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다시 화산으로(3)
-신검의 목적지가 화산이다. 마침내 그가 화산으로 돌아간다.
강호에 소문이 파다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 소문들처럼 운호와 아현의 목적지는 바로 화산이었다.
운호가 화산을 떠나온 것도 벌써 8년이 넘어가고 있었다. 긴 시간이었다. 물론 단순히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화산 일대 제자들의 은퇴.
굉자배의 나이도 어느덧 일흔을 넘은 이들이 절반을 넘어갔다. 보통 사람의 경우 환갑만 지나도 장수했다고 잔치를 연다. 무공을 익혔다고 해도 절정의 경지에 오르지 못한다면 일흔을 넘기기 힘들고, 절정의 고수라고 해도 일흔이 넘어가면 무공의 쇠퇴가 확연하다. 그 말은 현실적으로 이제 굉자배에서 초절정의 고수가 나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이건 사실 참으로 흥미로운 일이었다.
굉자배는 사실 화산 부흥의 상징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은 역대 그 어떤 항렬보다 많은 절정을 배출했다. 헌데 그 많은 절정 가운데 단 하나도 초절정에 오르지 못하다니.
“이게 다 자원이 집중되지 못해서 그래. 바로 윗세대인 청자배를 봐. 절정 고수의 숫자는 적지만 초절정 고수는 무려 넷이나 나왔잖아. 굉자배분도 아마 굉명이나 굉원에게 자원을 집중했다면 이야기는 달라졌을걸?”
“그건 아니지. 어디 초절정이 영약만 잔뜩 먹인다고 되는 경지인가. 최대한 많은 절정을 확보하고 그 가운데 연이 닿는 사람이 나오기를 바라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지. 저건 그냥 운이 없었을 뿐이야.”
“잔뜩 먹이는 게 아니라 좋은 걸 먹였어야지. 굉자배 가능성 없던 사람들이 먹었던 영약을 전부 내다 팔고 그 돈으로 태청단이나 대환단 사다가 굉명이나 굉원한테 몰래 먹였으면 지금보다 훨씬 좋은 결과가 나왔을걸? 청자배 사형제도 결국 매화신단 때문에 초절정에 올랐으니 말이야.”
이를 두고 강호의 호사가들이 이러쿵저러쿵 입방아를 찧어댔다.
“장문 사형 다시 한번 생각해보시지요.”
“굉진 사제, 나는 이미 결정을 내렸네. 더이상 우리가 버티고 있는 것은 욕심일 뿐이야.”
“하지만 너무 이르지 않습니까!! 적어도 다음 배분 아이들의 준비는 끝내고 물러나는 것이······.”
재무각주 굉진자의 말에 굉허자가 조용히 자신의 양팔을 들어 올렸다.
화려한 도포가 스르륵 흘러내리고 그 사이로 앙상하게 마른 양팔이 모습을 드러냈다.
“보게나. 이게 어디 무인의 팔이라던가. 나의 천명은 얼마 남지 않았네.”
일흔넷.
무공을 익히지 않은 촌로였다면 참으로 장수했다는 말을 들을만한 나이였다. 하지만 그런 보통 사람들이 신선처럼 바라보는 대 화산파의 장문인치고는 그리 오래 산 것도 아니다. 그렇기에 굉진자는 몸서리를 치며 그 말에 크게 반박했다.
“장문 사형!! 그게 무슨 흉측한 말씀입니까. 이 사제는 못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클클클, 흉측은 무슨. 나이를 먹었으면 갈 때가 된 것이지. 얼마 전에 굉요도 그리 가지 않았던가.”
“아니, 그거야······.”
“그래, 굉요는 결국 마지막까지 무공을 완성하지 못했었지. 하지만 나도 몸이 이 모양이라서 그런지 요즘은 무공이 점점 무너지는 느낌이야. 그리고 무공이 무너지니, 마음도 함께 약해지더군.”
동기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이 하나둘씩 세상을 떠나고 있었다.
“인정해야지. 우리의 시대는 이미 지났다는 것을······.”
“장문 사형, 왜 자꾸 그렇게 약한 소리를 하십니까. 사백님들도 저리 정정하신데요.”
“클클클, 사부님이나 사백님이 어디 우리와 같은가. 그분들은 그것조차 초월한 분들이신 것을.”
“후, 장문 사형. 설마 현무 그 아이 때문에 이러시는 겁니까? 그렇다면 마음을 돌리시지요. 저희가 지금 이렇게 물러나는 것은 그 아이에게도 썩 좋은 선택은 아닙니다.”
현무 도사의 자하기공이 팔단공에 이른 것은 그들에게도 아주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특히 칠단공에서 무려 이십 년 넘게 막혀있던 외당주 굉명이 그러했다.
“굉진 사제. 기억 나는가 모르겠구만. 그러니까 육십년쯤 전이었나?”
“육십 년 전이요? 아니, 갑자기 그 옛날 이야기는 대체 왜······.”
“굉무 사형이 매일 그러지 않았었나. 자긴 백운태사조님과 같은 천하제일인이 될 거라고. 그때는 나도 자네도 웃기지 말라고. 천하제일인이 되는 건 나라고 떠들었던 것 같은데. 어쩌다 보니 우리가 벌써 이런 나이가 됐구만.”
“아니, 사형!!”
“운호 그 아이를 불렀다네.”
“네? 갑자기 그 아이는 왜!!”
늙은 도사가 웃었다.
“얽힌 매듭은 시간이 지나면 더 풀기 어렵지. 그럴 때 가장 좋은 것은 아무래도 그 얽힌 부분을 잘라내고 남은 부분이라도 사용하는 것 아니겠는가?”
“사형······. 설마?”
“천하제일인이 어려움을 아는 순간, 우리는 함께 천하제일의 문파를 꿈꾸지 않았던가. 그때 뭐라고 했었나. ‘문파의 강성함을 위해서 검종은 너무 위험하다. 그러니 당장에 약간의 성취를 보인다고 해도 그것을 억제함이 옳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굉진 사제. 우리 대 화산에서 천하제일인이 나오고, 대 화산이 천하제일의 문파가 되는 길이 바로 앞에 있다네. 그렇다면 당장에 약간의 어려움이 있다고 해도 그것을 시행함이 옳지 않겠는가?”
굉진자 이진섭.
자신의 조카손자를 위해 애쓰던 화산의 늙은 장로가 고개를 떨궜다.
***
화산까지 약 삼백 리.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다. 운호가 처음 이 길을 걸었던 때는 그의 나이 고작 열 살. 사고무친의 고아로 화산의 협객에게 구명지은을 입은 직후였다.
변한 것은 강산일까? 아니면 운호 자신의 눈높이일까.
그때는 너무 멀게만 느껴졌던 화산까지의 길이 이제는 한달음에 달려갈 수 있는 거리로 느껴졌다.
“팔 년 만인가?”
“그러게, 벌써 그렇게 됐네.”
화산을 떠날 때는 고작 열일곱.
그저 첫사랑을 잃어버린 소년이었다. 그리고 지금 어느새 스물넷.
화산을 떠날 때보다 훨씬 메말랐으며, 퍼석하다. 하지만 그 눈빛만큼은 그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형형하게 빛났다.
“아현아.”
“응?”
“아무래도 잠깐 자리를 비켜줘야 할 것 같은데?”
운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저 먼 하늘.
작은 점 하나가 빠르게 그 크기를 키워갔다.
능공허도(凌空虛道) 육지비행(陸地飛行)
그는 언제나와 같았다.
검은 머리에 부리부리한 호목. 8장에 달하는 키와 그 키에 어울리는 거대한 덩치까지.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하지만 그는 변함이 없었다.
여전히 오십 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젊은 모습을 유지 중이다.
권신 청무진인.
산악과 같은 사내가 운호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허허허, 소문이 정말이었구나!!”
“태사조님을 뵙습니다.”
“놀랍구나. 놀라워. 아직 이립도 되지 않은 나이에 경지에 오르다니.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 강호라지만, 장담하건데 이건 오래 전 달마 대사가 장강을 건넌 이래 처음 있는 일일 것이다.”
“과찬이십니다.”
청무진인의 시선이 옆으로 살짝 움직였다.
“호오, 이제보니 강진의 아이로구나. 몰라볼 뻔했다. 허어, 참으로 놀랍다. 운호가 워낙에 대단하여 상대적으로 묻힌 감이 있지만 스물넷에 절정이라니. 참으로 화산에 큰 복이로구나.”
“감사합니다.”
“아이야, 미안하지만 잠시 자리를 비켜줄 수 있겠느냐? 내 운호와 긴히 나눌 이야기가 있어서 말이다. 화산까지는 지척이니 먼저 가 있는 것도 괜찮을 것 같구나.”
청무진인의 이야기에 운호가 고개를 저으며 한 걸음 자연스럽게 앞으로 걸어 나왔다.
“함께 떠나 오랜 기간 함께 하였습니다. 그러니 돌아가는 것도 함께 하고 싶습니다.”
그 말에 청무 진인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것은 권유였지만 권유가 아니었고, 부탁이었지만 부탁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 화산에서 청무진인은 그런 존재였다.
말할 수 없는 이상한 감정.
하지만 청무는 그 감정이 불쾌함보다는 기꺼움에 가깝다는 것을 인지했다. 참으로 보기 좋지 않은가. 무인이라면 당연히 저정도 기개는 있어야지. 물론 가장 중요한 점은 운호가 그런 기개를 보일만한 자격을 갖췄다는 점이겠지만.
강아현이 한 걸음을 따라 나와 운호의 옆에 나란히 섰다.
참으로 어울리는 한 쌍이다. 물론 사내 쪽이 조금 비루해 보이기는 하지만 그게 뭐 어땠단 말인가. 천하에 다시 없을 인재이거늘.
“그래, 좋다. 아무래도 이 늙은이가 너무 놀라운 소식을 들었던 터라 궁금한 마음에 조금 성급하게 뛰쳐나온 것 같구나. 화산에 돌아오면 운대봉에도 한번 들러주려무나.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전해듣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본인에게 직접 듣는것과는 또 다를 테니 말이다.”
청무가 가볍게 허공을 밟고 뛰어 올랐다.
나타날 때와 크게 다르지 않게 순식간에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마찬가지로 초절정의 경지에 오른 운호였지만 저런 건 여전히 엄두도 나지 않는다. 대체 얼마나 방대하고 정순한 진기를 가지고 있어야 저런 터무니 없는 일이 가능한 것일까? 여기서 화산 운대봉까지 무려 삼백리를 날아가다니. 그야말로 이야기 속의 신선과 같다.
“뭐야? 백운호. 그렇게까지 나와 함께 가고 싶었던 거야?”
강아현이 운호에게 바짝 다가섰다.
그야말로 절정의 아름다움. 오랜 여행으로 찌들었음에도 그것은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운호는 오랜 수행자와 같은 몸과 정신을 갖췄지만, 그 기습적으로 다가온 강아현에게 풍겨나는 방향에 가슴이 크게 두근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야 이렇게 오래 함께 했는데, 마지막에 따로 하는 건 좀 아쉬우니까······.”
“흐음, 그랬구나. 우리 운호는 나랑 그렇게 함께 가고 싶었던 거구나.”
“아니······.”
뭐라 말하려는 운호를 똑바로 바라보고.
말끝을 길게 늘이며 운호를 놀리던 강아현이 말했다.
“다행이다.”
“응? 뭐, 뭐가?”
“뭐기는. 나는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 같은 마음이었잖아. 그러니까 다행이라고.”
한순간 운호의 얼굴이 발그랗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강아현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다. 운호는 본인이 말해놓고도 민망하여 어쩔 줄 모르는 그 모습이 어쩐지 보기 좋았다.
“아, 여기 이상하게 갑자기 덥네? 운호야. 얼른 가자. 태사조님도 기다리시고. 엄마랑 아빠도 목이 빠져라 기다리실거야. 아 그리고 공 사숙. 공 사숙도 엄청 기다리지 않을까? 그리고 네 사제도 있잖아. 듣기로는 그 녀석 요즘 꽤나 잘나간다고 하던데.”
강아현이 횡설수설하며 성큼성큼 앞장서 걸어 나갔다.
“아현아.”
“어? 어?”
“같이 가야지. 같이 가고 싶다며.”
“아니, 잠깐만. 그러니까 좀 더우니까 잠깐 더위 좀 식히고. 응?”
***
“붕괴가 시작된 것 같구나.”
“네? 하지만 아직 기한이 꽤 남았던 걸로 알고 있었는데요.”
“아무래도 상처가 영향을 미친 것 같다.”
“그렇군요······. 하지만 괜찮습니다. 그때와는 다르니까요. 이번에는 미리 뿌려둔 씨앗도 있으니 어렵지 않게 회수할 수 있으실겁니다. 게다가 그 녀석 아주 알차게 잘 자랐거든요.”
“그런가?”
“네, 지금 사용하시는 것보다 훨씬 좋으실 겁니다.”
“기대 하지.”