 운호의 검이 동시에 두 군데에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터무니 없는 쾌검이었다.
‘저것은?’
지켜보던 청무진인이 그 일검에 감탄했다.
앞선 저 방어의 초식도 그렇지만, 거기서 연결되는 이번 일검은 무공의 한계를, 아니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여 물질세계의 법칙 너머에 존재하는 마치 저 검강과도 같은 운호 자신만의 법칙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운호를 너무 얕잡아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했다.
활불을 죽이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고는 하지만 그저 주변의 여러 초절정 고수들 사이에서 무언가 보탬이 됐겠지. 정도로 생각했지만 아니다. 지금 운호가 보여주는 모습은 이제 막 초절정의 경지에 오른 애송이가 아닌, 적어도 사제인 청허 진인에 근접하는 아니, 스스로의 법칙을 다룬다는 점에서는 어쩌면 자신에 필적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청무진인이 운호의 검술에 감탄을 했다면 현무와 청허는 경악을 했다.
그들 역시 초절정의 고수로 조왕 주고수가 보여준 신위가 그가 소지한 저 황룡검이라는 신외지물의 힘을 빌린 것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또한, 청무가 운호에게 조왕을 상대해보라 할 때도, 운호가 쥔 검이 그와 흡사한 것임을 짐작했다. 그렇기에 운호가 파검의 힘을 빌려 조왕을 상대했더라면 지금과 같은 경악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알 수 있었다.
지금 운호가 보여주는 저 검술은 오롯하게 운호 자신의 것이라는 것을.
검종의 무공이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성취를 보인다는 것 정도는 알고있었다. 실제로 전설로만 전해지는 증무진인 목운평 역시 고작 마흔의 나이에 단신으로 황산에 올라 마존을 참했다고 하지 않던가. 물론 인급이나 지급의 마인들 역시 종종 마존이라 불리는 만큼 그런 마인을 참했다고 보는 것이 현재 화산의 주류 의견이었다.
‘어쩌면 정말 천급의 마존을 참했던 것일지도······.’
고작 스물다섯에.
어쩌면 성장의 한계점에 도달해버린 초절정 고수와 비슷한 성취를 보여준다?
-쾅!!!
주고수가 크게 몇 걸음을 물러났다.
기습적으로 찔러온 운호의 일 검을 회피하는 과정에서 제법 많은 손해를 봐야만 했다. 쭈욱 이어지던 공세가 깨진 것은 물론이거니와 몇차례 가벼운 타격. 그리고 거의 전력을 다한것에 가까운 발차기 한 번을 허용했다.
-후읍.
가볍게 호흡을 통해 흔들리는 경맥을 가다듬는다.
물론 운호 역시 그것을 놓칠 생각은 없었다. 호흡의 정중앙. 운호의 검이 주고수를 위협해왔다.
고작 한 수의 이득을 봤다고 감히 공세로 돌아서?
저 화산을 연상케 하는 검술에서 봐서 알다시피 이 아이의 검술은 받아치는 데 치중되어있다. 물론 조금 전의 일검은 실로 대단했지만, 그것도 역습이었기에 이만한 피해를 본 것이지 단단히 대비되어있었다면 이 정도로 큰 어려움은 없이 막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라고 생각했었다.
착각이었다.
그것은 주고수가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공세였다. 호흡의 마디마디마다, 동작과 동작의 연결마다 운호의 검이 그를 위협했다. 그것은 마치 한 수 위의 고수가 한 수 아래의 하수를 지도하는 것과 흡사했다.
터무니 없다. 주고후 자신이 누구던가? 황실에서 유일하게 초절정의 경지를 이룩한 무인이다. 헌데 그런 자신을 상대로 지도 대련에 가까운 비무라고?
무엇보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호쾌한 힘과 힘의 충돌이 아닌, 갑갑한 공방의 연속. 마치 늪에 서서히 빠져드는 것처럼 자신도 모르게 패배로 끌려가는 더러운 느낌.
“실로 쥐새끼 같구나!! 감히 나의 검을 정면에서 받아낼 자신은 없는 것이더냐!!”
운호가 생각했다.
아마도 몽원경의 괴물이 들었더라면 크게 웃음을 터트릴만한 말이라고.
물론 주고수의 검격은 강력했다.
또한 저 무형검강이라고 했던가? 그 파괴력은 실로 터무니없는 수준이다.
하지만 엄밀하게 위력만 따진다면?
활불의 일권 일퇴가 그보다 강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가 작정하고 내뿜는 사자후와 비교하자면 우습다. 활불의 사자후는 말 그대로 지형을 바꿀만한 위력이다.
그리고 운호의 검술 성취는 그런 사자후조차 피해 없이 막아낸다.
“후회하실지 모릅니다.”
“후회?”
운호가 파검을 바라봤다.
처음 검을 손에 쥐고 그 착 감기는 느낌이 매우 크게 감탄했다. 과거 남궁철이 건내줬던 그 보검에도 ‘과연 비싼 값을 하는구나.’하고 감탄했던 적이 있었는데, 이것은 그 이상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운호는 그저 이것만으로도 3년을 기다린 보람이 있다고 느꼈다.
“어르신, 이제 진짜 어르신이 나설 시간입니다.”
-우우웅!!!
약점을 보완하는 것이 더 좋은 것인가.
아니면 강점을 극대화하는 것이 더 좋은 것인가.
그 어려운 질문 앞에서 공두베가 선택한 것은 간단했다.
“둘 다 하지 뭐.”
파검의 울음과 동시에 주변의 공기가 크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청무진인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건?’
단순한 공기의 진동이 아니다.
이것은 마치 청무 진인 자신이 운기행공을 할 때와 흡사하다.
대자연에 고루 분포된 기운들이 한점으로 모여든다. 마치 구멍 뚫린 둑으로 물들이 빨려들어가는 것처럼.
그리고 그 중심에 운호가 들고 있는, 파검이라 이름 붙은 그 검이 있었다.
내공.
운호의 가장 큰 약점이다.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타고난 체질도 그러했고, 주어진 시간 역시 그러했다.
기는 천하 만물에 존재한다.
그 가운데 특별히 기운을 많이 품은 것이 있으니, 그것이 영물의 내단이며, 영초 같은 것들이다. 허면 광물 중에는 그러한 것이 없을까? 물론 존재한다. 만년한철이니, 적양금이니 성운철이니 하는 것들이 그러하다. 강호에 떠도는 신병이기의 태반이 그러한 것들을 재료로 만들어진 무구들이다.
하지만 공두베는 고작 그런 기운을 활용하는 정도로는 운호의 약점을 보완하기에는 터무니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오히려 그 반대의 수단을 취했다. 천하에 가장 기운을 품고 있지 않은 광물. 절대 신병이기의 재료로는 쓰일 수 없는 그것을 찾아냈다. 아마 검에 어려있는 파검의 백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공두베가 해낸 몇 가지 처치가 아니었다면 이 검은 몇 번의 충격만으로도 바스러졌을 것이다. 물론 그 몇 가지 처치에 년 단위의 시간과 수백 번의 시행착오가 있긴 했지만 그만한 성과 역시 존재했다.
텅 빈 검에 일시간에 몰려온 대자연의 진기가 파검의 통제하에 운호에게 흘러 들어갔다.
-우우우웅!!
그 압도적인 흐름에 파검이 비명을 내질렀다. 운호 역시 괴로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파검을 통하여 자신의 방식이 아닌, 또한 자신의 힘도 아닌 날것 그대로에 자연지기가 쏟아진다. 보통이라면 주화입마가 와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
하지만 기운을 통제하는 마음의 단단함에 있어서 운호는 천하에 둘째가라면 서러운 인물이었다. 또한 운호가 익힌 포원공은 천하에서 가장 안정적인 공부 중 하나였다.
설명은 길었으나 여기까지 걸린 시간은 눈 한 번 깜짝할 시간.
보통 사람에게는 찰나나 다름없는 시간이었으나, 초절정 고수인 주고후에게는 힘을 모으고 크게 휘두르기 딱 좋은 시간이었다.
무형검강이라 이름 붙었지만, 하얀색의 존재감을 또렷하게 빛내는 그것이 운호를 향해 쇄도했다.
만승지검(萬乘之劍).
오직 군림하기 위해 태어난 천자의 검 그대로.
운호가 움직였다.
3년 전 운호는 검왕의 반고검을 보고 무형검을 유추했었다. 그리고 그의 재능을 생각했을 때 3년이라는 세월은 그것을 연마하고 숙성하기에 충분히 긴 시간이었다.
형태를 갖추지 않은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그가 배우고 익혔던 모든 형태를 갖춘 검
이것이 증무진인 목운평이 재정립했던 여섯 번째 검술 무형검일까? 확신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쾅!!!
그것은 오직 지금 휘두른 이 일검 만이 몽원경에 사는 그 금강불괴 괴물의 질긴 피륙을 가르고 그 단단한 뼈를 바술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