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화
다시 화산으로(4)
“사부님!!”
팔척을 훌쩍 넘어가는 거대한 덩치. 하지만 그 덩치에는 어울리지 않는 제법 순박한 얼굴의 도사 하나가 모옥으로 뛰어왔다.
약 십여 년 전.
운호와 종화. 그리고 강아현이 함께 무공을 수련했던 바로 그 장소였다.
“이게 무슨 호들갑이냐. 내가 말하지 않았더냐. 언제나 몸가짐을 단정히 해야 한다고.”
초로의 도사.
이제는 머리에서 흑발을 찾아보기 힘들 만큼 늙어버린 공야찬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를 꾸짖었다.
“아이 참!! 사부님.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사형이!! 사형이 돌아왔습니다.”
“운호가?”
공야찬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디냐!?”
“지금 산문을 막 통과했다고 합니다.”
“그 아이가 드디어······.”
그 표정을 대체 뭐라고 말해야 할까? 그것은 적어도 지난 구 년. 장호가 처음 검술 총론 강의에서 공야찬을 만나고, 이후 그의 직계 제자로 들어와 함께 한 긴 세월 동안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부정과 긍정이 혼재된 그 얼굴.
공야찬이 뭐라 막 입을 열려는 찰나.
“사부님, 제자 돌아왔습니다.”
그보다 한 박자 빠르게 운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벌써!?”
장호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산문에서 연통이 올라왔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달려온 것인데 어떻게 이렇게 빠르게 도착한 것일까?
과연 초절정은 초절정인것인가?
물론 오해였다.
애당초 연통이 올라온 것을 장호가 곧바로 알아낸 것도 아니었고, 운호는 그저 아현이와 속도를 맞춰 적당한 속도로 이동했을 뿐이다. 마침 공야찬의 모옥은 홍매당이 위치한 옥녀봉 기슭에 있었기에 방향도 같았다.
“왔구나.”
팔 년.
매우 오래간만의 만남이었다.
물론 그 사이에도 서편을 몇 차례 주고 받긴 했지만, 이렇게 얼굴을 직접 보는 것은 또 느낌이 확연히 달랐다.
아주 오래전.
공야찬은 운호의 유일한 희망이었으며 거래의 대상이었고 동시에 큰 은혜를 베푼 은인이었다. 또한 그는 절정의 검객으로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위압감을 자랑하던 무인이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
“많이 변하셨네요.”
“너도 그렇게 변했으니 당연한 일이겠지.”
화산파 본산에 남을 수 있을까 걱정으로 벌벌 떨던 소년은 빠르게 자라 강호에 이름을 떨치는 초절정의 검객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시간은 모두에게 공정하게 흘러 야심만만하던 장년의 검객은 어느새 노인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쪼그라든 모습으로 변했다.
깊어진 내공 이상으로 줄어든 근육이 눈에 띄었다.
팽팽하던 얼굴은 주름이 가득했고, 희끄무레한 빛이 조금 감돌던 머리는, 이제 검은 빛을 찾아보기 힘들 만큼 하얗게 세어 있었다.
무엇보다 그 눈빛.
운호를 바라보는 그 눈빛에는 애정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무언가가 스며들어 있었다. 그것은 이전의 그를 생각해본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공야찬은 운호에게 표면적으로는 잘 대해줄지라도 그 내면에는 언제나 질투심을 가득 품고 있었다.
본래 그는 뒤틀린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글거리는 욕망을 감추고 억눌린 분노를 숨기고 그저 좋은 사람을 연기했었다. 물론 그 가면은 알만한 사람이라면 다 아는 얄팍한 가면에 불과했고, 심지어는 그 자신도 그것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끝까지 그것을 연기하려 애썼다. 그것은 일종의 강박이었으며 자기 세뇌였다.
자신을 숨기겠다는 생각. 혹시라도 그렇지 못한다면 검종을 경원시하는 본산에서 자신을 어떻게 할지 모른다는 불안감. 동시에 검종의 무공을 화산의 주류로 만들겠다는 야망. 그리고 그 모든 것의 해법이 자신이 인간을 초월한 경지에 오르는 데 있다는 강박까지.
하지만 지금 공야찬의 시선은 그와 조금 달랐다.
조금 더 침착했으며 조금 더 솔직했다. 사람이 변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하물며 그것이 마흔이 넘은 남자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저 남자를 저렇게 만든 것일까?
“사형!! 오래간만입니다.”
“이야기로 전해 들었다. 사부님의 두 번째 제자로 들어왔다면서.”
아주 오래 전.
백수한이라는 아이의 변호를 해주던 모습이 기억났다.
‘그야 친구니까요.’
인간이 인간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호의를 베풀 수 있음을 깨닫게 해준 녀석이었다. 덕분에 그의 인생에서도 아무런 조건 없이 호의를 베푼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도 깨달을 수 있었다.
참으로 재밌는 점은 이렇게 좋은 녀석이 그의 인생에서 아무 이유 없이 인간이 인간에게 악의를 품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었던 장광의 동생이라는 점이다.
그래, 어쩌면 저 공야찬이라는 사람을 저렇게 변화시킨 것은 이 녀석일지도 모르겠다.
“성취가 제법이구나.”
“부끄럽습니다. 사형은 고작 육 개월 만에 납매검의 오의를 얻으셨다고 들었는데······. 아, 사부님께서도 항상 사형 이야기를 하십니다.”
“사부님께서?”
공야찬이 슬쩍 시선을 피했다.
“네 사제도 납매검의 오의를 얻은 지 벌써 몇 달이 지났다. 이제는 매농검에 입문을 했는데 통 진도가 나가지 못하고 있구나. 네가 이렇게 왔으니 이 아이의 검술을 조금 봐주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말을 하는 공야찬의 얼굴이 조금 붉었다. 부끄러움이었다. 그는 여전히 매농검을 완벽하게 익혀내지 못했다. 이런 모습조차도 운호에게는 너무나도 새로웠다. 이전이었다면 훨씬 더 뻔뻔하게 이야기를 했을 텐데.
“시간을 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장문인께는 다녀온 것이냐?”
“아니요. 가장 먼저 사부님을 뵙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공야찬의 입꼬리가 씰룩인다.
뒤틀린 인간이던 시절부터 느꼈지만, 가면을 쓰고 살던 시절부터 참으로 표정이 솔직한 사람이다. 하지만 여전히 표정과 말은 따로 논다.
“물론 네가 이제 경지에 올라 여러 가지에서 자유롭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본문에 돌아왔으면 문파의 가장 큰 어른을 만나 뵙는 것이 우선이다. 얼른 장문인을 찾아뵙도록 해라.”
“네, 하지만 아현이도 홍매당을 먼저 올랐으니 내려오는 길에 여길 들를 겁니다. 함께 가도록 하겠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아현이 그 아이와 함께 돌아왔겠구나. 둘이 같이 강호를 떠돈 것이 4년쯤 되는 건가? 참으로 우리 때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아무리 강호의 여인이 자유롭다고 하나 혼인도 올리지 않은 남녀가 단 둘이서 몇 년을 함께 하다니 말이다.”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장호가 한 마디를 끼어들었다.
“사부님. 그건 지금도 상상하기 힘든 일입니다.”
“아, 그렇더냐? 난 또 강호의 문화가 그사이 참으로 많이 바뀐 줄 알았지 뭐냐.”
“그래서 강진 사숙께서도 그러지 않으셨습니까. 식만 올리지 않았을 뿐, 사실상 혼인 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요.”
“아니, 식을 올리지 않았으면 혼인을 하지 않은 것이지. 마찬가지가 세상 천지에 어디 있단 말이더냐!! 그러고 보니 진이가 그 빼어난 솜씨로 담궈둔 여아홍이 옥녀봉 홍매당 연단실 뒷마당 나무 아래 잘 익어가고 있을 터인데······. 슬슬 그걸 개봉할 때가 된 것 같기도 하고······.”
단순한 거래 대상과도 같은 관계였던 공야찬이 마치 진짜 사부처럼 구는 이 모습이라니. 참으로 격세지감이라는 말 밖에는 나오지 않는 광경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아주 싫지만은 않았다. 또한, 산만한 덩치의 사내놈에게 할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저렇게 의뭉을 떠는 사제가 제법 귀여웠다.
“몸을 보아하니 여전히 벽곡만을 섭취하는 것 같구나. 흐음······. 나도 그것을 삼 년 조금 못되게 도전해보았지만 참으로 대단하다. 이 녀석은 반 년도 채 버티지 못했거늘.”
“사부님, 버티지 못한 것이 아니라, 사숙께서 저와는 영 맞지 않는 것 같다고 득보다 실이 많을거라고 하셔서 끊은 것 아닙니까.”
“그야 매일 배고파서 힘이 없다고 검술 수련도 제대로 하지 못하니 그런 것인지.”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다. 분명 팔년에 가까운 세월을 이야기하기에는 너무나도 부족한 시간이었다.
“백부님 오래간만이네요.”
“오, 아현아!!”
산을 내려온 아현이가 공야찬에게 인사를 했다. 옆에 있던 장호의 눈이 희둥그랗게 변했다. 그도 그럴 것이 운호가 보기에도 본가에 잠시 들렀다 내려온 아현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오랜 여행으로 꼬질꼬질해졌던 몸을 씻어내고 어느새 향유까지 발랐는지 냄새마저도 향기롭다.
공야찬, 장호와 대화를 나누느라 여행길의 먼지가 그대로 앉아있는 운호와 비교하면 한층 더 그러하다.
“이런, 그러고 보니 장문 사숙을 찾아뵙기 전에 그래도 먼지라도 털고 갔어야 하는 것을, 우리가 너무 오래 붙잡아뒀구나.”
“아뇨, 괜찮습니다.”
“괜찮기는. 아무리 그래도······.”
공야찬의 말은 그리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저 하늘 높은 곳에서 별빛이 내려왔다.
아직 해가 선명하게 떠 있는 대낮이었지만 이건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가 없었다.
운호의 몸 주변으로 상서로운 기운이 맴돌았다. 그리하여 그의 몸에 내려앉은 먼지와 때들이 그 기운을 따라 흩어졌다.
-딸꾹
장호가 자신도 모르게 딸꾹질을 했다.
강기라는 것을 처음 보는 것은 아니었다. 3년 전. 산에서 내려왔던 청허 진인이 수강을 보여준 적이 있었다. 인상적이었다. 저 하늘의 별빛이 사람의 손에 맺히는 광경이라니.
하지만 지금 이건 또 달랐다. 그야말로 불가사의하며 신령하다.
“이제 된 것 같습니다.”
“호······, 호신강기를 고작 이런 용도로······.”
너무 놀라 자신도 모르게 생각이 입밖으로 튀어나왔다. 장호가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공야찬의 사나운 시선이 장호에게 향했다.
-쯧
강아현은 그 모습이 퍽이나 웃겼는지 소리 내서 웃었다.
초절정.
잠깐의 대화를 나누는 동안 잊어버렸다. 사문에 존재하는 초절정의 고수들은 존재 자체로 어마어마한 위압감을 뿜어내고 있었기에 그랬던 것도 있었다.
게다가 화산파 자하기공의 특성상 경지가 깊어질수록 더 젊은 모습을 유지하기에 여든이 넘은 고수도 사오십대로 보이기는 했지만, 운호는 아예 경우가 달랐다. 고작 이십 대의 모습 아니던가.
하지만 이 초월적인 현상으로 새삼 실감했다. 지금 자신들의 앞에 있는 이 사람은 인간의 경지를 한 걸음 정도 벗어난 존재라는 것을.
“사부님 그러면 아현이와 함께 장문 사조님께 인사 드리고 오겠습니다.”
“그래, 그러도록 해라.”
공야찬이 자신도 모르게 떨리는 손바닥을 꾸욱 움켜쥐었다.
검종지보.
저 아이를 만난 이후 참으로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물론 여전히 운호에 대한 감정은 복잡했다. 사부였던 굉무자의 숙원을 풀어준 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일까? 아니면 자신의 역할 뺏겨버린 질투일까? 그것도 아니면 제자를 제자로 대하지 못했던 미안함일까.
공야찬이 그저 멀어지는 운호의 등을 바라봤다.
***
“운호야.”
“응?”
“오래간만에 백부님을 보니까 자랑이 하고 싶었어?”
“어?”
“아니, 그렇잖아. 그냥 수건으로 털어내든지 하면 될 것을 굳이 거기서 호신 강기라니······. 너 그거 힘들다고 싸울 때도 잘 안 쓰는 수법이잖아. 쓸데없는 내공 낭비라면서 말이야.”
아현이 웃었다.
최근에도 운호는 종종 사람을 초월한 것 같은 모습을 보여줬다. 특히 명상을 할 때 그러했다. 한없이 가벼워지고 가벼워져서 저 높은 곳으로 떠나버릴 것 같은 감각이었다.
그렇기에 이렇게 운호가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참으로 좋았다. 오래간만에 만난 사부와 사제에게 자랑이라니. 얼마나 인간적인 모습이던가.
운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아니, 자랑이 아니라······. 시간이 없었으니까.”
아현이 운호의 그 어설픈 변명에 대꾸하는 대신 그저 웃었다. 그녀는 운호의 이러한 변명조차도 참으로 보기 좋았다. 그래, 이대로 저 하늘이 운호를 데려가지 않기를. 부디 운호가 하늘과 바람나지 않기를.
아현이 간절하게 소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