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화
다시 화산으로(7)
제국의 창업 군주인 주팔은 소작농의 자식으로 한때는 길거리의 비렁뱅이나 다름없는 삶을 살았다.
그가 처음 무공을 접한 것은 17세. 일반적으로 봤을 때, 무공을 익히기에는 너무 늦은 나이였다. 하지만 그에게는 하늘이 내린 재능이 있었고 또한 놀라운 기연들이 이어졌다. 그 결과 그는 결국 마지막 대전 직전에 초절정의 경지에 올라 파양호에서 진우량을 꺾고 제국의 황제에 즉위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놀라운 무공에 대한 재능은 그의 넷째 아들인 주체에게 이어졌고 그가 바로 조카를 몰아내고 황제의 자리에 오른 태종 영락제다.
조왕 주고수는 영락제의 삼남으로 주씨 가문 무공의 재능을 물려받은 남자였다. 물론 주고수에게는 그의 할아버지나 아버지 때와 같은 기연은 없었다, 하지만 태어나는 순간부터 황제의 손자였으며, 또한 황제의 아들로 자라났다는 것 자체가 그들이 얻은 기연 이상의 기연이라고 볼 수 있었다.
초절정의 경지에 올랐던 그의 아버지는 병약했던 조카를 죽이고 황위에 올랐다. 그렇기에 주고수의 형은 자신의 동생을 경계할 법도 했지만, 주고수는 진심으로 황위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물론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있다.
그렇기에 주고후는 더욱 더 자신을 낮췄다. 자신이 가진 많은 것을 내주었으며 주변으로 사람을 두지 않았다. 형의 뒤를 이어 조카가 황위에 즉위한 이후로는 더더욱 그리 행동했다. 심지어 황제가 황실수호검의 사용에 사전 허가를 득하도록 명하였음에도 그것조차도 따랐다.
영락제는 종종 그에게 이런 말을 했다.
“아버지는 참으로 욕심이 많았다. 하지만 그래서였을까? 항상 나에게 자신이 가보지 못했던 길에 대하여 이야기 하곤 하셨다. 그저 북방의 연왕으로써 살았다면 어떠했을까? 차라리 무공의 끝을 보았더라면 어떠했을까? 그도 아니라면 저 북쪽 달자들을 모조리 쓸어내고 새로운 제국을 만들었다면 그 또한 어떠했을까?”
그리고 태종 영락제의 그런 후회들을 듣고 자란 그는 그 가운데 한 가지. 무공의 끝이라는 길에 초점을 맞췄다.
그렇기에 오직 평생을 무공 연마에 힘썼으며 마침내 초절정의 경지에 이르렀다. 초절정에 오르기 전까지는 괜찮았다. 그가 전력을 다하여도 여유롭게 받아줄 상대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경지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그런 상대는 점점 드물어져 갔다. 그에 따라 갈증은 점점 커졌지만 조왕이라는 신분은 항상 그를 제약했다.
그렇기에 그는 지금 이 상황이 너무나도 기꺼웠다.
십이지신에 필적하는 고수가 무려 둘. 바라 마지않던 상황이다.
청허와 현무.
두 초절정 고수가 그를 보고 낮게 신음했다.
주고수가 마차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고 싶어지는 강력한 압박감이 그들을 덮쳐왔다.
태조 홍무제와도, 태종 영락제와도 다르다.
그들은 창업 군주였다. 스스로가 거친 광야를 누비며 자신들의 손으로 무언가를 쟁취해내는 기상이 있었다. 하지만 주고수는 달랐다.
그는 굳이 무언가를 쟁취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가장 존귀한 사람이었고 그것은 그에게 너무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군주의 위엄.
타고난 지배자의 품격.
청허와 현무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감히!!”
다시 한 번 크게 기세를 일으키는 주고수에게 청허가 말했다.
“송의 태조께서 본문의 진 단 노조와 교분을 나누시고 이후 화산의 도사들에게는 속세의 관인에 준하는 지위를 허한다 하셨으니, 이후 화산의 도사들은 황상께 알현하더라도 무릎을 꿇지 않는 것이 법입니다. 헌데 조왕께서는 저희를 무릎 꿇리려 하시니, 혹시 왕야께서는 스스로를 황상보다 존귀하다고 생각하시는지요.”
“······.”
한순간 주고수의 말문이 막혔다.
슬쩍 시비를 걸어보려던 것을 이렇게까지 말로 잘 막아낼 줄이야.
하지만 이왕 이렇게 된 것 억지를 한번 더 부려보기로 결심했다.
“크흠, 본 왕이 평생을 무공 단련에만 힘썼던지라 그런 사정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더라도 너희 강호의 족속들은 강자지존이라 하여 약자가 강자에게 굽히는 것을 당연시 여긴다고 들었다. 그렇다면 너희는 지금 본왕에게 허리를 굽히는 것이 당연하지 않으냐.”
“왕야, 그런 야만은 법도가 없는 저자의 이야기인 법입니다. 강호라고 하여 어찌 법이 없겠습니까.”
주고수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많이 치졸하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온 이상 치졸해지더라도 손은 섞어봐야겠다.
“허면 너는 지금 본왕이 이것도 저것도 아무것도 모르는 무식쟁이라는 이야기로구나!!”
“아······, 아니. 그것이 아니오라.”
“그래!! 내가 모르던 것들을 참으로 많이 알려주다니 참으로 고맙다. 송 태조께서 너희의 지위를 인정하셨다니. 본왕도 그것을 인정하겠다. 관부의 고관들과 동등한 대우를 해주겠다. 최효!! 내가 왕부 무관들에게 상을 내릴 때 어찌 하느냐.”
“무관들에게 가장 큰 포상은 왕야의 하늘에 닿은 무공을 직접 체험해볼 기회를 주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들었느냐?”
최효가 주고수의 마음을 읽었다.
물론 이 자리에서 주고수의 마음을 읽은 것은 최효만이 아니었다.
‘이제 어쩔 수 없겠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무래도 단단히 작정을 한 것 같으니 여기서 한바탕 손을 섞어야 할 것 같구나.’
‘허면 제자가 나서도록 하겠습니다.’
‘아니다. 단순히 싸워 이기는 것이라면 너로 충분하겠으나 상대는 당금 황제의 삼촌이다. 다치지 않게 제압하자면 내가 나서는 것이 옳겠구나.’
청허 진인이 한 걸음 슬쩍 앞으로 나섰다.
“지금 뭐 하는 짓이지?”
“왕야께서 크게 은혜를 베푸시니 노도가 그 은혜를 체험해보고자 합니다.”
“헛소리!! 본 왕의 은혜는 크고 넓으니 당장 둘 다 나서도록 해라.”
-꿈틀
현무의 미간이 크게 움직였다. 청허가 한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무작정 달려드는 것보다 때로는 지켜보는 것이 더 큰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제 사질은 아직 경지에 오른지 얼마 되지 않아 경지에 든 이들 간의 싸움에 익숙하지 않으니 일단은 지켜보게 하시지요.”
“사질이라고?”
기껏해야 열 살 내외.
나이 차이가 조금 나는 사형제 정도로 보이는 두 사람의 관계가 사숙과 사질 관계라니. 저 뺀질뺀질하게 말 잘하는 도사의 경지가 생각보다 높은 것일까?
여전히 두 사람을 모두 한 번에 상대해보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하지만 뭐 그래, 괜찮다. 저 사내가 사숙이라는데, 설마 사숙이 위기에 몰리면 알아서 나서겠지.
“최효. 내 검을.”
화려함의 극치.
조왕 주고수가 금과 각종 보석으로 장식된 검집에서 한 자루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문답무용.
날카로운 칼날이 공기를 가른다. 어느새 칼날에는 별빛이 맺혀있었다.
-타악
하지만 청허 역시 당황한 기색 따윈 보이지 않았다. 그의 손바닥이 자연스럽게 그 칼날을 쳐냈다. 그의 손바닥에 어린 자색의 서기가 저 초월적인 별빛으로부터 그의 피륙을 보호했다.
청허진인이 자하신공 팔단공을 완성한 것이 벌써 십팔년 전 일이다. 그 긴 시간동안 그는 꽉 막혀있는 그 구단공의 문을 넘어서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수련을 소홀하게 한 일은 한 번도 없었다. 그렇기에 지금 청허의 몸에 쌓인 진기의 크기는 이갑자를 넘어 인간의 한계라는 삼갑자에 근접했다.
그리고 지금 그 막대한 진기가, 유형화된 자색의 기운이 그의 일수 일수를 마다 뿜어나왔다.
-콰과과과광!!
주고수의 검이 그것을 잘라냈다.
그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맺혔다.
즐겁다.
이 도인은 생긴 것이나 말하는 것은 뺀질거리는 문사 나부랭이를 닮았으면서 펼쳐내는 무공은 호쾌하기 짝이 없다.
그래, 응당 사내의 싸움이라면 이러해야지.
태조 주원장이 처음 무공을 접한 곳은 황각사라는 작은 절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탁발을 위한 기초적인 무공을 배웠는데 그것은 삼류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 뿌리는 칠십이종절예 중 하나인 위타복마검(韋陀伏魔劍)이었다. 그리고 그는 제국 말기, 반란군 세력에 합류하여 수많은 전투를 통하여 자신의 무공을 발전시켜나갔다.
만승지검(萬乘之劍)
파양호의 대전투에서 완성시킨 그 검술을 주원장은 만승의 검이라 칭했다.
만승.
즉 천자다.
실로 광오한 이름이었으나 천하에 그것이 광오하다 할만한 사람은 이제 없었다. 진우량이 패퇴한 이상 천하에 감히 천자를 자처할만한 이는 오직 그뿐이었으니까.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천하를 통일했던 태조황제의 그 검술이 조왕 주고후의 손에서 펼쳐졌다.
소림에 뿌리를 두고, 전장의 싸움을 통해 완성된 검술이다.
투박했으며 실전적이었다.
-쾅!!
하지만 그 일검 일검에 실린 힘은 그야말로 번천지복.
무려 삼갑자의 내가진기를 가진 청허진인의 손바닥이 크게 흔들렸다. 이건 숫제 검이 아니라 철퇴와 같다. 심지어 강철을 아무렇지 않게 베어낼 만큼 날카로움까지 겸비한 철퇴다.
그 공격이 연달아 날카롭게 들어왔다.
버텨낼 수 있는 것을 넘어.
상대방을 배려해야 겠다는 생각을 넘어.
그 상대를 상하게 만들면 안된다는 생각조차 떨쳐버려야만 견뎌낼 수 있는 위력까지.
청허가 이를 악물었다.
다시 말하지만 그가 자하기공의 팔단공을 완성한 것이 무려 십팔 년 전 일이다. 은퇴하여 운대봉에 은거한 기간 역시 십오 년에 가깝다.
지난번 무한 혈사 당시 목숨을 잃은 청공과 청우도 그 나름의 방식으로 팔단공을 뚫기위해 노력했었다. 심지어 청허에게는 그 이후로 팔 년이라는 시간이 더 있었으며, 평생을 함께 했던 사형들의 죽음이라는 거대한 비극도 있었다.
힘을 쌓는 것과 그것을 활용하는 것은 엄연히 다른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운장은 단순하지만 자하신공의 내기를 발출하기에 가장 적합한 장법이다.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일정 수준까지다.
아마 청공과 청우의 그 비극적인 죽음이 없었더라면 청허는 굳이 이런 것을 만드는데 이리 큰 공을 쏟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초절정의 고수조차 항거하기 힘든 강력한 적수의 존재를 알게 됐고 그 당시 싸움에서 도움이 됐던 것은 무신과 파검. 그리고 걸왕 정도라는 것을 인지했다.
무신과 파검.
모두 그의 사형인 청무에 가까운 고수들이다. 그 말인즉 그들만큼 강해지기 위해서는 결국 자하기공 구단공에 접어들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라면 근 이십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지금 경지에 머물러 있을리 만무하다.
결국, 그가 눈을 돌린 것은 걸왕 소진평.
소진평은 어떻게 다른 초절정 고수들과 달리 그 싸움에 커다란 보탬이 됐는가? 답은 간단했다.
항룡십팔장(亢龍十八掌)
항룡유회(亢龍有悔)
보통의 사람은 자신의 힘을 단박에 모조리 뿜어낼 수 없다. 한계에 가까운 것을 들었다고 해도 숨 한 번 내쉬면 그보다 조금 가벼운 것 정도는 얼마든지 들 수 있는 것이 사람이다.
그리고 그것은 무인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항룡유회는 조금 다르다. 그것은 그런 상식을 완벽히 벗어난다.
무려 삼갑자.
그 터무니 없는 내공을 오직 일점에 쏟아낼 수 있게 만든다.
자운장(紫雲掌)
불망우공(不忘雨空)
삼갑자에 가까운 거력이 일순간 폭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