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다시 화산으로(5)
“퉷, 하여간 이래서 시골은.”
화려한 전각.
사내가 접시에 담긴 음식을 한 입 씹더니 그대로 뱉어냈다.
“죄······, 죄송합니다!! 인근에서는 그래도 가장 유명한 숙수라고 했는데. 제가 당장 가서 경을 치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됐다. 이게 멍청하게 오숙수를 데리고 오지 않은 네놈 잘못이지 어디 무능한 그 촌구석 숙수 잘못이겠느냐. 또한 본왕은 멍청함이나 무능을 빌미로 누군가를 핍박하지 않는다.”
“죄······, 죄송합니다.”
“그나저나 화산까진 대체 얼마나 남은 것이냐.”
“그것이 길이 조금 협소하여 마차가 지나기 어려움이 있어 인근 마을 사람들을 동원해 보수공사를 진행 시키고 있으니 앞으로 이틀 정도면······.”
“그래, 인부들에게 삯은 넉넉히 잘 쳐주도록 하거라.”
“네!! 명심하겠습니다.”
조왕 주고수.
북경을 출발하여 현재까지 삼 주.
그의 팔두마차는 아직 화산에 도착하지 못했다.
***
운호가 장문인실의 문을 열었다.
늙음이란 무엇인가.
단단한 근육이 사라지고, 그렇기에 근육이 지탱해주던 몸의 형상이 무너진다. 평생동안 사용해온 관절과 연골은 더이상 재생되지 않으며 시각, 청각, 후각, 촉각, 미각의 오감 역시 둔해진다. 평생을 단련해온 무인의 예민한 반응속도가 느려지고 사고의 속도마저도 감소한다.
자하기공은 불로의 무공이며 그렇기에 신공이라 불린다.
또한 그러하기에 자하신공은 화산파 힘의 원동력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인간의 한계에 도달한 절정의 고수라고 한들 늙는 것은 마찬가지다. 당장 공야찬만 보더라도 쉰 살을 넘어 환갑에 가까워지자 노화가 확연히 눈에 띄게 찾아오지 않았던가. 하지만 자하기공을 익힌 무인들은 다르다. 그 성취에 따라 차이가 있긴 하지만, 절정의 경지에 오른 무인의 경우 평균 10년에서 많게는 20년까지도 노화 속도에서 차이를 보인다.
그래, 그래야만 했다.
하지만 대 화산파의 장문인.
굉허진인 경원탁은 달랐다.
“왔느냐.”
장문인실에는 누가 봐도 살날보다는 죽을 날이 가까워 보이는 노인이 고아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못 본 사이 몰라볼 만큼 달라졌구나. 참으로 대견하다.”
검왕 남궁벽과의 싸움 이후 이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그 싸움에서 크게 야위었던 운호의 몸은 그 이후로 조금씩 더 야위어 이제는 불면 날아갈 것 같은 형상을 띄고 있었다. 하지만 장문인의 모습은 그것과는 또 달랐다.
운호는 야위었지만 단단했다. 마치 목재에 수분이 점점 빠지며 단단해진것과 같은 형상이라고 볼 수 있었다. 반면 장문인의 야윔은 허물어져 가는 초가집의 그것과도 같았다. 가장 결정적인 부분은 등이 굽었다는 점이었다. 나이를 먹으면 뼈가 약해지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허리까지 저렇게 굽었다는 것은 그렇게 약해진 뼈를 지지해줄 몸의 중심 근육조차 망가지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이건 건물로 치자면 대들보가 주저앉은 셈이다. 아무리 일흔을 넘어 여든을 향해가는 나이라고 해도 무인에게는 쉽게 보기 힘든 현상이다.
“당황할 필요 없다. 젊었을 때 상처를 제대로 수습하지 못했던 것뿐이다. 그래도 참으로 다행이로구나. 현무도 그렇고, 운호 너도 그렇고. 참으로 다행이야.”
깊어진 내가기공은 분명 절정 고수의 경계를 넘어서 있었다. 어쩌면 진기의 양만 따지자면 초절정의 경지에 오른 운호보다 더 많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일초 반식이나 필요할까. 운호는 항간에 떠도는 화산파 일대 제자들의 은퇴 소식이 정말 현실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운호야.”
“네.”
“과거를 생각하자면 참으로 면목 없는 이야기다. 하지만 나는 네가 화산을 미워하진 말았으면 좋겠구나. 무언가를 미워해야 한다면 그저 잘못된 선택을 내렸던 우리만 미워해다오. 아니, 아니다. 미움도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이들에게 해야 하는 법이다. 다 지나가 버린 이 쪼그라든 뒷방 늙은이들에게 너의 마음을 굳이 낭비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그러니 부디 부탁하건대 그저 나아가거라.”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 이런 것일까? 아니, 늙는다는 것이 이런 것일까?
물론 장문인은 굉자배 가운데서도 그나마 운호에게 호의적인 사람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런 말이라니······. 주변에 아무도 없는 오직 둘만의 대화라고 해도 이건 실로 굴욕적인 패배 선언이다.
장문인의 방에서 나온 운호를 맞이한 것은 굉자배. 화산 일대 제자들의 뜨거운 시선이었다. 그 가운데는 질투에 가득 찬 눈빛도 있었고, 경이로운 무언가를 바라보는 눈빛도 있었으며, 여전히 적대심에 가득찬 눈빛도 있었다.
참으로 하찮았다.
그들 사이에 아현이가 조금 곤란한 표정을 한 채 서 있었다.
아마 운호가 장문인과 대화를 나누는 사이 이래저래 상당히 시달린 모양이었다.
운호가 그들에게 한 걸음을 다가섰다.
굳이 기세를 피워올리지는 않았다. 굉허진인의 부탁 때문은 아니었다. 운호는 진정으로 저들이 하찮다고 느껴졌다. 자신도 모르게 느낀 그 감정에 운호가 화들짝 놀랐다. 어찌 됐건 사문의 어른들이거늘 하찮다니.
그들 가운데 가장 거대한 덩치의 노인.
외당주 굉명과 함께 굉자배의 수위를 다퉜던 굉원이 운호에게 다가왔다. 아주 오래 전 운호와 악연으로 얽혔던 장광 녀석의 사조였다.
“장문 사형과는 이야기를 잘 나누었느냐.”
“네.”
“그래······. 얼굴을 보기 전에는 참으로 나누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이렇게 얼굴을 맞대고 있으니 할 말이 없구나······. 허허. 초절정이라니······. 허허허······.”
일흔이 훌쩍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옷 밖으로 드러나는 굳건한 육체는 그가 얼마나 높은 경지까지 무공을 연마했으며, 그 타고난 체질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증명했다. 하지만 단지 그뿐이다. 외공을 위주로 익힌 무인이 일흔이 넘을 때까지 경지를 넘어서지 못했다는 것은 앞으로도 그럴 확률이 전무하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오히려 지금까지 절정의 무위를 유지한다는 것이 대단할 지경이다.
그와는 반대로 아직까지 일말의 희망이 남은 굉자배들이 있었다. 여전히 오십 대 후반 정도로밖에는 보이지 않는 도사들. 자하기공을 칠단공까지 수련해낸 이들이었다. 외당주인 굉명 진인을 필두로 하는 일곱 명의 도사들. 그들은 아직까지 기량의 쇠퇴를 경험하고 있지 않는 이들이었다.
하지만 우습게도 그렇기에 더 확실하게 엿볼 수 있었다. 저 야윈 몸속에 갈무리된 무진장의 거력을.
‘현무 이상······.’
‘거의 청허 사숙에 근접한······.’
‘저것이 검종······.’
당장 현무만 하더라도 청무를 제외한 나머지 청자배보다 오히려 몇 년 빠르게 초절정에 오른 대단한 성취였다. 오십대 초반에 초절정의 경지는 어디에 내놔도 부끄럽지 않은 대단한 성취였으니까. 팔 년이나 지났음에도 여전히 왈가왈부 말이 많은 천무십칠성의 한 자리에는 충분히 이름을 올릴 수 있을 만한 성취다.
하지만 운호의 나이는 고작 이십 대에 불과하다. 그런 현무자의 성취조차 부끄럽게 만드는 터무니 없는 성취다. 달마가 진기도인법을 중원에 전한 이래 이러한 속도로 성취를 이룬 이가 과연 또 있었던가?
백운진인은 검종이 보여주는 달콤함을 경계하라고 했었다.
그들은 그것이 조금 과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저 사조님의 유훈이라는 생각에 충실하게 따라왔다. 하지만 이건 그 정도 수준이 아니다.
당장 운호를 제외하고 검종의 무공을 가장 높은 수준으로 수학한 현종자를 보라. 이제 고작 쉰을 조금 넘긴 나이에 하루하루 무공이 쇠퇴하고 있다. 심지어 그 무공의 쇠퇴가 아닌 정체부터 따지자면 십 년에 가깝다. 즉 검종의 무공으로 초절정에 오르자면 사십 대 즈음에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는 뜻이다. 터무니없는 소리다.
천고의 재능을 지닌 현무가 천하제일의 기공을 익히고, 문파의 끝없는 지원을 받아 초절정에 오른 것이 오십 대 초반이다. 헌데 사십 대에 초절정의 경지라니. 대체 천하에 그런 재능을 지닌 이가 몇이나 된단 말이던가.
“그래, 이제 어디를 갈 생각이냐.”
“청무 사조님께서 장문인께 들른 뒤, 한번 찾아오라고 하셨습니다.”
“청무 사백님께서? 직접? 대체 언제 말이냐?”
“오늘 아침, 화산으로 오는 길에 직접 찾아오셨었습니다.”
“그랬구나······.”
운호에게 다가가려던 굉명이 걸음을 멈췄다. 사문의 가장 큰 어른이 불렀다는데 그것을 방해할 수는 없다.
“그러면 얼른 가보도록 해라. 아, 그러고 보니.”
“네?”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굉원이 고개를 저었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던 것일까? 그 의문은 그리 길게 가지 않았다.
화산 운대봉으로 가는 길.
워낙에 거대한 힘의 덩어리가 존재했기에 상대적으로 다른 기운들이 감춰져있었는데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운호의 기감에 거대한 기운들이 하나하나 또렷하게 느껴졌다. 하나하나가 화산의 정기를 온몸에 품고 있는 거대한 기운의 덩어리들이다.
‘셋?’
청무와 청허.
나머지 하나가 누구인지가 궁금한 것은 아니었다.
뻔한 이야기다.
현무자.
최근 자하기공 팔단공을 이룩한 현자배 최고 고수.
궁금한 것은 그가 왜 저기에 함께 있느냐는 점이었다.
그들의 기운이 크게 일렁였다.
마치 운호에게 어서 뛰어오지 않고 뭐하냐 재촉하는 것 같다.
운호가 크게 한 걸음을 옮겼다.
부운약표.
사실 그가 주로 사용하는 부운약표는 경신법이라기보다는 보신경이다. 게다가 초절정의 고수치고 운호의 경신 재간은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초절정 고수치고는 이다.
한순간에 운호의 몸이 쭉쭉 뻗어나갔다.
과연 화산이다.
운호가 익힌 포원공은 화산의 정기를 크게 따지지 않는 공부다. 하지만 부운약표는 조금 달랐다. 화산의 지기가 그의 용천혈을 타고 오른다. 또한, 부운약표의 보신경 자체가 화산의 돌산 달리기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딱 들어맞는다.
약간의 깨달음.
덕분에 운대봉 정상이 머지않은 곳에 위치한 전각에 오르기까지 불과 수십 걸음밖에 필요치 않았다.
“경신에 어려움이 많다고 하더니, 몸을 놀리는 것을 보니 꼭 그런것만은 아니로구나.”
“화산에 와서 화산의 것을 펼쳐서 그런 것 같습니다.”
운호의 말에 청무가 기분 좋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직 어린 나이이니 늙은이들에게는 당연한 것들도 너에게는 새로운 배움이 되겠지. 참으로 그 미래가 무궁무진하구나.”
“흥, 무궁무진은 무슨. 화산의 제자가 화산을 놔두고 나돌아 다녔으니 아직까지 몰랐던 것 아닙니까.”
“쯧쯧, 하여간. 아직도 그러는구나. 저 아이가 나돌아다닌 것이 무엇때문인지 잘 알면서. 운호야 신경 쓰지말거라. 본래 노인은 나이를 먹으면 고집을 부리기 마련이고, 그것은 자신이 틀렸음을 알았을 때 더 커진다. 도사라고 해도 도를 닦는 대신 무를 닦았으니 크게 다르지 않다. 아니, 평생을 경쟁으로 살아왔으니 그것은 더 크겠구나.”
“사형!!”
사조들의 그 다툼에 운호가 살짝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 사이, 그들의 뒤에 조용하게 서 있던 현무가 운호에게 인사했다.
“오래간만이로구나.”
“사숙을 뵙습니다.”
과연 자하신공이라고 해야할까?
현무는 팔년 전 화산파를 떠나기 전보다 오히려 더 팽팽한 얼굴이었다.
“자, 그러면 모일 사람은 다 모였으니 이제 이야기를 좀 시작해보자꾸나.”
“이야기라면?”
“너와 나, 걸왕 선배만이 공유하던 이야기. 그리고 걸왕 선배가 알아낸 마교의 대제사장에 관한 이야기다.”
“소 노사께서 뭔가를 알아냈다는 말씀이십니까?”
청무가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