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화
다시 화산으로(9)
“정답이라고 했던가? 바른 답이라······. 참으로 좋은 이름이다. 하지만 그 이름과 달리 이 검에는 너무 많은 자율성이 허락되어 있구나. 이렇게 중구난방의 선택권이 주어진다면 오답이 나올 확률도 그만큼 커지는 법이지.”
공두베가 처음 정답을 손에 쥐고 했던 말이었다.
“아, 아니. 아닌가? 이 검의 크기는 실로 대단하구나. 이것도 한번 망가졌던 것을 기워놓았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어쩌면 이 정답이라는 검. 정말 신(神)을 담았던 검인지도 모르겠다. 뭐, 그렇다면 이 자율성도 어느 정도 이해는 된다. 신의 선택이라면 인간의 선택보다 훨씬 정답에 가까웠겠지. 하지만 지금 이건 마치 개발에 편자와 같다.”
-뭐라고? 이 영감이 감히? 내가 누군줄 알고!! 개발이라니!!
“네 녀석을 폄훼하는 게 아니다. 애당초 인간의 백에 불과한 네가 여기를 차지하고 이만큼이나 움직이고 있는 것 자체가 대단한 것이다. 뭐, 그것도 생전의 네가 우화등선을 목전에 뒀던 인간이었으니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목전이라니!!
엄밀히 말하자면 파검은 우화등선을 목전에 뒀던 것이 아니라 우화등선을 해낸 것이었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 공두베는 조금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
“글쎄다. 나는 우화등선이라는 것 자체가 육과 백을 벗어던진 이후에 이뤄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네 녀석의 기억이 결락된 시점을 보아하니 내 생각에 더욱 확신이 드는구나. 그리고 그 말인즉 결국 파검이라는 인간은 우화등선을 이룩했지만, 그 찌꺼기인 네 놈은 이야기가 다르다는 말이지. 만약 정말로 우화등선을 한 선인이라면 본래 이 검에 담겨있던 신(神)과 비교해도 격이 떨어지지 않았을 터. 그랬더라면 내가 이렇게 고생할 이유도 없었겠지. 안 그러냐?”
-끄응······.
인간은 무한한 가능성을 갖지만, 그렇기에 대부분이 아무것도 해보지 못하고 죽어버린다. 물론 그래도 괜찮다. 수억, 수십억의 가능성이 있다면 그 가운데 하나 정도는 무언가를 이룩하니까.
하지만 신검은 다르다. 수억, 수십억의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는 대신, 인간이 창조해내는 그것은 명확한 목적성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제한을 통하여 효율을 높일 수 있다. 그렇기에 공두벤ㄴ 자유를 억제하고 선택지를 줄이는 선택지를 골랐다.
그리하여 지난한 과정 속에서 일 년을 이야기했던 시간은 이 년을 넘어 삼 년에 육박할 만큼 길어졌다.
-이건······.
“이전보다는 많이 어려울 거다. 하지만 운호 저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이제 너의 경험이나 지혜가 아니야. 오히려 그런 쪽은 저 녀석이 훨씬 훌륭하지. 도구는 주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제공해야 하는 법이다.”
-빌어먹······을.
“물론 네 녀석은 조금 불가사의한 구석이 있긴 하다. 분명 영혼이 없는 인간의 백은 그저 소모될 뿐, 자체적인 영성이 없어야 하는데, 넌 이상하게 ‘변화’한단 말이지. 뭐, 그게 초절정 고수의 백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우화등선 직전까지 갔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재료가 워낙에 대단했던 탓에 그저 제한됐을 뿐, 용량 자체는 아직 남아있으니 어디 한 번 열심히 노력해봐라. 이전과 같은 자유를 얻을 수 있을 때까지. 혹시 모르지. 네 녀석의 본체가 우화등선을 했던 것처럼 언젠가 네 녀석도 요선(妖仙)같은 걸로 등선할 수 있을지. 만약 그렇게 된다면 너는 선검(仙劍)이 되는 거냐? 아니면 검선(劍仙)이 되는 거냐?”
-이런 망할······.
***
조왕 주고수는 화산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두 도사의 기운이 점점 더 강성해지는 것을 느꼈다. 과연······. 이런 명산에 근거지를 둔 정파의 장점이다.
‘물론 그게 항상 장점일 수는 없지만.’
명산의 영험함에 기대 수련을 할 경우 수련의 효율이 증가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지금 저 도사들을 보면 알 수 있듯 그 산에 기대 싸울 때 훨씬 강한 힘도 발휘할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커다란 약점이 될 때가 있다.
산에서 수십 년을 수행한 도사가 속세에 나와 얼치기에게 한순간에 당해버린 이야기는 너무 흔해서 이제는 이야깃거리도 되지 못한다.
당연한 일이다. 자신이 수련했던 산에서 발휘하던 힘이 십이었다면 속세에서 사용할 수 있는 힘의 크기는 불과 칠 정도에 불과하다. 덕분에 그 힘의 간극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고수는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쉽게 당하곤 한다.
그리고 그것은 아무리 적응을 했다고 해도, 아무리 경지가 높아진다고 해도 손바닥을 뒤집는 것처럼 손쉽게 전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이런 장파의 고수들은 자기 본거지에서 싸울 때야말로 진정으로 무서운 상대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지금이라면 어쩌면 저 청허라는 도사도, 현무라는 도사도 이전처럼 손쉽게 상대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우우웅
허리에 맨 신검이 검명을 터트렸다.
그래, 녀석도 기대가 되는 것이겠지. 어떻게 보자면 자신의 형제를 만나는 것일 테니까. 공두베. 그 음흉한 늙은이. 이제는 더 이상 신검을 벼려낼 수 없다고 그렇게 뻗댄 주제에······.
저 앞으로 이십 장쯤 되는 절벽이 보였다.
가슴 깊숙하게 호흡을 들이켰다.
가파른 절벽을 마치 평지를 밟는 것처럼 성큼성큼 밟고 뛰어 오른다.
보통 사람이라면 한참을 돌아가야 하는 장애물도 그저 몇 번의 걸음으로 뛰어넘을 수 있는 장애물에 불과했다.
그야말로 뛰는 것보다 나는 것에 더 가까운 움직임. 그들 모두가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고수들이기에 보여줄 수 있는 움직임이었다. 그렇게 마차를 타고는 이틀을 걸릴 거리를 한 시진도 채 되지 않은 시간 만에 주파했다.
그리고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주고수는 전신이 저릿해진다는 단어가 뜻하는 바를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함께하는 두 초절정 고수의 기운이 점점 커졌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이것은 그저 이 자리에 저 남자가 서있기 때문이다.
저 두 도사와 흡사했지만, 확실히 달랐다. 저 두 도사가 촛불이라면 저 기운은 횃불이며 저 두 도사가 별빛이라면 저 기운은 달빛이다.
과연 이래서야 초절정의 고수가 스스로 격이 다르다. 라고 말한 것을 납득할 수밖에 없다.
구장에 가까운 거대한 덩치.
그리고 그 덩치에 걸맞은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주고수의 귀를 두들겼다.
“설마 본파를 방문해주신 분이 왕야이실 줄이야. 미리 마중나가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니다. 본왕은 결코 인간의 무지를 탓하지 않는다. 그대가 중원에 명성이 자자한 권신인가?”
“부끄럽습니다만, 강호의 동도들이 그렇게 불러주고 있습니다.”
권신 청무진인.
주고수는 확신했다.
적어도 이 화산에서라면 저 남자는 아마 천하제일에 가장 가까울 것이다.
“그래 좋다. 인사치레는 생략하자. 저 도사들은 나에게 격이 다른 상대를 체험하게 해주겠다 말했다. 과연 그대를 보니 그 말이 단순한 허풍은 아니었던 듯싶다. 참으로 다행이다. 본왕은 오래 전부터 그런 상대를 찾아왔으니까. 그러니 그대는 최선을 다하도록 하라.”
조왕 주고수가 자신의 검을 뽑아들었다. 직전 청허를 상대할 때와는 달랐다. 처음부터 최선을 다하겠다!!
“두베!!”
주고수의 외침에 따라 청녹색과 적금색의 기운이 검을 타고 동시에 피어올랐다. 그리하여 그 빛깔의 교차에서 피어나는 하얀 빛의 별무리.
청허의 절기를 박살내고 현무를 몰아붙이던 그 검강이었다.
“문시진인, 문시진인. 참으로 범상치 않은 검입니다.”
“검을 보는 눈도 제법이로구나.”
“그럴리가요. 빈도는 평생 이 몸뚱이만 단련을 해온 터라, 사실 검을 보는 눈 같은 건 전혀 없습니다. 다만 기억에 있는 검이라서요. 게다가 근래에는 우연히 그와 흡사한 검도 봤지요. 제 생각에는 왕야께서도 그 검에 관심이 있으실 것 같은데 안 그렇습니까?”
“글쎄,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지금 나의 관심은 도사. 너에게 쏠린 것 같구나.”
문답무용.
하얀빛으로 백열하는 찬란한 별무리가 청무를 향해 나아갔다.
청무진인이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래, 그저 그뿐이었다.
그리하여 주고수가 정신을 차렸을 때.
그의 몸은 어느새 청무의 반대편에 서 있었다. 물론 그의 몸에는 아무런 상처도 없었으며 아무런 피해도 없었다. 바뀐 것은 그저 두 사람의 자리뿐이었다.
“허어, 참으로 대단한 무공이십니다.”
청무가 자신의 오른손을 들어 보였다.
희미한 붉은 자국.
세상에 파괴하지 못하는 것이 없던 그의 무형검강을 맨손으로 받아낸 대가치고는 너무 저렴하다.
“하지만 아직 완성도가 많이 부족하신 듯합니다. 분명 태조 황제 폐하의 그것은 빛도 색도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아 천하에 베지 못하는 것이 없는 절기였는데 말이죠.”
완성도라는 말에서 분노하려던 주고수가 이어지는 말에 깜작 놀랐다.
“네······, 네가 어찌!!”
“오래전 태조 황제께서는 저희 사조님과 한 차례 무공을 겨루신 적이 있었습니다.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참으로 공천 절후의 대격전이었지요.”
“할바마마께서?”
“그런 의미에서 빈도가 생각하기에 지금 전하께 필요한 것은 아무래도 빈도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운호야.”
밤하늘에 아무리 뚜렷한 존재감을 발휘하는 별빛이라도 태양 옆에서는 그 빛을 잃는다. 저 아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청무라는 압도적인 존재의 옆에 있었기에 그 존재감이 완벽하게 가려져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가 한 걸음을 걸어 나오는 순간.
조왕 주고수는 깨달았다. 저 아이야말로 자신이 화산에 찾아 온 이유라는 것을.
“화산 삼대제자 백운호라고 합니다.”
운호의 등에 매여있던 검이 스르륵 뽑혀 날아와 그의 오른손에 안착했다.
-우우웅
-우우웅
주고수와 백운호.
두 사람의 손에 들린 두 개의 검이 검명을 토해냈다.
조왕 주고수의 시선이 운호가 들고 있는 검에 못 박혔다. 자신이 들고 있는 황룡검과 참으로 닮았다. 아니, 어쩌면 눈썰미가 부족한 이라면 똑같다고 말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오랜 시간 황룡검과 함께 해왔기에 알 수 있었다. 전체적인 형상은 흡사하지만 아주 미세하게 다르다. 두께, 길이, 폭. 그 모든 것들이.
“이름은?”
“파(波)입니다.”
“파(波)라······. 그 영감탱이가 만든 검치고는 이름이 참으로 좋구나. 이 아이는 황룡이라고 한다.”
-우우웅
황룡검이 낮게 떨렸다.
그 검명을 들은 파검이 코웃음을 쳤다. 개조한 이후 말하는 것 자체가 제법 힘들다고 투덜대면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것이 과연 파검답다.
-황룡은 개······뿔.
“공두베 그 작자. 그저 운이었다고. 다시는 해내지 못할 거라고 그러더니. 결국, 다 핑계였구나.”
“글쎄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핑계였을 수도.
아니면 진심이었을지도 모른다. 분명, 이 검은 공두베가 벼려낸 것이 아닌 그저 정답의 핵을 이식한 것에 불과했으니까.
하지만 지금 그것을 따지는 것이 무에 중요할까.
“그래, 지금 그것이 뭐 그리 중요할까. 그러면 어디 네 사조의 말처럼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이 너인지나 한 번 살펴보자꾸나.”
새하얗게 백열 하는 검강이 공간을 지우며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에 맞춰 운호의 검 역시 움직였다.
마치 지금 자신이 밟고 선 화산과도 같은 모습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